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자살

자살 2023. 8. 13. 14:45

지금 우리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 기업가들, 연예인들 중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한다.  이들 중에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가진 자들도 있다.  특별히 목회자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슈화되지 않는다.  1년 전 어느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의견 충돌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목숨을 끊었다.  한 분은 교회 종탑에서, 다른 한 분은 장로 집 근처 나무에서, 또 다른 한 분은 교회 화장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귀중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 정말 자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남아 있는 유가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이 심적 고통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짊어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16:26).  문제는 그 귀한 영혼이 자살한 후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들어간 낙원으로 간 것일까?(눅 23:43).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으로 간 것일까?(마 27:5).    

자살에 대한 문제를 놓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며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런 주장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그 자살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자살한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죽은 사람이 야곱처럼 선택을 받았는지, 에서처럼 버림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롬 9:9-13). 

Jonathan Edwards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신앙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신앙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스스로 알 수 있다(고후 13:5),  하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조한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교회 안에서는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4:5).  만약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누가 예정이 되고 선택을 받았는지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지 목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자나 목사들은 서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배워온 방식대로 해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생명(창 1:27)은 가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그 자체 외에 목적(사 43:7, 21)과 존엄성(고전 15:39-40)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의 존재 여부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며(창 1:28),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시 8:3-8),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다(요 3:16).  이러한 인간의 가치의 중요성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그 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다(마 6:25, 10:31, 12:12, 20:28, 막 2:27, 8:36).  이 모든 것은 그 가치에 있어 인간은 매우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창 5:1-2).   

그런데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살인하지 말 것(출 20:13)을 누차 경고하셨다(롬 13:9).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신 5:17), 밑바탕에는 인간 가치의 중요성과 존엄성,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그분께 속한다는 근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겔 18:4).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지만(렘 22:3), 아히도벨이나(삼하 17:23), 가룟 유다처럼(마 27:5),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 2:7).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간에 생명을 죽이는 것(출 21:12)은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이 된다(민 16:2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5문에서도 살인의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이웃을 해쳐서도 안 된다”.  자살은 그분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갔다는 말은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말이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욘 2:9).  극단적 선택한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명시적인 구절도 없다.  그러나 ‘제 곳에 갔다’(행 1:25)라는 구절과 ‘열매로 그들을 알라’라는 구절은 있다(마 7:7:16).  이 구절들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정확한 진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전 4:5).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직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열매로 그들을 분별할 수밖에 없다(마 7:20).  이것은 주님이 삶과 행실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부추기는 구절들이 일절 없다(렘 29:11).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향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신 5:17).  목회자에게 양을 맡기신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21:15-17).  만약 목사의 직분을 받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면 그는 일반 신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약 3:1).  그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신자도 자살하면 그 죄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마 5:21).  하물며 복음을 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양들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Werther effect, 즉 ‘베르테르 효과’를 나을 가능성이 크다.  오래전 유명 연예인이 자살할 때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남아 있는 가족들은 자살 고위험군이다.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살한 사람에게 과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이다(마 25:21).  “네가 목매어 죽을 때 내 마음이 정말 기쁘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실까?  만약 내 자식이 죽겠다고 소란을 피우는데, 그런 자식에게 칼을 주고 “사무라이처럼 죽어봐!”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 부모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친아버지(마 7:9-11)가 아닌 의붓아버지 마귀다(요 10:10).  누군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예수님은 분명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30).  왜냐하면 주어진 재능을 썩히고 생명의 존엄성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모든 생명의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민 27:16).  또한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것임(창 9:6)은 물론,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낳아주신 부모에게 최악의 불효를 끼치는 것이다. 

자살한 사람은 이미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행 1:25).  문제는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들의 주된 잘못은 교인 하나만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마 23:15).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눅 11:52),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쳐(마 15:9)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마 15:14).  가르치는 선생이 ‘지옥의 자식’이라면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최후는 말할 것도 없다.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있어 중립적인 태도는 불가능하다(막 9:40).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잡소리 신학으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자살에 대한 문제를 놓고 신학적 교리를 끌어다가 궤변을 늘어놓거나, 혹은 질병(우울증, 정신병) 문제라고 운운하면서 자살을 정당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자 엘리야도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왕상 19장).  그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약 5:17). 

가끔 신학자나 목사가 입만 열면 무슨 주옥같은 복음적인 말씀이 나오는 줄 알고 열심히 귀담아듣는 멍한 교인들이 있다.  시력이 나쁜 양들, 즉 분별력이 없는 양들은 잘 속아 넘어간다.  이런 양들은 방향 감각이 없고 미련해서 한 번 시험에 들고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한다.  참 목자를 만나 푸른 초장에 나가서 싱싱한 꼴을 먹고 영혼을 소생시켜야 하는데(시 23:2)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건강한 양은 들은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연구하고(행 17:11),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처럼(고전 11:29),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헤아려 좋은 것’만을 받아들인다(살전 5:21).

자살은 여러 가지 많은 죄(롬 1:29-32)들 중에 하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죄가 다른 죄들과는 다르다.  다른 죄는 살면서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 주신 대로 회개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딤후 2:25, 슥 12:10).  하지만 자살은 에서처럼 회개할 기회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죄다(히 12:7).  C. John Collins 박사는 말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처음 믿음을 버리고(딤전 5:12),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마 26:24).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죄들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11절에서 강조한다.  이런 유형의 죄악을 저지른 자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하물며 자살자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아야 할 소중한 영혼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선생들은 ‘자살은 지옥’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살만큼은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일 온 전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살 시도자, 혹은 자살 위험에 노출된 자들을 위해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 혹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엡 6:12).  이들은 단순히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강력한 존재들이다.  이 전투의 실재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이다(엡 6:13).  다시 말해 자살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고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벧전 5:9).  이것이 교회 안에 성령의 사역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 교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성경은 말한다.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끈 자는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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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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