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언자”라는 단어를 대할 때 사교의 지도자들이나 협잡꾼을 연상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성경에 새 책들을 추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예언자란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한 사도바울 등을 닮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오늘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예언과 예언자들 및 초자연적인 계시는 신약시대의 마지막 사도가 사라짐과 더불어 종식되었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신빙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은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지시를 자신의 성경지식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바람직한 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러한 종교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떠나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요 5:37).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요 10:27).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경건이 없는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고(마 23:1-7), 이것은 이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교만을 강화해 주는 지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으며(마 23:13-15), 이런 지식은 생명의 없는 말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들에게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추종자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적 행위에 만족한다면 교만은 증가하고 편견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Paul Thigpen은『Did the Power of the Sprit Ever Leaver the Church』에서 “신약 시대가 교회가 출발한 이후로 하나님은 각 시대의 신자들에게 항상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 아울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4장11절에 나오는 말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장래 일을 예언하며 마음의 비밀을 말하고 정확한 느낌을 받고 꿈을 꾸며 정확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행 2:17).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의 사역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제를 삼으며 걸고 넘어지는 것은 예언하는 중에 실수를 범한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붙이고 한번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지 하나의 예언이 맞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란 참 예언자의 가르침과 예언을 반대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벗어나게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지(신 13:1-5),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장15절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거짓 선지자에게는 나쁜 열매가 나오고 참 선지자에게는 좋은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짓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맞춘다고 해서 이 거짓 선지자를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언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도 강력하게 미래를 예언하고 증표를 보이기도 하며 이적을 행하기 때문입니다(사 44:25, 렘 23:13, 마 7:21-23, 24:24). 그러니까 예언이 틀린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봐야 하는데 발람처럼 돈을 사랑한다면 거짓 선지자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벧후 2:15-16).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인용하여 실수로 잘못된 예언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이단처럼 성경 앞뒤 문맥을 다 빼버리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은’은 곧 예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모세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한 사람이었고(민 12:6-8),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묵상하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 모두를 대표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신 34:10-12).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신명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해야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감히 모세를 흉내 내어 사람들을 가짜 신들에게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렘 23:9-32, 행 13:6-8).
더 나아가서 예언자가 저지른 실수를 추궁하여 사형의 벌을 내렸다는 뒷받침이 될 만한 성경구절을 구약에서 찾을 수 없으며 신명기 18장15-22절을 실수한 예언자를 추궁하기 위해 인용한 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Peter C. Craigie는『The Book of Deuteronomy』에서 “이러한 기준들을 예언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규칙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단의 말을 정정하셨을 뿐 그로 인해 나단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라 부르는 자도 없었고 돌을 던지려는 자도 없었습니다(삼하 7:1-17).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사람들의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켜 그 결과를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히스기야는 죽지 않고 살았을 때와(왕하 20:17),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욘 3장).
또한 사도행전 21장 10-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아가보의 예언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했다는 내용도 없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에 넘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이 두 번이나 바울을 결박했고(행 21:33, 22:29),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게 바울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행 23:12-14),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천부장을 통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구출되어야만 했습니다(행 21:27-36, 22:22-24, 23:10, 16-36). 물론 이런 결과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지만(행 28:17), 이렇게 틀린 예언을 한 아가보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매우 훌륭한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적 사역전체의 표본으로 삼고 오늘날 예언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기적, 그리고 예언의 정확성을 기준으로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사역이 맺는 열매를 보고 구별해 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43-44). 그리고 만약 예언자들의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면 왜 사도바울이 ‘예언 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라는(고전 14:29), 명령을 교회에 내렸겠습니까? 모든 교사들과 목사들, 그리고 선교사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고 베드로 역시 위선된 모습과 실수를 안디옥 교인들에게 저질렀고 이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바울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갈 2:11-1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고(마 26:69-75), 또 신자들 앞에서 실수했기 때문에 거짓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벧후 1:1).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언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언자적 사역만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고 관대함 속에서 자라날 수 없는 분야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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