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 가족 중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하루아침에 잃었을 때 그 마음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들 중에 신앙의 회의를 느끼거나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악한 마음을 품고’(히 3:12),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슷하게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을 받은 사람들 중에 오랫동안 방언을 하다가 어느 신학자/목사가 쓴 빈약하고 허접한 글이나 책을 읽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언기도를 하루아침에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미혹의 영에게 속아 초대교회 때 끝난 방언을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 원망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것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마귀는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미혹하는데 있어(요 10:10), 간교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8:44),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날 은사에 대한 신학자/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겠지만(히 5:14), 만약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다면(엡 6:10-18),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좋은 은사들(약 1:17)을 초개와 같이 버리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귀신의 가르침이나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에게 충동질 당하게 된다면 아마 예수님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는 믿는 자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지만(고전 12:4-11), 경험으로 봤을 때 지성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이 거의 방언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지적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이런 지식인은 이성에 초점을 너무 맞추고 있어 자신의 혀를 성령에게 순복시키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방언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식과 통제력을 갖은 상태에서 방언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시작하고 원하는 때 끝낼 수도 있습니다(고전 14:27-32). 여기서 성령이 주시는 방언(고전 12:11)을 노래 부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은 늘 우리에게 있듯이 노래를 하고자 할 때에 노래할 수 있고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과 같이 방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고전 14:15).  물론 방언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사탄은 처음 몇 주 동안 거짓말로 “진짜가 아니야, 네가 가짜로 하는거야!”라고 의심을 심어줄 수 있지만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마 7:20).  다시 말해 얼마동안 방언기도를 드리고 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며 성령께 민감해지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픈 소원이 더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본인 자신이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주님과 긴밀한 소통을 하는 기도의 언어라고 볼 수 있고(유 20절), 이 은사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은 일반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에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영으로부터 오는데 이때에도 말하는 것이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고전 14:2), 만약 여기서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됩니다(고전 14:12-13).  이렇게 방언은 귀중한 은사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준다거나 억지로 따라서 할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은근히 강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성령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고전 12:11).


다른 하나는 방언의 은사가 신자의 영적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은사가 나타나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높일 때가 있는데 물론 은사는 귀한 선물이긴 하지만(엡 4:8), 베드로처럼 은사를 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행 3:12).  한 마디로 은사는 교회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고전 12:7), 영적수준을 재는 잣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한 것에 대해 무척 흥분하고 있을 때, 그들이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17-20). 무엇보다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은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할 때 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데, 사실 방언을 포함하여 모든 은사들의 경우 억지로 흉내 내도록 부담감을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역자 들 중에 은사 때문에 교만하게 행동하면서도 정작 본인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언, 불편한 진실인가?  (0) 2017.12.02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0) 2017.11.04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  (0) 2016.08.20
방언의 은사  (0) 2016.07.02
방언기도의 능력  (0) 2016.04.0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