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람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사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3). 그때 니고데모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직업 자체도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분을 인식하면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백성이란 종교적인 생활을 열심히 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그 사람의 삶에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도록 일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알기전의 그의 성품과 주님을 만나고 난후의 성품에 근본적인 변화가 옵니다(갈 5:22-24).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것은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나는 죄인이다”라는 이 말보다 고백하기 어려운 말은 없습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할 때 천국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마 5:3).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죄성이 지배하고 있으며, 무서운 파멸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죄 때문에 슬피 울며 통곡하는 것입니다(마 5:4).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눅 13:24),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지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세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7:13-14).
◈ 우리는 보통 “온유하다”라는 말할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마 5:5). 성격이 부드러워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 어떤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독한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공격적이지 않고 악착같지 않은 것을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온유하다”라고 말하면 우선 순하고 부드러운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온유’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후에 생긴 변화된 후천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승부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것을 싫어하는 천성적인 성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겨루기 보다는 차라리 포기해 버리는 편을 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충동을 받으면 남과 경쟁하는 것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야생마처럼 난폭해지기 쉬운 성품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믿는 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고 나서 직가라는 거리에 사는 유다의 집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를 받을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 9장). 훗날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자신이 박해자였던 것은 알지 못했을 때 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딤전 1:13-15). 이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성령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이 오시면 어떠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갑니까? 바울처럼 살기가 등등한 성질이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라는 것입니다(겔 36:26).
◈ 이런 온유한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해질 수도 있습니다(삼상 2:6-7).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것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범죄케 하는 것이 욕심이고(약 1:15),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은 가능한 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기 위하여 열심히 달음질을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제 정신을 가지고 돈을 모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돈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돈을 벌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예를 들어 삭개오가 어떤 사람입니까? 돈에 환장해서 남의 것을 속여 착취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사람입니다(눅 19:8). 그러나 천국백성은 이 세상 것을 다 차지하려고 열안이 되어 살지는 않기 때문에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우리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엡 2:2-3).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짓들과 그분과 원수되는 일들(롬 8:7), 성경말씀처럼 그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만 짓고 살았습니다(롬 1:29-32). 우리들 중에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딛 3:3).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 욕심을 따라 살았던 우리들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섬겼던 아비가 진리에 서있지 않은 욕심쟁이 마귀이기 때문에(요 8:44), 그를 닮아 마귀의 기질로 똘똘 뭉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변화된 온유한 사람은 절제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욕심을 부리거나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지 않습니다(마 19:16-22). 이렇듯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다르게 변하고 불신자와 다른 분명한 경계선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만약 믿는 자 마음속에 욕심이 자꾸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진리의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갈 5:24). 여기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육체의 정욕이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육체의 욕심은 단지 충동만 일으킬 뿐이지 얼마든지 우리가 거부하고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권세를 예수님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요 14:12). 그렇다면 정과 욕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근심시키지 않고(엡 4:30), 그분이 원하시는 일들만을 행하면 절대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갈 5:16).
◈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보복의 원리가 나오는데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주는 것입니다(출 21:23-25).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많이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누군가 나에게 신체나 재산상의 손해를 주었을 때 절대로 사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 대로 나도 그 사람에게 똑같이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칼을 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부드러운 것 같지만 속에는 무서운 칼을 갖고 있습니다(막 7:20-23).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런 죄악의 칼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자신을 우습게보거나 건드리지 말라는 것으로 만약 건드리면 악을 악으로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구약과 다르게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마 5:38-42). 그렇다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우리들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거의 몇 번 아니 죽었어도 수백 번 심판받아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의 일부분 밖에 알지 못하고 우리가 모르는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쁜 짓을 했지만 그를 좋아하는 그의 가족들에게는 그도 여전히 소중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선악 간에 판단하실 하나님께 맡깁니다(롬 12:19). 그러니까 온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주님은 한 번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신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마 11:29).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3).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꺾을 힘이 얼마든지 있지만 꺾지 않으셨고 훅 불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끄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온유하셨다면 그분을 믿는 주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도 그분처럼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벧전 2:21).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해를 당할 때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며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눅 23:34).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입니다.
◈ 본문에 나오는 이 세 번째 복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부동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대개 약삭빠르고 욕심이 많은 부동산 투기꾼들일 것입니다. 땅을 투기하는 곳에 한 번 가보십시오. 어리숙한 사람이나 정신이 맹한 사람은 거기에 발도 붙여 놓지 못할 것입니다. 전부 눈들이 번쩍이고 단 하나의 정보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알려고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 세상에서는 좋은 땅을 다 차지할 것입니다. 하기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같이 온 정신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차지하는 땅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은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불타 없어질 땅이라는 것입니다(벧후 3:7).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줄 알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든 사람이 집에 많은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는데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가 투자해서 꾸민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세든 집도 깨끗하게 사용하면 좋지만 언제가 주인이 비워달라고 하면 나가야 하기에 그런 집에 많은 투자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순간이 되면 모두 다 집을 비어주고 떠나야 합니다(고후 5:1).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벧전 2:11).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땅은 인간이 아무리 갖고 싶어도 영원히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들 임시로 이 세상에서 땅을 소유하는 것뿐이지 사실 땅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시 102:25, 요 1:3).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받을 기업은 어떠한 땅입니까? 그것은 영원히 썩거나 불타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계 21:1). 이 새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도 영혼을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것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고후 6:10), 실제로는 천국의 새 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시 37:8-11).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세상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철거될 판자촌 같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슬기로운 사람은 앞으로 들어갈 천국의 좋은 것을 갖기 위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롬 8:24). 그래서 우리는 본 건물 아파트 짓기 전에 모델 하우스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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