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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든 존스의 목회설교는 193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이 세 그룹의 사람들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는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가 처음에 강조했던 것을 잘못 이해해서 참된 기독교 체험과는 격리된 성경적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고, 두 번째 부류는 기쁨을 결여하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몰려든 칼빈주의적 경건주의자들이었고, 세 번째 부류는 그의 초기에 가르쳤던 그 강조점은 회피하고 이제는 더욱 지나쳐 은사 운동에만 관심을 가지는 감정주의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 건강을 성경적 이해의 빛에 비추어 로이드 존스는 첫 번째 그룹을 죽은 정통으로 보았고, 두 번째 그룹을 영적인 벌레들에게 먹혀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고, 세 번째 그룹을 암적인 광신주의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데, 먼저 성경적 정통주의자들의 특징은 무슨 말만 하면 항상 성경을 들이대며 성경만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18세기의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숭배했다면 오늘날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을 숭배하며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을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인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들도 무슨 이야기만 하면 칼빈을 내세워 말을 하는데 마치 칼빈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칼빈이 한 말에 맞춥니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칼빈은 그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도구일 뿐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류는 감정적인 사람들로 절제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흠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 부류가 오늘날 현대교회에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 성령의 은사에 냉담한 사람들은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지는 초교파 신학교인 달라스 신학교라 할 수 있고 이 신학교 총장이며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월부어드는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기적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의 동료이며 엉거성경사전을 펴낸 메릴 엉거도 “기적적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사실을 교회 역사에 의해 잘 입증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신앙이 복음의 확증을 위해 외부의 표적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메릴 엉거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인 벤자민 브레킨리지 위필드가 1918년에 저술한『Miracles Yesterday and Today』를 참조했는데 이 책은 오늘날 미국 안에서 카리스마적 은사의 타당성을 반대하는 가장 유력한 책으로 위필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 은사들은 분명히 사도들에 대한 확증이었다. 이 은사의 기능은 사도시대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 사도들이 죽을 때 그 은사들도 필연적으로 그들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현대의 위필드 계승자들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먼저 커버넌트 신학교와 낙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로버트 레이몬드는『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성령의 은사 계속설은 계시 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을 개괄적으로 주석하면서 “계시가 사도시대 말기에 중지되었다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 / i, vi), 이런 의미의 선지자들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예언은사를 추구하려는 바울의 권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언과 방언, 지식 등 계시은사들은 계시과정의 종결과 함께 종결되었다고 주장한 다음 기적의 관계를 거론하면서 능력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랬듯이(요 5:36, 10:38, 행 2:22), “사도적 메시지의 확증”  즉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었던 “특수 표징”들은 사도들이 지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중지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리처드 개핀은『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근거하여 “교회는 사도들과 신약적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 예언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비계속적인 기능으로 사도직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사라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베드로전서 4장10-11절 말씀을 근거하여 성령의 은사들은 말씀은사와 행위은사로 나누고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은사는 교회창설적 성경을 띤 것으로 교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개핀은 이런 원리하에서 신유와 기타 관련된 은사들에 관해서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런 은사들은 “사도적 표징들”이므로 사도 이후 교회의 생활에서는 사라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런던개혁침례신학교의 교장인 피터 마스터스도『The Healing Epidemic』에서 “카리스마적인 혼란의 시대인 요즘에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했고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 이렇게 예언, 방언, 신유, 기적 등의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런 은사들은 교회 창설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성경계시의 종료 면에서 중지된 은사들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엡 2:20, 3:5, 고전 13:8-12, 14:20-25, 29-30절 등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옥스퍼드대학 위클리프홀 신학대학장인 마이클 그린은 “은사중지설은 우리 자신들을 성령의 강력한 삶에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단순한 도피주의이며 성령은 바람과 불의 영으로 남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를 어떠한 교회적 박스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며 신유, 예언, 축사 및 방언이 마지막 사도들과 함께 죽어버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웨인 그루뎀은 고린도전서 13장8-12절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영적인 은사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말했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 신약학 교수인 고든 피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 중에 존 스토트는『One People』에서 은사목록 중에 사도직과 예언과 기적은 제외시켰고, 존 맥아더는『The Church, the Body of Christ』에서 기적과 방언과 신유와 방언통역 같은 은사를 일시적 은사로, 데이비드 호킹은『Spirit Gift』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말하며, 메릴 엉거는『The Baptism and Gifts of the Holy Sprit』에서 “표적은사” 신유, 이적을 행하는 것, 방언, 방언통역, 예언과 사도 같은 은사는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존 월부어드는『The Holy Sprit』에서 모든 은사의 기능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동등하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찰스 험멜, 리크 연, 케네드 킹혼, 레슬리 프랜, 도널드 지 등이며, 특히 마이클 그리피스는『Cinderella Betrothal Gifts』에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입장은 자유주의에 가까운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입장을 중간에 바꾼 사람들도 있는데 보수주의 침례신학교 교장인 장 얼 레드마커는 오순절 계통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오순절 교회를 떠나자 교회 안에서의 방언사용을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하며 비판했습니다.  마치 제자훈련 세미나로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진 빌 헐처럼 성령의 은사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탈봇 신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철저하게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굳게 믿은 것처럼 말입니다.  빌 헐은『성령에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중단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 설교자의 영향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나중에 돌아와 오늘날도 기적의 은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장로교 학자 로드먼 월리엄즈도 전에는 기적적인 은사가 사라졌다는 위필드의 견해를 따랐으나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확신하며 “오랜 세월 동안 신약성경을 잘못 읽어 온데서 돌이켜야 한다”라고『The Era of the Sprit』에서 강력히 말합니다.

 

◈ 종교개혁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성령의 은사에 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루터는 기적적 은사의 활용을 사도시대에 국한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은사가 당시의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칼빈 역시 성령의 은사가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 사상에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은사는 사도시대에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와 20세기 사이에 성령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다룬 저슬로 17세기 영국의 존 오웬의『The Holy Sprit His Gift and Power』저서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저서는 후기 개혁자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존 오웬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처음으로 일반은사와 특별은사를 구별한 사람으로 이런 구별은 후기 개혁신학에서 보편적으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특별은사란 사도시대에 국한 것으로 방언, 기적, 신유, 사도, 예언, 전도자의 여섯 은사를 말하는데 이와 비슷한 사상을 19세기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 20세기에는 벤자민 위필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존 스토트는『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면에 로이드 존스는『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견해 중에 어느 견해가 옳다고 보십니까?  만약 존 스토트의 견해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로이드 존스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고, 로이드 존스의 견해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존 스토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셨던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더 예로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지역에 두 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그레이스커뮤니티 교회”는 존 맥아도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카리스마 운동 가운데 잘못된 것”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에서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고『무질서한 은사주의』란 책을 써서 오늘날 교회 내에 어지럽게 퍼지고 있는 잘못된 은사운동에 대해 비판하며 이런 부류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바로 옆 “처치 온 더 웨이”인 잭 헤이포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방언으로 설교하고 통역을 하며, 완전히 오순절 초대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고 많은 책들을 저술했지만 특히『영적 언어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 방언은사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교회 모두 그 지역에서 4천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로 양쪽교회 신자들 역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지만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견해를 달리할 뿐이지 그렇다고 두 교회 중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로이드 존스의『성령세례』서문에 보면 “초대교회가 기독론 논쟁 시대라면 교부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 시대라고 볼 수 있고 종교 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 시대이고 현대는 성령론 논쟁 시대라고 할 만큼 성령론에 관한 논의가 국내외를 물론하고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 논쟁은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으로서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고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오순절파의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계속성과 오순절은 하나의 교회부흥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성령론에 대해 전쟁 아닌 전쟁이 그것도 믿는 자들 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여야 할 인격을 갖고 하나님이시지 논쟁이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은사를 거론하면서 은사주의자들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성경대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존 입장을 고집하며 성령에 대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소천한 존 스토트의 책을 읽어보면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연과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나 자신은 영적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영적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은사운동의 문제점을 강조하면서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없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체험한 고린도교회를 두고 문제투성이 교회라고 운운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거와 같습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성령의 은사로 시끄러웠던 고린도교회가 이단이었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였습니까?(고전 6:20).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시끄러워서 ‘너희가 아직도 육신의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말하면서 다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말고 “말씀만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고전 14:39), 말합니다.  은사 문제로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모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공동묘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문제들도 많은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사데 교회는 어떠한 교회입니까?  인간들 눈에는 살아있는 교회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보인 것은(계 3:1),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살전 5:19-20).  사실 우리는 고린도교회로부터 배워야 하고 오늘날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피터 루이스의 글을 인용해 “만일 개혁주의와 은사운동의 최선의 요소들의 결함이 잠재적 폭탄이라면 부흥은 그것에 불을 불이는 성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카리스마주의에 속한 사람들과 중단론자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존중한다면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확장이 될 것이지만 웨인 그루뎀이 말한 것처럼 이 두 진영이 서로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대로 만약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결국 같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갈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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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