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되어 하나님 품에…”라는 장례문구를 자살한 어느 목회자의 장례식에서 본 적이 있는데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엡 2:8),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고는 있지만(고후 5:2), 우리는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시 51:5),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렘 17:9),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을 믿더라도 어떤 자극만 받으면 분노와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에(전 9:3), 그러한 인간에게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회의론’(Scepticism)을 반박하기 위해 진리개념의 ‘조직적 설명’(組織的說明)을 시도한 최초의 신학자는 Augustine이었는데 그는 ‘진리’라는 단어를 네 가지 의미로 구별하면서 그 중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나타내신 까닭에 유일한 ‘진리’(眞理)”라고 설파했습니다.  비록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에 이런 주장은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하겠지만 이 대담한 주장에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중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시고(골 2:3), 그분의 삶에서는 죄와 오류나 거짓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며(히 4:15), 그분의 가르침은 언제나 올바르셨을 뿐 아니라(마 7:29),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의 실체라는 것입니다(빌 2:6).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배타성은(행 4:12), 바로 그분만이 가지고 계시는 신격의 독특함이기 때문에(요 10:30), ‘진리’라는 단어를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신학자/목회자들 중에 개혁주의자 Calvin을 높이는 사람들은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한다는 명목아래 그 일환으로 Calvin 탄생 기념사업회 같은 것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높이는데 이것도 좋지 못한 현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제네바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Calvin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계 21:8, 22:15), 성경은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했지(고전 11:24), 한 시대에 당나귀처럼 사용(민 22:28)된 죄 많은 인간(롬 3:9)을 칭송하라는 구절이 없기에 사람을 높이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장래를 예고하고 그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행한 아름답고 받을 만한 사랑과 희생적인 행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지(마 26:6-13), Calvin처럼 종교개혁을 빌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창 1:27), 잔인하게 죽인 사람을 기념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가령 자신이 대단한 목회자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과 그러한 부류들을 높이면서 그의 신학배경이나 학력/경력을 높이 평가하는 교회 직분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가증스러운 일이고(요 5:44), 우리는 결코 어느 누구라도 사람을 높이거나(눅 16:15),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3:21).

 

그리고 목사/신학교 교수가 되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 성경의 진정한 저자를 사랑하기보다는 성경 자체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 ‘성경연구’ 혹은 ‘성경지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신학자/목사)들은 성경을 알았고 성경을 읽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음성도 듣지 못했는데(요 5:37-40), 매일 성경을 연구하면서 여러 시간을 성경과 같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결코 어느 때에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매일 성경을 읽더라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물론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져야 하겠지만 성경 자체를 우상시하거나 교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격과 예수님의 역사하심보다 더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자체를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몇 가지 좋지 못한 열매들이 있는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성경이나 신학, 혹은 교리나 교회전통, 또는 목사의 학력과 경력, 심지어 설교의 실력이나 영성과 능력, 교회 프로그램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이야기를 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부수적인 것들에 비해 예수님을 너무나 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도덕적 행동이나 의무를 신자의 삶의 본질로 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결국 바리새인을 특징 지우는 것과 같은 자기 의에 빠지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13-28).  이 말씀의 의미는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율법과 일치하게 살려고 할 때 항상 자기 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만일 바리새인에게 있어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자기 의로 이끌 것이고 그런 자기 의로 인하여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눅 18:9).  그리고 이미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성령의 은사들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는 함정에 빠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고전 12-14장), 또한 감정주의에 미혹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추구하기보다는 더 특별한 수준의 감정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 귀신의 가르침을 좇거나 신비주의 신앙에 빠지기도 합니다(딤전 4:1).

 

그리고 교회의 예배형식으로 예배시작 무렵에 준비 단계에서 장시간 걸친 음악 시간을 갖는 것인데 물론 찬양 중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시 22:3), 여기에서조차 일부의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실제로 그 시간에 예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예배’를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의 삶 자체, 교제, 치유, 전도, 구제, 봉사, 기도, 훈련, 선교 등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모든 일을 하여도 바리새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에(마 6:1-18),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어떤 선한 일들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거나 이런 모든 것들에 의해 미혹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들과 주님을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교리, 추상적인 원칙, 신학, 사역, 교회, 활동, 교단, 생활방식이 아니며, 그분은 한 위(位), 한 진정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 이러한 것들 중의 하나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우리를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그것들이 우리 삶속의 우상이 되거나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 6:1).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고전 13:1-3), 말에나 일에나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고(골 3:17), 그분만을 자랑하며 높이지 않는다면(벧전 4:11), 그 신앙은 가증스럽고 별 볼일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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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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