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역자들 중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영적인 능력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치유를 향한 열망과 집회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치유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오해할 때가 많고, 또한 치유 대상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신다는 약속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거나 지금까지 자신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마치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한 것처럼 언제나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사역을 행하는 모든 사역자가 알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대로 역사하시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역자가 성령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사역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오용은 위신을 세우거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단호히 거부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비추어 볼 때(요 5:19, 30), 그분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 안에서 행하여지지 않는 사역은 그것이 ‘치유’, ‘기름부음’, ‘예언’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없고(고전 13:1-3),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때 항상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셨고(마 14:14), 그분의 사랑으로 감싸는 능력을 통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행하신 것처럼(막 5:19), 우리의 목적 또한 그분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의 또 다른 문제는 치유과정 중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의 믿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인데, 물론 치유 대상자가 굳센 믿음의 소유자라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하고 판단할 때가 많은데 사실 치유를 비는 기도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치유과정에서 믿음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믿음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이 즉석에서 고침을 받는가 하면 분명 보기에는 굳센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치유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어떤 사람이 치유 받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믿음의 분량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인상을 지나치게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여자의 귀신들린 자녀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 부모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았고(마 15:21-28),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은 아무런 믿음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냥 불쌍히 여겨주셨기에 고침을 받았듯이(막 5:1-20), 사역자가 능력이 많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마 8:3)나 베데스다 못가의 삼십 팔년 된 병자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만(요 5:30), 그분의 주권적인 능력을 통해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신 32:3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나 능력보다는 인간의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실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가령 어떤 사람에게 “만약 당신에게 성령충만한 믿음이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을 뗀데”라는 인상을 주는 것 역시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에 응답하실 뿐(마 9:29), 결코 그것에 의해 유도 당하시는 법이 없고 그분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렘 33:2).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신다고 할지라도 치유 받지 못한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고 판단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고(고전 4:3-4), 치유의 결과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하고(요 5:19), 단지 온갖 사랑을 다 기울여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사역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마 10:7-13).  그리고 어떤 틀에 잡힌 치유사역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사역자가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물론 대규모 집회에서는 불가피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에도(눅 4:40-41),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셨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막 1:32-34).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하지 않는 모든 치유사역은(막 5:19), 결코 하나님의 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요 5:30), 대체로 기도를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혈루증을 앓은 여자처럼 예민하거나 긴장된 상태에 있기 마련이고(눅 8:43-48), 이들 중에는 전에 한 번도 이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도 많이 있기에 가능한 긴장을 풀게하고(막 9:20-27),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며(막 5:35-43), 결코 격한 감정을 받도록 유도해서는 안 되기에 치유를 행하는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것처럼 사역을 행할 때 불필요하게 큰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역자는 치유사역을 행할 때 가능한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행 3:12), 기도 받는 사람들 역시 될 수 있는 대로 가나안 여자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되는데(마 15:27), 그 이유는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어떤 감정으로도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사역자가 그들을 치유하거나 또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본인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치유를 행할 때 치유를 받는 사람이나 기도하는 사람 모두가 평온한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에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을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렘 33:2), 최선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역자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유를 위한 기도  (0) 2014.12.27
믿음을 통한 기도  (0) 2014.09.06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0) 2014.06.28
상처 입은 사역자  (0) 2014.03.2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