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채플의 교인들은 나의 아내 루이스가 겪은 심각한 기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3년간 지속되었다.  한번은 루이스가 기침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런던에 있는 성토마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 전문의는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않으면 망막이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끔찍한 날들이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데 아내의 병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의 기도로 치유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와 그의 아내가 친절하게도 루이스를 기도해 주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채플로 찾아왔다.  당시 루이스는 기침 때문에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요.”  그녀는 간신히 교회에 도착했다.  대대적인 광고나 예배도 없었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라는 강조하는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부부는 아내에게 대략 5분 정도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아내는 즉시 나았다.  이것은 1994년 12월의 일이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의 치유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했던 기침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이 간증은 R. T. Kendall 목사의 진솔한 고백으로 당시 루이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통해 치유기도를 받던 날은 거의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물론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무척 거스리거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은사 중지론자들은 이런 은사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강변하는데, 이들의 말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정경의 마지막 말씀을 기록할 때까지 복음의 진리와 함께 하며 그 진리가 이미 입증됐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런 은사들을 나타낼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성경 기자도 기록된 성경이 표적과 기사 등의 실체를 대신하거나 어떤 의미에서 대체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과거에는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데 필수적이었다면(롬 15:18), 지금 불신 세상에서는 더더욱 필요할 것이고(막 16:20),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도 사역을 입증하고 확증하기 위해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는데(요 14:11), 만일 이것이 주님에게 필수적이었다면 지금처럼 타락하고 패역한 이 시대에는 얼마나 더 필수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은사를 배제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일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마 12:22-37), “은사들은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적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라는 D. A. Carson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답을 찾아야 하는데, 먼저 고린도전서 12장7절 말씀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각각의 은사는 교회를 강화시키고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고(고전 14:4), 이렇게 각 신자에게 성령이 나타나시는 방식,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산출하는 것이 그분 뜻대로 각 사람에 주시는 은사인데(고전 14:11), 이 은사의 주된 목적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이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써(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 나가는 공동의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엡 4:16),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엡 4:12), 결국 은사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개인을 세워주는 것도 은사의 목적으로 볼 수 있지만(고전 14:4),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말한 것처럼 은사의 다양성(고전 12:14)과 통일성(고전 12:20)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종속적인 목적이 있습니다(고전 12:4-6).  즉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중에 필요치 않은 은사는 하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인(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은사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른 은사들과 달리 가장 논쟁이 심한 은사가 방언인데, 궁금한 것은 이 은사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성령 하나님은 고린도교회 모임에서 방언이 사용되도록 통역의 은사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26).  또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사도 바울 자신은 은밀히 홀로 기도할 때 그 은사를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사실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고전 14:29), 확실한 것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기도로 보냈다는 것입니다(고전 14:18).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방언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5), 무엇보다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영적생활과 믿음을 강화시키는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더 정확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말한 것은 그 은사가 개인적인 강화뿐만 아니라 통역이 있을 때(고전 14:13), 교회에 유익이 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받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환언하면 방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격려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고(고전 14:3, 26), 이 은사들이 교회로부터 제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  (0) 2016.08.20
방언의 은사  (0) 2016.07.02
방언기도를 포기한 사람  (0) 2016.01.09
방언은 인간의 언어인가?  (0) 2015.11.21
내가 체험한 방언의 은사  (0) 2015.09.2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