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결혼에 대한 꿈과 기대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얻고자 하는 상대방의 욕구가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은 결혼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시작한 로맨틱한 분위기가 평생을 유지한다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 때문에 결혼 후의 너무나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통해 좌절하거나 실패를 경험하는 부부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도 결혼해서 함께 살다보면 각종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이때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경에 이르는 가정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결혼을 하면 육신의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고(고전 7:28), 이 결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걷던 남녀가 한길로 함께 걸어가는 삶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배경과 가정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결혼하는 젊은 남녀가 자신들의 뜨거운 사랑이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만일 결혼생활도 연애시절처럼 뜨거움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한 인생의 경험자인 부모들이 앞으로 결혼할 자녀/예비 배우자에게 조언을 해주어도 실상 그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고 말하는데(창 2:18), 이 단어를 놓고 다양한 성경번역본에서는 ‘돕는 자’, ‘적절하게 돕는 자’, ‘적절한 동반자’, ‘조력자’, 심지어 Anchor Bible에서 “내가 그에게 맞는 조수를 지으리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쓰인 히브리어 ‘에제르’는 구약에서 20번 이상 나오는 명사로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지칭하는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신명기 33장26절에서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라고 개역성경은 번역을 했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그가 너의 힘이 되시려고’이고, 신명기 33장29절에서도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라고 했지만 ‘그는 너의 힘의 방패시요’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데 한 마디로 ‘돕는 배필’이란 힘/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와 동등하게 그리고 완전한 남자의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동등권을 강조하는 이 같은 논리전개 방식은 창세기 2장23절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한말 ‘내 뼈 중의 뼈요’라는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관용적 의미는 “우리 중의 하나” 혹은 “우리와 동등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조수(assistant)나 시중을 드는 배필(mate)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남자를 위해 힘이나 혹은 능력으로 지음 받아 그 모든 면에 있어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각종 동물들에게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자기와 부합한 존재, 즉 자기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창 2:19-20), 자기와 동등한 존재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필요를 공허감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 주셨는데(창 2:21-23), 그것이 바로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나 노예로 만드시지 않고 남자와 동등한 힘으로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Matthew Henry의 말을 인용하면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그의 옆구리로부터 보호받도록 그의 팔 아래서 그리고 사랑받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만들어졌다.”  이 결과로 생겨난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고(창 2:24), 이 결혼이라고 하는 성적 만남을 통해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울 뿐 아니라 넘칠 만큼 채워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결혼을 동반자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고(말 2:14), 이 동반자의 관계란 생각과 목표가 같으며 또한 육체의 관계에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친밀하게 연합한 자를 가리킵니다(엡 5:31).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위해 한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시고 이들이 언약의 보호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외롭지 않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만남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삶이 시작하기 위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데(창 2:24), 사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관계가 이루어진 것이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남자(아담)와 여자(아담)인 것을 생각해 볼 때(창 1:27), 부모와 자식관계는 일시적인 것으로 분리되어야 하고 부부관계는 영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출생(창 3:16)이나 양자(출 2:10)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육(엡 6:4)하거나 공경(엡 6:2-3)해야 하는 의무는 있지만 결혼의 관계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적인 약속은 없고, 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서로의 성적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구적인 연합이라는 것입니다(마 19:6).  이처럼 결혼이 언약적인 동반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발전시켜야 하고, 만약 이 관계에서 무슨 좋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간음, 폭행, 술, 도박, 등등)들이 생겨서 결혼생활이 비참한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두거나 혹은 아내가 남편의 자리에 자기 부모/형제를 둘 때 언제나 가정불화가 생기기도 하는데, 물론 혈육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보다 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 쌍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평생을 깨알 쏟아지는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사실 이것은 극히 드문 것이고 결혼생활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부부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 것으로 볼 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부부의 사랑이 언제나 로맨틱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동양문화권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문제인데,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아내)을 볼 때 남자의 소유물이거나 성노리개, 혹은 집에서 일하는 기계(?)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생활에서 뜨겁게 사랑하던 시기가 지나면 실망과 좌절이 다가오기 마련인데, 이때에 부부가 서로를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이 위기를 잘 극복하게 되겠지만, 만약 자기의 주장이나 쓸데없는 고집을 계속 내세운다면 이런 부부는 거의 이혼이나 별거의 상태로 들어가고 남은 인생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짝을 찾아야 하겠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면 남은 인생을 순탄(?)하게 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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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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