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졸업할 때쯤 어느 날 저녁 9시경에 다급한 목소리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이 학교 기숙사로 걸려왔는데 빨리 교회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기도를 많이 하는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기에 다른 두 명의 학생과 함께 교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자 집사님이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었는데 얼마 전에 교회에서 보았던 집사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고 사무실에는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나이 드신 여자 전도사님과 귀신들린 집사님의 남편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많은 시간을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고 너무 놀라 가슴이 뛰었고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낼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무릎을 끊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담임목사님께서 “김전도사! 눈을 감지 말고 기도해! 지금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삐쭉’ 솟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득이나 겁이 나는데 ‘귀신들’이란 말에 더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일곱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하고 귀신과의 영적싸움을 저녁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치렀고 결국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떠나가고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당시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회 안에서 벌어진 축귀사역은 경험이 없는 나에게 있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을 흉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는데 있어 방언기도가 강력한 도구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은사를 사모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주시면 받고 안 주셔도 할 수 없고’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교회에서 방언기도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방언에 대해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고 졸업식 하는 날 합심기도를 할 때 혀가 자연스럽게 말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방언)이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방언을 받자마자 마음속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고 이때로부터 시작한 방언기도는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의심이 들기도 해서 방언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는데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고 잘 극복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눅 1:35)과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벧전 2:24),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행 2:24), 승천해서(행 1:9), 하나님의 보좌 우편(행 7:55)에 계신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0:9-10).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지 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이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나 아예 처음부터 방언이 없다는 은사부정론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헛소리 같이 들릴 것이고 마귀에 주술에 걸린 것이 확실하고 백 퍼센트 가짜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 어떤 목사가 방언을 하는 사람은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로 만든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사실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에 대해 귀신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잘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 단어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시적(diachronic)해석/역사 비평적 방법론(historical critical method)까지 동원하고, 심지어 방언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순환논법(循環論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은사를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사족(蛇足)을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현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헬라 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지금 원어를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헬라 교부들이 보기에는 초보수준에 불과할 것이고, 그래도 신학자/목사들 중에 “내가 얼마나 헬라어를 많이 아는데”라고 교만을 떠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고전 8:1),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과신하면서 다른 형제의 신학/신앙을 단죄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지 못한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7:1-5).

 

그리고 간혹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 중에 방언의 은사에 대해 풍자적으로 묘사해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 방언을 폄하하는데 이런 말은 은사를 허락해주신 성령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일일뿐 아니라(마 12:31-32), 그분을 근심시키는 행위(엡 4:30)로 듣는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29).  사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인데(딤전 4:12), 만약 겉과 속에 다른 바리새인같이 행동을 한다면(마 23:27), 하나님 앞에서 외식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약 1:22).  물론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칭 신학자/목사가 있기는 하지만(딤전 4:2), 이런 사람은 사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고(행 9장), 무엇보다도 방언을 하지 않거나 혹은 해본 적이 없다면 방언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혹시 누군가 물어보면 그냥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 줄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잠 13:3, 마 12:36-37).  아무튼 방언은 논쟁이 심한 은사이긴 하지만 이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소중한 은사이고, 만약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놀라운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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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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