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문제의 모든 측면 중에서

오늘날 성령의 권위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관심은 우리 주님의 인격과 권위에 쏠려 있다.

물론 성경과 그 권위에도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성령과 그의 권위에 대해서는 얼마나 듣고 있는가?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어떤 국면도 이와 같이 비극적이리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잘못 이해되어 온 것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이 질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의 주된 근원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소홀히 취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체면과 위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위엄이란 말은 

내가 볼 때 19세기 중엽에 사용되기 시작한 치명적인 단어이다.

그 세대의 선조들은 큰 신앙적 각성과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였다.

그들 자신의 위엄 또는 지위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즈음에

이와 다른 사상이 들어와

사람들은 위엄을 갖춘 예배의식의 필요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사의 회심이나 성령충만함,

그리고 이에 따르는 영적 통찰력과 권위보다는

목사의 지적훈련이나 지식구비에 더 큰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이 행해진 것은

‘위엄을 갖춘’ 형식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한 결과 중 하나는

교회가 점점 형식과 의식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종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랑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중 교육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를 좀 더 유식한 목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

‘구식설교’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체면’이란 일반적인 범주에 드는 것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 밀접한 관계된 것으로서

또 다른 이유는 ‘열렬한 믿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지나친 행동이나 감정에 두려움을 품고 왔다.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매우 강조하는 여러 분파나 교단 이야기를 들을 때,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저들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절제할 줄을 모르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스스로 반대편 극단으로 이끌려 가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성령을 소멸하고 슬프게 하는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신이라는 비난이 복음주의자들에게 가해진 적이 있었다.

이러한 비난은 200년 전 조지 휘트필드, 존 웨슬리,

그리고 이들의 추종자들에게 가해졌고,

이들은 끊임없이 감독들과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해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때로는 거의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것이

마치 근본적으로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비난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 같다.

나는 결코 지나친 것이나 광신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험은

이러한 것들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로이드 존스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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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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