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말들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야, 모든 것은 질서대로 해야지, 질서대로!”  그래서 교회는 마치 질서의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예배드릴 때마다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질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지만(고전 14:26), 성경에서 말하는 질서란 인간들이 생각하거나 만들어낸 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혼잡하지 않는 정리정돈이 잘된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사 55:8-9).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성령(엡 4:30)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 그가 황홀경의 상태에서 하루 종일 알몸으로 춤추고 소리치며 예언을 했다고 성경은 증거 하는데(삼상 19:23-24), 솔직히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전혀 질서적이지 않고 귀신들린 사람(막 5:1-20), 혹은 노출증 환자나(사 20:1-6), 어떤 정신병자의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울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던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감에 있어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이지 성령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일을 차서를 따라 순서 있게(고전 14:27), 그리고 질서가 있어야 하고(고전 14:31), 동시에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살전 5:19).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 질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데, Lloyd Jones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모든 일을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그만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는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고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언제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 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아주 심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 프로그램에 매여 있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사실 Lloyd Jones가 쓴 『부흥』은 5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인데 꼭 한국/한인교회를 수십 차례 방문하고 나서 쓴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영적인 사람이라 앞으로 미래의 교회가 그렇게 되어 질 것을 알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 현실과 너무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오전 11시 시작해서 12시가 되면 예배를 마칩니다.  만약 설교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얼굴부터 굳어지고 찬양을 반복적으로 하면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데, 사실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물고문”“전기고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문(?)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 정확하게 11시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안절부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이미 율법주의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매여 있다는 증거이고(갈 5:1), 이러한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의 특징은 예배를 드려도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감격이 없고, 혹시 주일예배 하루라도 빠지면 하나님이 진노하지는 않을까 마음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마음에 기쁨이 없고, 마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에베소 교회처럼 뜨거움도 없고 오직 형식과 제도에만 얽매여 있어 윤리적인 행위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계 2:1-7).  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여섯 번째의 남자와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거기에다 율법적인 사고방식까지 매여 있으니 얼마나 예수님 보시기에 가련하고 불쌍해 보여겠습니까?  그 여자가 자기 조상들은 이 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자(요 4:20), 주님이 그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1-24).  이 말씀은 앞으로 있을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을 말해줍니다(롬 12:1-2, 빌 3:3).

 

여기서 ‘신령’은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영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하고, 그리고 ‘진정’이란 예수 안에서 계시된 참된 진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한다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고전 15:1-4),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돌아가셨는지를(고전 11:24), 알고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를(요 4:22),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서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입니다(요 4:20).  쉽게 말하면 교회에 가서 본인 나름대로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지만 마당 뜰만 밟고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사 1:10-17).  여기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죄사함을 받은 감격 속에서 드려지는 진실 되고 온전한 예배, 즉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눅 6:46), 성령 안에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인 참된 예배를 말합니다(롬 12:1-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호 6:6).  예를 들어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아마 예배가 지겨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죄 용서함을 받은 감격이 없기 때문에 예배가 지겨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정해진 장소,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오늘날로 쉽게 말한다면 주일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주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지 않는다는 말일까요?(행 16:24-26, 20:7, 28:23, 느 8:1-3).  물론 좋은 전통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살후 2:15), 성경에는 오전11시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없을뿐더러, 문제는 인간이 만든 교회전통은 거의 사람을 형식과 제도에 묶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 수 있고(막 7:1-23), 잘못된 전통은 영혼을 도적질하고(막 7:1-23), 심령을 메마르게 만들어 의식이나 형식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골 2:8).  그러나 우리는 신약교회의 예배를 통해 성령이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데 고린도전서 14장26절에 보면 당시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일 때'는 예배를 말하고, ‘계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언을 뜻하는데,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약교회의 예배는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셨습니다(빌 3:3).  요약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찬송과 가르치는 말씀과 예언, 그리고 방언과 통역함도 있는데 바울은 이 토대 위에서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델은 어디에다 맞추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잘 인쇄된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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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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