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 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결혼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사실 많은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연분이 완벽하게 맞아서 사는 부부는 극히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낳고 살다보면 미운정과 고운정이 들어 무난한 한 쌍의 아름답고 성숙한 부부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상당수 결혼생활이 쓰라린 경험과 악몽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결혼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가 옥중에서 자기 조카의 결혼 축하를 위해 쓴 편지에서 결혼의 존엄성과 그 의미를 간결하게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지고한 존엄성과 힘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으로써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인류를 영속시킬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네사랑은 네 자신의 소유물이지만 결혼이란 개인적인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란다.”  Bonhoeffer의 말대로 결혼이 특권이기 이전에 의무라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만약 결혼의 존엄성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번씩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담이 상대할 사람 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하나님이 불충분하고 부족한 상황으로 간주하신 것으로 여기서 ‘좋지 못하니’ 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이 그와 같은 상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일반 규칙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이 동반자의 관계는 결혼의 본질로서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돕는 배필 혹은 배우자인 그와 ‘한 몸’을 이루어 이를 통해 사랑을 완성하고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창 1:28).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가지고 있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반자인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좋지 못하니’라고 평한 남자의 독신 상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들이었고(창 2:19), 그러나 아담은 그것들에게서 외로움을 제거해 줄 수 있는 적합한 동반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동반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  사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을 원료로 사용하셨지만(창 2:7), 하와를 창조하실 때는 흙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의 신체 여러 부위 가운데 심장에 가까이 위치한 갈빗대를 취했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소중함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서로 간의 인격에 있어 동등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성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 즉 성(性)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 됨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만들어졌음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자의 성(性)에서 여자의 성(性)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 안에는 본능적으로 서로 하나 되고 싶은 성적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를 볼 때 ‘이는 내 빼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고백을 한 것이고 그 결과 생겨난 것이 하나님 제정하신 결혼제도입니다(창 2:24).

 

이렇게 결혼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평가에서 나온 것이지만(창 2:18), 하나님은 몇몇 사람에게 친히 세운 규칙에서 예외를 두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독신의 은사를 주셔서 배우자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신 것이고(마 19:11-12), 사도 바울도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고전 7:1)고 말한 적이 있듯이 비록 결혼이 하나님이 세우신 좋은 제도이긴 하지만 혼자 살 수 있도록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셨지만 이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독신을 강조하셨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까’라고 물을 때(마 19:10), 예수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9:11), 이 대답에서 창세기 2장18절과 24절에서 주신 규칙에 예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관해서는 특별한 교훈을 하거나 자세히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2장에서 선포한 규칙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그냥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라는 말씀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다른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는 바울의 말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들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 것을 명령하셨는데(렘 16:2), 이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사도 바울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고전 7:7), 이런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사는 것이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딤전 5:14).  물론 이들이 독신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거나 특별한 사명을 받았지만 만약 당시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렘 15장), 임박한 환난(고전 7:26, 29)이 없었다면 이들에게 독신의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오히려 결혼을 하도록 촉구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18절의 일반 규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예외는 특별한 상황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정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고(고전 7:9), 반면에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데(고전 7:7), 만약 전자에 속한 사람이 일부러 결혼을 피하거나 후자에 속한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최선으로 행하시고(롬 11:29), 각 사람에게 무용한 은사를 한 번도 주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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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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