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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믿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요8:44-47).  사실 이렇게 어중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토하여 내치게 될 것입니다(계 3:15-16).  예수님은 신앙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한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한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이 말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좇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사탄을 좇아가는 추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바로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고(엡 4:30), 성령을 소멸케 할 수도 있으며(살전 5:19), 심지어 성령을 거스릴 수도 있습니다(행 7:51).  그러나 이러한 죄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죄들입니다(요일 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도 모르게 연약하여 성령을 거스리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함으로 성령을 근심시킬 수는 있겠지만(사 63:10),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할 때 성령을 근심시킨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마 26:69-75).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고(눅 22:31-32), 그는 회개하고 귀한 종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행 2:14-42).  사도 바울도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라고 고백했습니다(딤전 1:13).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용서해 주시고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셨던 것이었습니다(행 9:15).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면(사 1:18), 그 죄가 무슨 죄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엡 1:7, 요일 1:1:9).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로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마 12:31).

 

◈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훼방(모독)하는 죄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먼저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롬 2:5), 만약 이 견해대로 라면 지금도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다 성령훼방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소스톰은 이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죄로서 그분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하여 마귀의 역사로 매도한 것이라고 합니다(눅 12:10).  또한 루터교파의 학자들은 성령훼방 죄는 중생은 했지만 신앙을 도중에 버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의 동역자 데마나(몬 24절),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가(눅 6:12-16), 주님을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기에(딤후 4:10, 요 18:1-3), 이에 해당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견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다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교리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롬 8:38-39, 요 6:39, 엡 1:13-14, 벧전 1:4-5).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라(요 5:24), 그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요 10:29),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 6:4-6, 10:26-2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1-2).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를 성경본문에서 찾는다면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마 12:22-37).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예수님을 향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마 12:28).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마 12:24),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합니다(마 9:3-4).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루이스 벌콥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것은 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삼상 2:6-7).  그러면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호와를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훼방 죄에 대한 중요한 해답의 열쇠를 바리새인들이 말한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마 12:2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는데 살 수 있을지 블레셋 도시 중 하나인 에그론에 가서 바알세붑 신에게 묻기 위하여 사람을 보냅니다(왕하 1:2).  그때 엘리야가 사신을 만나서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서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느냐고 하면서 네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파리의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파리의 신이 병을 치료한다고 믿었고 블레셋 사람들도 쥐나 파리 같은 신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왕하 1:4-6, 16).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치시면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파리의 귀신에게 부탁해서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참으로 대단하고 무서운 반역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왜냐하면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회개가 될지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만약 회개가 된다면 사함을 받을 수 있을 덴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구속사역 즉,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들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말씀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들입니다(요 3:10).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요 3:2, 막 2:1-12), 실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구원받은 것처럼 행세하거나 자신이 성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행 9장),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갈 1:13-14, 빌 3:5-6).  바로 이런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가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히 6:4-7).

 

그렇다면 또 하나 이러한 죄를 범한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하지만 반면에 “인자를 거역하며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마 12:32).  이 말은 ‘인자’가 ‘성령’보다 지위가 낮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에 그분의 메시야 신분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앞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베드로나 바울이 주님을 거역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인자를 거역하는 말과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것을 실제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의지하여 그분 앞에 겸손하고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함 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행 4:1-22).  그들의 생각에 진리는 자기들의 생각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눈앞에서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도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단이요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합니다(눅 11:14-23).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 죄를 짓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믿고 있고 분명히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데도 시기심이나 교만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단정해 버리고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마 12:34-37).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과 제자 요한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분노에 가까운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막 9:38).  왜냐하면 귀신 쫓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마 10:1).  사실 요한이 품은 이런 배타적인 마음이 오늘날 교회 속에 분파주의로 나타나기 쉬운 마음입니다.  아무튼 요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야!”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시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9).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막 9:40).  이 말씀의 의미는 설사 주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면 그들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아침마다 물 떠놓고 서낭당 귀신에게 정성스럽게 빌어서 병이 낫든지 아니면 무당에게 돈을 투자해서 굿을 해든지 혹은 무속종교를 통해 병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난다고 합시다.  물론 이들도 얼마든지 그들이 믿는 신으로 병 고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을 사용하고 의지해서 병을 고쳤느냐는 것입니다(행 4:10).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귀신의 이름들을 사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귀신의 역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마 1:21).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한 역사를 귀신들이 행하는 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지만 무조건 자신들이 가지고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요 8:15).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은 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신앙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상태가 좋고 은혜가 하다면 누구에게라도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요한처럼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편이 아닌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분명히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인 마술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행 19:13-16),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는 이상 성령의 힘입어 기적을 행하면 그 사람은 주님을 반대하는 자는 아닐 것입니다(눅 11:23).   만약 이러한 사람을 귀신의 역사라고 치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것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 귀신들인데, 믿는 자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을 믿는 자들끼리 서로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집단을 놓고 이단이니 귀신의 역사니 떠들어 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종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롬 14:4).  그러기 때문에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마 12:36-37).  오늘날 인간들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주님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는데 인간들이 진짜니 가짜니 판단하고 입으로 떠들어 되니 말입니다(잠 18:21).  누군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령의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속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입으로 모독하는 죄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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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