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혀가 말리는 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겁이 나서 자신의 의지로 절제하고 거부했을 때 혀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에 일어났던 현상이 아내에게 다시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내는 그때도 역시 놀라 기도하다가 말고 응접실로 뛰어나와 묻기를 혀가 자꾸 말리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주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기도할 때 혀에 너무 힘을 주고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한 번도 사모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고전 12:7).  아내는 그때 성령께서 주신 방언(고전 12:11)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방언을 하면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고전 14:28), 생활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볼 때(갈 5:22-23),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아내가 방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성경적이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방언을 점화시킨 것으로 보인 사건은 1900년 12월31일 Topeka, Kansas 신년 집회에서 시작되었는데 Stanley H. Frodsham의 『With Signs Following』에 의하면 벧엘 신학교 ‘기도의 탑’이라고 알려진 방에서 학생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세 시간씩 교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중보(적)기도를 드렸고 이렇게 학생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방언을 통해 여러 학생들에게 임했고 그 후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Roger Stonstad는 『Spirit, Scripture and Theology』에서 당시 학생들이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 감리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부흥사로 활동했던 이 학교 교장인 Charles Fox Parham이 El Dorado Springs, Missouri에 이어 Houston, Texas에서 “성령이 가장 두드러진 해석, 신학과 변증”이라는 설교를 할 때 그곳에 참석했던 William J. Seymour는 Parham의 설교를 받아들였고 그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Los Angeles에 있는 Azusa 거리에서 1906년 4월9일 월요일, 자신과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버려진 감리교 교회에서 매일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Douglas J. Nleson은『The Black Face of Church Renewal』에서 그 결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하심과 같았다고 말하면서 2년 후인 1908년에 이 운동이 거의 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순절교회의 탄생 과정은 아무런 반대가 없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Topeka의 운동과 Azusa의 부흥운동은 많은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의 의해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부되었고 일부 칼빈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루터교회 안에서는 이 운동을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으로 양분되었는데 특히 반대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마귀적이라고 비난하면서 1909년 오순절 부흥 운동을 반대하는 “베를린 선언문”(Declaration of Berlin)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성령의 임재를 거부하던 독일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는 사라졌고 이렇게 조롱을 받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20세기에 들어와 오순절 지도자들 중에 한 사람인 Thomas F. Zimmerman과 오순절 운동의 대변인으로 평가받는 David J. Du Plessis에 의해 일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사귐을 갖게 되면서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통해 Van Nuy, California 성공회 사제인 Dennis Bennett으로 부터 시작된 제2의 물결인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 그리고 John Wimbur에 의해 일어나고 Peter Wagner가 명명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초교파적으로 확산된 제3의 ‘물결운동’(The Third Wave)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거나 칼빈주의 신학에 병적으로 집착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은사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사도시대 마지막에 중단되었다고 끝까지 주장하겠지만 오늘날 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자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 이상 방언만이 최고의 영성이거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의 은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고전 12:30), 하나님을 떠나 죽어 있는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행 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외는 없고(롬 1:16),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이지(고전 1:18), 어떤 특정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5:24).  물론 방언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개인의 경건생활, 즉 자기 덕을 세우는데 있어(고전 14:4), 방언만큼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금지해야 될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에 따라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고전 14:39).  그래서 우리는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영성의 전부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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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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