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이삭의 모습은 매우 유순하고 양보를 잘하며 부모에게 한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한창 힘이 솟아오를 나이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산에 데리고 올라가 인정사정없이 묶고 칼로 찌르려고 할 때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온순했습니다. 실제로 백세가 훨씬 넘은 아버지를 밀치고 달아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텐데, 그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삭이 산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을 때(창22:7),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창 22:8), 대답을 듣고 이미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도 아버지의 말에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삭은 그랄 땅에 거하며 우물을 팠을 때에도 블레셋의 목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 아낌없이 이 귀중한 우물들을 그들에게 양보합니다(창26:20-22). 사실 이 우물은 본래 아브라함이 팠던 것으로 이삭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섹, 싯나, 그리고 계속해서 르호봇이 파도록 양보를 거듭합니다. 여기 중동 땅은 우리와 사는 곳과는 달리 우물을 판다는 것은 엄청난 고생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일인데 이삭의 양보 잘하는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20절에서는 그의 믿음에 대해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하면서 다른 양보와 순종의 사건보다 자녀들에게 기도한 일을 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본래 이삭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출생할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를 좋아했고 에서를 편애하였습니다(창25:28). 결국 시간이 흘러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지자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에서에게 고기를 사냥해 와서 별미를 만들 것을 주문하고 그를 축복하겠다는 표시를 하였습니다(창27:4).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와 다른 결정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리브가와 야곱은 이 일을 미리 알고 아버지를 속여 에서로 변장하고 들어가 대신 축복 기도를 받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을 사용한 야곱을 칭찬해서는 안 될 것이고, 하나님은 결국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그의 의도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그릇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한편 에서가 돌아와 사냥한 고기를 아버지에게 드릴 때에야 비로소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속은 줄 알았고 동시에 아들들의 출생 당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삭이 심히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창27:33). 이삭이 심히 떨고 있는 까닭은 잊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속에 새롭게 일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을 피해 달아나는 야곱을 불러 그는 이제야 비로소 야곱을 야곱으로 알고 다시 축복하여 줍니다. 이 내용은 야곱을 장자로 알고 축복하여 기도해 준 내용 그대로입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계획과 고집을 포기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궁금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야곱이 부자가 된 비결 (0) | 2012/03/12 |
|---|---|
| 야곱도 믿음의 사람인가? (0) | 2012/02/15 |
| 믿음의 사람 이삭 (0) | 2012/01/24 |
| 롯의 비극 (0) | 2011/12/22 |
| 구름기둥과 불기둥 (0) | 2011/12/08 |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칠 수 있었던 이유 (0) | 2011/11/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