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2권6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왜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그리고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삶과 인격의 변화에 대해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하나하나 밝히며,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2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미국 내 최고의 크리스천 작가로 세 번이나 선정된 맥스 루케이도의 단순 명쾌한 문체와 시적인 언어, 영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이 책은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가 주는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교만과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도 사랑을 표현하고자 선물주기를 좋아하는데 순전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즐겨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지만 십자가의 선물만큼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 주는 선물은 없다.  십자가의 선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단지 피를 흘리기만 하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많은 것을 하셨다.  십자가의 언덕에는 하나님의 선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선물들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  채찍질은 군병들이 십자가에 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세 번째 일이었다.  명령에 따랐던 것이기에 이 두 행동에 대해서 군병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딴 생각이 있었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다.  침 뱉음이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으로 군병들이 뱉은 침은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시고 그것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다.  죄인들에게 성인의 얼굴을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얼굴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중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시 말해 성육신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공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고 죄를 받아들인 것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마에 얹힌 가시면류관은 그분의 마음을 찌른 우리의 죄의 열매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죄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예수님의 양팔을 벌려 손에 대못을 대고 망치를 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으셨다.  십자가 옆의 무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기 위해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들의 죄의 목록이었다.  망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은 로마 보병의 것이 아니었다.  망치를 내리치던 힘은 성난 폭동의 것이 아니었다.  사형 선고는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결정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친히 못을 택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희생으로 가리고 피로 덮기 위해서 그분은 못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렇기에 못을 택하셨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 손으로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로마인의 명령에 따라 3개 국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죄 패가 있었다.  이 죄 패에는 온 세상에 다가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죄 패를 통해 유대인들을 위협하고 조롱하려던 것이 빌라도의 의도였지만 하나님은 다른 뜻이 있었다.  빌라도는 자신도 모르게 천국의 서기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죄 패에 받아 적었던 것이다.  그 죄 패로 인해 즉각적인 열매가 맺혔고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하였다.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못할 언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은 죄 패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때로는 풍요의 언어로 때로는 궁핍의 언어로, 때로는 아픔의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갈보리 십자가 옆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두 강도는 공통점이 너무 많았다.  동일한 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동일하게 사형을 선고 받았다.  동일한 무리에 둘러싸였으며 동일한 예수님과 동일한 거리를 두고 달려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분을 욕하는 길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그분께 기도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한 사람이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구해주셨고, 다른 사람이 그분을 욕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냥 두셨다.  그분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길은 ‘비아 돌로로사’ 즉 슬픔의 길이다.  전통에 따르면 예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갈보리로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빌라도의 법정이 아니라 천국의 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 하늘의 집을 떠나시던 날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분의 뜻은 오직 하나,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 여정을 화목하게 하심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온갖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했다.  한걸음 나아가 그분을 대적했으며 원수가 되기까지 했다.  교만은 우리를 넘어지게 했으며 수치는 넘어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초청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신다.


성경은 우리의 행실을 우리가 입은 옷으로 표현하곤 한다.  예수님의 성품은 그분의 옷처럼 솔기가 여기저기 이어 붙인 데가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입으신 옷처럼 나누어진 데 없이 온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리스도는 이 솔기 없는 완전한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으셨다.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벌거벗음의 수치, 패배의 수치, 죄의 수치, 그분은 이음매 없는 순결의 옷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누덕누덕 기운 우리의 추한 옷을 대신 입으셨다.  비록 우리가 죄의 옷을 입고 십자가 앞에 왔지만 떠날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어주신 그분의 옷을 입고 떠난다.  그리스도 그분을 입고 떠난다.  예수님의 몸은 찢기셨다.  채찍질에, 가시에, 십자가의 무게와 못의 구멍으로 찢기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았다.  처참하게 찢긴 그 몸을 통해 영광의 문이 열린 것이다.   찢어진 휘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자신과 지성소 사이에 더 이상 장벽이 없음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언제 어느 때든 자유롭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던 죄의 장벽을 그분이 제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장벽을 쌓아 올리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찢어진 육체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당신은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십자가를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목마르셨을까?  그분은 목말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셨다.  못 박히시기 전에 누군가 마실 것을 드렸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아니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당신도 아픔을 느끼리라는 것을 당신도 목마르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리에 서 보셨기에 당신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이 이해하시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분이 이해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는가?  포도주 적신 해융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위치적 성화는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며, 점진적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과 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피는 당신을 위해 내주신 하나님의 제물로서 당신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없애 준다.  물은 당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원 안에서 당신을 자라나게 한다.  세월이 간다고 처음 구원 받은 날보다 더 구원 받은 자가 될 수는 없지만 구원 안에서 자라갈 수 있다.  피는 받아들이지만 물은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쁘지만 그리스도와 화목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분은 어떻게 공의와 자비를 둘 다 지킬 수 있으실까?  어떻게 진리와 긍휼을 함께 베풀 수 있으실까?  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별 설득력 없는 해답 두 개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의 관점으로 보면 세 번째 해답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에게 옮겨 놓고 십자가에서 그 죄를 벌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간음죄를 범한 다윗도, 살인범 바울도, 배반자 베드로도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삶에 관한 한 그들은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바닥이 없으시다.  우리는 누구나 비극을 만나며 비극의 상징물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조차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요한에게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큰 비극적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빈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그 죽음의 옷자락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게 된다.  수의처럼 슬픈 것을 사용하셔서 요한의 삶을 바꾸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서 결혼식장의 빈 포도주 항아리는 능력의 상징이 되며, 과부의 동전은 아낌없이 드림의 상징이 되며, 베들레헴의 볼품없는 구유는 헌신의 상징이 되며, 사형의 도구는 그분의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죽음의 옷을 취해 생명의 화신을 삼은 것이다.


엉터리와 아이러니. 갈보리 언덕은 그 둘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라면 구속의 드라마를 그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탁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명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 시간의 각본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의 삶의 십자가가 되려면 당신은 그 언덕에 뭔가를 가져와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버리신 것을 보았다.  당신도 뭔가를 내려놓지 않겠는가?   당신의 나쁜 순간들, 화난 순간들, 불안한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라.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순간들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들은 절대 우연에 맡겨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길을 고르셨다.  하나님이 못을 택하셨다.  우리 주님이 세 개의 십자가를 꽂으셨고 죄 패를 써 붙이셨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세부사항, 하나님의 주권이 그 일보다 더 철저히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중하게 바로 이 메시지를 남기셨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이다. 다 너를 위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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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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