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오순절 신학을 대할 때는 이 신학만이 가장 최고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소 말씀에 깊이에 있어 어딘가 빈약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사에 있어서는 청승맞게 드려지는 장례식 같은 예배와 메마른 말씀을 전하는 죽은 정통 장로교 신학보다는 백번 천번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장로교에서 신(神)처럼 여기는 Calvin 신학을 대했을 때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 중 수업이 중단될 정도로 서너 번에 걸쳐 교수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 주제가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솔직한 고백은 그 당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 앞에서 교수와 맞장토론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논쟁을 벌인 이유는 장로교 사람들이 철저하게 Calvinism로 무장되어 있듯이 나 역시 이미 Pentecostalism으로 그들 못지않게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은사중지론적인 교리 속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오순절 신학이 점점 멀어지고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에 빠지면서 누군가 은사에 대해 물어보면 균형 잡힌 성경적인 대답을 주기보다는 AD 1세기 말에 모든 은사가 끝난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초자연적인 능력의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성경해석을 하는 은사폐지론자의 입장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Moody Bible Institute에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이며 존경받는 Gene A. Getz는 1972년에 설립한 Fellowship Bible Church의 담임목사로 이미 리더십에 관한 그의 탁월한 식견은 50여권이 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는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불릴 만큼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킨 경험 많은 전문가이자 탁월한 성경학자입니다.  처음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이 은사 발견에 힘써야 한다고 강하게 가르쳤으나 그 입장을 바꾸어 성령의 은사 발견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의 견해를 주의 깊게 고찰할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뛰어난 성경학자이고 남들이 말하는 성공한 목회자이며 교회 설립자였기에 그의 견해를 반박하기란 그다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회원리를 설명할 때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보다는 ‘몸의 성숙’ 즉 지도자로서의 성품과 믿음, 그리고 소망과 사랑을 강조하면서(딤전 3:1-13, 딛 1:5-9), 성령의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는 이론에 대한 반대 이유로 ‘혼돈’, ‘합리화’, ‘착각’, 이 세 가지가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Building Up One Another』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영적은사를 발견하도록 노력하라는 권면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제자 삼는데 특별한 사명감을 품고 30년이 넘도록 목회를 하면서 제자훈련에 관한 획기적인 책들을 여러 권 저술하고, 본인 스스로가 전통적 은사중단주의 학교인 Talbot School of Theology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Bill Hull 목사는『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이런 고백합니다.  “성령의 은사들, 즉 방언, 신유, 기적, 그리고 예언과 같은 것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만약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략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실 Bill Hull 목사는 대학교 시절부터 오순절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지만 Talbot School of Theology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의 신앙관이 변한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고린도전서 12-14장을 주해하는 강의시간을 통해 수년 간 배워왔던 은사중단주의자들이 말이 설득력이 없어 보였던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솔직한 고백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 우리가 사역에 허락된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회를 놓치는 비극을 초래할 것임을 나는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영적인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나의 지난 목회 기간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성경을 통해 이런 은사의 역할을 배우면서 다시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대부분이 은사중단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가 아니라 개교회의 전통과 문화와 제도 그리고 신학자나 목사로부터 신학적 교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은사는 사도시대인 초대교회 때만 필요했던 것으로 성경이 완성된 지금 우리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문화와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솔직히 모든 은사중지론자가 사도들이 죽은 뒤에 기적적인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신학자나 목사의 가르침, 즉 ‘은사중지론적인 교리’라는 떼어내기 힘든 고리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하심과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여정에 있어서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거나 걸림돌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J. I. Packer“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의 희생자들이며 동시에 수혜자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 각자가 면밀한 성경공부를 통해 믿음에 도달하거나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에 의해 전수되어 온 은사중지론적인 교리들,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 가르침에 혜택과 영향을 받아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직접 연구하고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행 17:11), 오히려 균형 잡히지 못한 선생들의 가르침에 더 의존적인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딤후 4:3-4).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적인 은사들을 믿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처럼(요 3:1-10), 그들 자신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거나 체험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5:37).  다시 말해 율법주의자들이 결혼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처럼(딤전 4:1-3), 신자들은 성경에서 은사가 소멸되었다고 가르치는 거짓선생들, 즉 영적으로 무지하고(요 3:9), 성경을 곡해하며(마 15:9), 죽은 정통을 가르치는 자들을 통해(막 7:1-6), 은사를 믿지 않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이 이러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대적해 온 것은 불신자가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이고, 이런 교회들이 관료적 지도력의 부상으로 인해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거부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신 것입니다(엡 4:30).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말씀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신 것을 아셨고(마 10:1, 막 16:15-20),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는데, 주님은 사역을 하실 때 영적인 것을 만족시키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육적인 면을 동시에 만져주셨고(마 4:23-24),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말한 것처럼(살전 1:5),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도 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귀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항복하는 것도 기적이지만 더 큰 기적이 있다면 말씀 선포로 인해 불신자가 거듭나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엡 2:1-6).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어느 한 사람이 악한 영에서 놓여남을 받거나(눅 4:18-19), 아니면 앉은뱅이가 걷고 뛰듯이(마 11:5), 혹은 눈을 떠 보게 된다면(눅 7:22), 이 구원받는 과정에 있어 이러한 기적들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행 8:4-13), 복음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막 16:20).  그리고 이런 기적을 경험할 때 잡다한 신학적 논쟁이 끝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을 때(행 3:1-10),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신학자와 목사가 다 모여 있었지만(행 4:1-6),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행 4:14), 만약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고 걷는다면 거기에 무슨 ‘쓰레기 같이 오염된 교리’나 이단처럼 이것저것 마구 갖다 붙인 ‘엉터리 신학적 해석’이 필요 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성령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들은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축소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더 나아가 이런 가르침은 초자연적이며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길 바라는 성도들의 깊은 갈망을 둔화시키는데 일조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신학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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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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