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유익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곳에서 찾거나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사실 종교 개혁자들이 남긴 유산들 중에 위대한 것이 있다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사적 해석의 원리를 들 수 있고, Martin Luther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문맹자가 아닌 이상 스스로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적 해석의 문제로 자신의 이단성에 대해 1521년 4월17일 재판이 열렸던 독일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 로마 제국의 의회에서 자신의 글들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성서와 이성에 근거해 오류가 없는 한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에 Luther는 개인에게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비록 독일인들에게는 그가 영웅이었으나 보름스 의회를 통해 이단으로 비쳐진 그를 오늘날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화된 현대 교회에 환멸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가 주장한 사적인 해석 원리가 극단적 주관주의를 허용하는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성경에 넣어 해석하려는 악한 성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죄성 때문에 성경 속에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과도하게 부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D. A. Carson은 『Exegetical Fallacies』에서 “해석자 자기대로는 본문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자주 단순히 자기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고 있다. 만약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많은 의문들을 허용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많은 성경교사들과 목사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내던져 버리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배운 정통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읽거나 해석할 때 편견 없이 분문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해석할 때 기발함보다는 본문에 충실하려는 열망과 함께 공평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류에 빠지는 전문가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분야에 연결시키고 싶어 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실제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그 결과 그들은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학자와 목사들 중에 성경이 다른 부분을 배제한 채 어느 한 부분만을 과장하거나 무절제한 사변과 주관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 논쟁이 심한 ‘방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실 성경의 권위에 대해 똑같이 고차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참된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은 Athanasius, Augustine, Anselm, Luther, Calvin, Jonathan Edwards, Charles Spurgeon 등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방언을 인정하는 사람 주로 오순절 계통의 신자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증거라고 말하면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30절‘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는 구절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물론 성령세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성령세례와 상관없이 방언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 C. Sproul는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그 증거로 방언을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고전 14:22),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특징적인 심판의 표시로(사 28:11-13),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고 옹알거리는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Palmer Robertson은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은 징조이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사실상 방언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방언은 계시의 한 양식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는 통역된 방언이 예언과 똑같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교회는 교회의 보편적인 특징을 확립하는데 더 이상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방언을 통해 공급될지 모르는 새로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언된 말씀의 완전한 성취를 보존하기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적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한마디로 방언은 오늘날 더 이상 계속되는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즐겨 사용하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을 사용했던 안 했던 간에 상관없이 어떤 주장을 사용하더라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다. 당신에게 방언이 없다는 가르침이 무슨 매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 누군가 방언이 없다고 주장해도 방언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방언하지 않는 사람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방언에 대한 해석을 할 때 Carson이 말한 것처럼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exegesis’(석의)와 ‘eisegesis’(자기해석)을 구분하지 못해 성경을 해석할 때 오류와 왜곡을 낳게 되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본문에 없는 의미를 본문 안으로 집어넣어 해석하려는 주관주의의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놓고『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어떤 이가 성경의 일부분을 제거한다면 몹시 통탄할 만한 범죄이다.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방언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원할 때마다 방언을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방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는 언어이기 때문에(행 2:4),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Wayne Grudem은 방언 말하는 것(고전 14:15, 18, 28)은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  따라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살전 5:21), 만일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자신의 덕을 세우는(고전 14:4), 이 귀중한 은사를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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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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