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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교회는 눈물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군가 눈물을 흘리거나 애통해 하면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짧게 하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가능한 할 수 있는 대로 즐겁고 신나게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주일날 말씀을 듣더라도 기분 좋게 웃으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지하게 말씀 듣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가 어느 신문에 “유머설교 세미나”라는 광고가 실린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웃기면 분위기가 좋아지고 실컷 웃어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설교를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웃으면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29절과 15장5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중에 하나는 예수님께서 웃으시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에게는 웃을 일이 많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화를 내셨다는 것과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웃으셨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기록이 없다고 하여 그분이 평생 동안 전혀 웃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성경에 주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생애를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인간의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그분의 모습 속에는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사 53장).

 

반면에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세 번 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번은 친구 나사로 무덤 앞에서(요 11:35), 또 한 번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눅 19:41),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으며(눅 22:43-44), 땀이 피 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할 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히 5:7).  주님은 웃으시는 것보다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가운데(벧전 2:21), 우리도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현재 믿는 자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도취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계 2:17),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며 세상에 푹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눅 17:27-28).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애통이 빠진 웃음은 저주요 불행이라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6:25).

 

◈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인간에게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나 손색이 없었고 흠이나 점을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참히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롬 3:9-18).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가령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윤락여성들이나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범죄자로 전략되어 사회에서 “막가는 인생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든 인간은 파괴된 그분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믿음을 부어 주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지금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파멸에 빠져 있으며 자기 안에 무서운 죄성이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너무나도 망가져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스스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무서운 심판받을 죄인이며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밥 먹듯이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그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롬 7:24),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몸을 팔던 여인처럼 향유를 주님께 붓고 지난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염없이 울게 될 것입니다(눅 7:36-50).  본문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란 성전에 서서 기도하는 세리처럼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눅 18:13).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붙인 95개조의 반박문에서 “우리의 전 생애는 끊임없는 회개와 뉘우침의 연속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아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애통함은 죄를 씻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라나고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눈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 고린도 교회처럼 죄를 묵인하기만 하지 그것 때문에 비통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전 5:2).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고 통회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상한 제사이고, 그분은 자기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시 51:17).

 

◈ 죄를 짓는 사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은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라고 말합니다(사 48:22).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죄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사람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롬 2:4-6).  다윗은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른 후에 그 죄를 감추고 거의 일 년간 회개치 않고 살았습니다(삼하 11장). 그런데 죄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의 마음은 몹시도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왕위를 빼앗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욱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죄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의 속은 자꾸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회개의 자리로 초청해주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죄를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삼하 12장).  다윗은 책망을 받고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무서운 죄를 다 쏟아 놓고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우리 생각 같으면 죄가 들통 나지 않고 가만히 덮어 두고 넘어가는 자가 복이 있을 것 같은데, 다윗은 온갖 창피를 다 당하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기 죄를 다 토하고 난 후, 죄 용서함을 받는 자가 참으로 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죄 용서함을 받기 전까지 늘 쫓기는 심정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자기에게 임할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위로가 무엇입니까?(마 5:4).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고 심판이 겁나지 않습니다(롬 8:1-2).  이것은 마치 스스로 죄를 인정하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법정에서 판사가 무죄를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판사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롬 5:1),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지고 쫓겨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대 앞에서 그들이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회개치 않았던 모든 죄들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롬 2:16).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청빈하다고 존경받던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는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더러운 죄를 많이 지었고 틀림없는 죄인임을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대 앞에 가보니까 그가 지은 죄들이 모두 다 지워져 있고, 단 한 줄의 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은 심판받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하게 애통하며 회개를 했기 때문에 모든 죄와 허물이 가리어져 있는 것입니다(롬 4:6-8).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죄 문제로 고민해 본적도 없이 무의미하게 낄낄대고 웃는 사람들입니다(전 2:1).

 

◈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위로받은 자가 다시 애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고(롬 8:1),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도 없습니다(롬 8:35).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죄에 빠지기도 하고 그 결과 무서운 영적인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고 알고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딤후 1:7).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침체이지 과거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엡 2:12-13).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번 범죄 하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 된 상태에 빠지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성령이 소멸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살전 5:19). 다시 말하면 죄를 지으면 성령 하나님이 근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엡 4:30).  그렇지만 이렇게 죄지은 사람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회개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곧바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요일 1:19).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을 때마다 다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애통과 다른 구원받은 자의 애통입니다.  이 애통을 통하여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 천국과 지옥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옥은 이미 수많은 영혼들을 삼켜 버렸고 아마 지금도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보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마 7:13-14).  천국에 어떻게 갑니까?  주일날 교회만 들락거리거나 등록카드나 결신카드에 서명을 하고 물세례만 받으면 갈 수 있습니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자기 죄에 대해 애통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마 4:17), 세례요한이 처음 증거할 때(마 3:2), 베드로가 오순절날 처음 설교할 때 가장 먼저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행 2:38).  자기 죄 문제를 가지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울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온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었던 사람들입니다(계 7:17, 21:4).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현재 무엇 때문에 울고 계십니까?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