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한 인격체라는 사실은 믿으나(엡 4:30),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존재이거나 피조된 인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단)들도 있지만,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창 1:2)란 사실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을 직접 ‘하나님’이라 호칭하고 있으며(행 5:3-4, 고전 3:16), ‘주’라고 부르기도 하고(살후 3:5),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신적속성’, 즉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영원성’(히 9:14)과 ‘전능성’(눅 1:35), 그리고 ‘전지성’(고전 2:10-11)과 ‘편재성’(시 139:7-10), 더 나아가 ‘거룩성’(롬 1:4)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처럼 창조(창 1:2, 욥 26:13, 시 33:61)와 섭리(시 104:30), 그리고 인간 구원의 주체이심을 보여주는데(요 3:5-6, 딛 3:5),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지니신 존귀함을 성령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써 성령 역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아야 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마 28:19, 고후 13:13).  James I. Packer는 성부와 성자에게 초점을 둘 때 성령을 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성령에게 초점을 둘 때 성부와 성자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이 이 점에 있어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라고 해서 삼위 중에 성령에게만 국한되는 사역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공동사역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끝이 없고 유한하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의 하나님이신데(시 145:3),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은 우리 자신이 만든 인위적인 틀 안에 제한하거나 또는 경험과 사역 양쪽에서 융통성이 없는 고정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신 무소불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욥 42:2)은 영적은사들의 풍부한 다양성, 즉 그 전체적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색깔로 된 다양한 실들이 섞여 수놓은 양탄자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각 사람이 받은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롬 12:6), 우리가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사용해야 합니다(벧전 4:10).  여기서 궁금한 것은 “얼마나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John Stott고린도전서 12장8-10, 29-30절(열세 개의 은사)과 로마서 12장6-8절(일곱 개의 은사), 에베소서 4장11절(다섯 개의 은사)과 베드로전서 4장11절에서 나오는 두 개의 은사, 즉 ‘만일 누가 말하려면’ ‘누가 봉사하려면’이라는 구절을 제시하면서『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성경에 기록된 이 목록들이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다 망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가 다양하다면 이 은사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나오는 ‘은사’‘직임’‘역사’를 비교해 보는 것인데, 사도 바울이 본문에 나오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 다른 위격과 연관시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병행을 이루고 있는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라는 말은 주체적 성격을 띠고 있는 ‘동일한 성령’, ‘동일한 주’, ‘동일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은사의 삼위일체성,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공동적 토대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를 놓고 Richard Gaffin『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성령은 성부의 약속이며(눅 24:49, 행 1:4), 성부도 로마서 12장3절과 고린도전서 12장28절 말씀을 근거해 은사(봉사를 위한 능력)들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롬 12:6-8), 승천하신 그리스도 역시 은사(사역의 직분)들을 주시며(엡 4:7-11), 성령도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에(고전 12:11), 이러한 은사의 삼위일체성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고전 12:4-6), “은사는 성령 것만이 아니라 성자의 것이요 성부의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사역)을 하지만 그 직무와 직무를 수행하는 양상이 각기 다른 것처럼 ‘은사들’은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은사들이고, ‘직임들’은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 봉사들이고, ‘역사들’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령이 은사를 주시고, 예수님은 직임을 주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주신다는 식으로 구분해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는 성령이 중심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14장17절에서 ‘성령의 내주’14장23절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내주’로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일하신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동일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봉사, 그리고 동일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은사’ ‘직임’을 관련시켜 보면 은사는 과시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봉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결국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는데, Stott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종합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립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그러면서 성령이 삼위 중에 실행자이시며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요 1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은사들에서도 그것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 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은사가 단순히 성령 활동의 표현이 아니라 성자와 성부의 주도적 활동과도 직결되어 있으며 은사는 봉사와 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