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들이 수북이 쌓인 블로그나 인터넷 크리스천 신문에 들어가서 글을 읽을 때에 너무나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학적으로 잘 해석한 글들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평신도이면서도 오히려 목회자들보다 더 성경적으로 글을 쓰거나 성경을 잘 해석하는 사람들을 볼 때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자기 틀에 맞지 않는다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에 대해 공격하는 글을 쓰는 것을 볼 때 그리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1-2).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만일 여러분들 중에 달라스 신학교의 어느 교수에게서 천년왕국(계 20:4-6절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천 년간의 통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어본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인 어느 교수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을 때 아마도 그는 자신을 “무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도 역시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 양측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발견한 교리가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전혀 갖지 않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보내면 분명히 그 사람은 무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동일한 사람을 달라스 신학교로 보낸다면 그는 전천년주의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과 신앙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러한 법칙에는 예외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신학적 전통과 우리의 스승들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것과 믿는 것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들은 성경 그 자체보다도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요즘 한창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단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이것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이 제외되고 다른 직임만이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들을 제하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엡 4:11). 그러기에 그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서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다른 하나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헬라어로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그 성도들이 사역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며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 줍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됩니까? 바로 뒷 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합니다(엡 4:13). 이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8-12).
다시 말해서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몸이기에 항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4:13, 벧전 2:2). 우리들 중에 다 자라난 사람들이 있습니까? 육신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자라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벧후 3:18). 그러기에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령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 4:15-16).
◈ 성경에 보면 사도에 대해서 네 가지 서열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도라는 단어를 놓고 서열이나 등급이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렇듯 사도에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라고 해서 다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기초를 놓은 열두 사도와 바나바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이나 바나바, 혹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같은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지만 초대교회 기초를 세운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에 서열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견해들이 정립이 되지 않아서 서로 자신들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히 3:1). 여기서 ‘사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소식을 전하는 자, 혹은 보내심을 받은 자, 또는 위임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머리 위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엡 1:22-23, 골 1:18), 예수님은 자신의 초기 사역에서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막 1:38), 소식을 전한 자(사 61:1), 그리고 위임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눅 4:18-19).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눅 8:1).
그리고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실 때 자신을 선지자라고 부르셨고(마 13:57, 눅 4:24, 요 4:44,, 행 7:37), 또한 그 분은 복음 전도자의 직임에 계셨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21, 눅 19:10).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목사이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고(요 10:11, 히 13:20, 벧전 2:25), 또한 교사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주된 내용 중 하나가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마 5:1-2, 9:35, 막 1:21-22).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한량없이 성령을 가지셨기 때문에(요 3:34),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가장 높은 서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골 1:15-18).
두 번째 서열은 어린양의 사도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계 21:14), 이 어린양의 사도는 오직 열두 명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두 번째 서열의 사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사도들의 첫 번째 자격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사역을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이어야만 합니다(행 1:21). 그리고 두 번째 자격은 예수님의 지상사역 하시는 동안 그분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로서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행 1:22). 이러한 자격을 가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신약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사용된 사람들입니다(엡 2:20).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했을 때 사도들은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맛디아를 유다의 대신할 자로 뽑았습니다(행 1:26). 어떤 사람들은 맛디아가 아니라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린양의 사도로서 자격이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사역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주님이 지상에 계실 적에 중생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도 아닙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났습니다(행 9장, 고전 15:8). 그러므로 어린양의 사도들은 맛디아를 뽑으므로 끝났지만 또 다른 사도의 직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를 포함해서 20명 정도는 나오기 때문입니다.
◈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계열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 역시 신약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기에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엡 3:3-5).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오늘날 교회의 기초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갈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뭔가를 더할 수도 없고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계 22:18-19).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든지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서열인 다른 사도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사도의 자격이 나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실 바나바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성경은 그를 사도라고 부릅니다(행 14:14). 여기서 말하는 ‘사도’란 신약의 기초를 놓은 두 번째 서열과 세 번째 서열인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토대적인 사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서열의 사도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라는 단어는 지금보다 초대교회 시대에 더 넓게 사용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말을 많이 쓰지 않기에 사도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불편해 하고 거부감을 가지고 심하게 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도’라는 헬라어는 앞서 말했듯이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의 “아포스돌로스”로부터 번역된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2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사자’로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해 말합니다. 여기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아포스돌로스”입니다. 지금 바울은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십중팔구 우리가 오늘날 사도에 대해 생각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도의 직임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라는 말을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대리자(delegate)로서 또는 대표자(representative)로서, 또는 회중의 대표로 위임 받아(commissioned representative of a congregation)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초대교회에 있었지만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아니었고 신약성경의 기초를 놓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표자 회의나 모임에 한 사람을 대표로 보냈듯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에바브로디도는 단순히 사역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보냄 받은 사도”, “사자”(messenger), 또는 “대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적 직임의 완전한 활동범위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그가 바울처럼 교회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없고 어떤 교회를 향한 특정한 사도적 사역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러기에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행 13:1-3), 만일 어떤 목사가 한 도시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도시에 파송된 모든 목사들이 다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다른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 사역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한 가지가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바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행 13-20장). 오늘날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자로서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시작하고 세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사도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교사는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직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떤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네 번째 서열의 사도 사역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호칭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 2:4), 참된 사도의 표징은 삶의 열매가 있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표징들이 없다면 그는 사도 직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겸손함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자들은 없지만 네 번째 서열의 사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사도적 직임으로 어느 정도 사역을 해오고 있는 사역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종교적으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예를 든다면 예루살렘에서 터를 잡아놓고 목회를 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증거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을 때 많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주님을 귀신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고(마 12:22-32),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막 3:30). 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독설스럽게 정죄하고 비난했을까요?(약 3:14-16). 그것은 이제까지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본적이 없고 자신들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역사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면 무조건 마귀의 운동이라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도 능력과 표적을 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살후 2:9-10).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이나 16장에 나오는 점치는 여자처럼 백성들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자신만을 나타내며 사단을 힘입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입니다(고후 11:13-15). 성령을 모시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이 사탄의 궤계라는 것쯤은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후 2:11). 왜냐하면 성령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별적인 능력을 행사할 것과 시험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4:1, 눅 12:57, 히 5:14). 하지만 조심할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사역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눅 11:14-20). 그 이유는 마지막 날 그분과 일대일 면담할 시간에 우리가 입으로 뿌린 것들을 거두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12:34-37, 갈 6:7). 그러기에 교법사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행 5:34-39).
◈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맛디아(행 1:26), 바울(롬 1:1), 바나바(행 14:14), 디모데와 실라(살전 2:6), 주의 형제 야고보(갈 1:19, 2:9)와 같은 사람들을 추가함은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추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기념되는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고(계 21:14),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도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서열에 속해 있는 사도들은 교회가 세워지는 토대에 관한 그 이상의 어떤 계시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은 초자연적일 것이며 평범한 것을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역의 은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은 오늘날도 사람들을 사용해 초자연적인 역사와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행 4:30, 5:12, 6:8, 8:6). 이렇듯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는 것은 구원의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과 높임을 받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눅 16:15). 성경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고(고전 3:21), 구원받은 인간이 평생을 높이고 자랑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빌 3:3, 벧전 4:11).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이러한 성경적 직임과 그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건전한 사역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온전한 범위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