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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적으로 범죄가 많이 일어나도 그런 죄에 물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을 볼 때에 범죄란 외부의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외부적 죄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죄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했으나 자유의지가 동의하지 아니할 때 범죄는 성립되지 않았습니다(창 39:9).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유로이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최초의 인간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는데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죄를 짓을 수도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성이 처음부터 아담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죄를 지을 가능성과 짓지 않을 가능성만이 아담에게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담을 유혹했을 때 아담은 그것을 거부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창 3:6).  다시 말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벌써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이고 그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미 그분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따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전에도 죄는 마귀의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들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첫 번째 죄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였습니다(창 3:1-19).  이들이 선악과 먹은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면에서 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첫 번째는 이들은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17), 뱀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했고( 3:4), 이에 대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말씀이 진실인지를 시험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들은 “무엇이 옳은가?”라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지만(창 2:16-17), 뱀은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속였을 때 그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창 3:5).  마지막으로 이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본분에 대한 질문으로 아담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언제나 그분을 창조주로 섬겨야 했지만(사 43:7), 문제는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도록 창조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창조하였다면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고 기계적 존재로 아담은 꼭두각시 인형의 수준에 넘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창 1:27),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며 동물과 다르게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피조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책임을 선악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돌리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 William G. T. Shedd는 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무한한 의지(하나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유한한 의지(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죄는 불안전한 것인데 완전한데서는 불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선악과가 죄의 근원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남용에 있는 것으로 죄의 책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시 51:5).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창 1:26-28), 결코 인간을 무제한의 존재로 만들지는 않으셨고 비록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욥 4:17-21).  즉 인간은 피조물이기에(욥 10:9),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기에 이것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창 2:15-17).  따라서 선악과는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고 피조물인 인간이 넘어가서는 안 될 한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피조물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있어야할 이상적인 관계이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신 27:26).  즉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고 그분만이 절대 주권적 입장과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딤전 1:17).

 

이렇게 본다면 선악과는 결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거나 덫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질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선악과는 피조물인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참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선악과에 대해 찰스 핫지는 “행위 언약의 조건은 단순히 아담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베풀어 진 것이다”라고 하며 칼빈은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는 말씀처럼(레 18:5),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될 것이지만(롬 10:5, 갈 3:12),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롬 6:23).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사탄처럼 맞서는 것이 되고(사 14:12-15), 더 나아가서는 피조물이기를 망각해서 행하는 중대한 범죄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3:4-5).

 

루이스 벌콥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분과 인간 사이에 자연적인 관계가 수립되었음을 의미하고 이 관계는 토기장이와 질그릇, 절대적 주권과 그 같은 주장할 수 없는 주체와의 관계를 말해준다. 피조물인 인간은 자연히 율법 아래 있으며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범했을 때 형벌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율법을 지켰다고 해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인 관계에서는 인간이 아무 것도 공로로 내세울 수 없다”라고 하며 언약관계에 대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절대적인 주권이자 율법 수여자인 동시에 자신에게 의존하는 피조물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하는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는 인간의 차원으로 낮아지셔서 자신을 친구로 계시하셨으며… 자연적 관계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적극적인 명령을 세우심으로 은혜 가운데 언약관계를 확립시키셨고… 이 계약에 근거하여 아담은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위하여 순종의 방법을 통한 영생을 얻었다”

 

간추린다면 결코 하나님은 아담을 기계로 창조하지 않으셨고 아담이 도덕적 인격자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에 대한 자의적 순종을 발휘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그에게 주어진 도덕적 자유를 주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함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의 상징으로 이것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데 호세아서 6장7절에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라고 한 사실을 볼 때 분명히 선악과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세운 언약의 상징인 것을 알 수 있고 바울은 이 사실을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오고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5: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맺으시는 모든 언약이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에 대한 타협이 없으신데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아담에게는 그 내용을 수정하거나 바꿀 기회를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유일한 선택은 지키든가 아니면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된 우리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2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뜻 모를 이상한 말을 쏟아내며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신흥종교 단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주사 스트리트의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연일 집회가 열리고 있고 이들은 이상한 교리를 신종하는 사람들로서 광적인 의식을 행하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르침을 전파하며 또한 이상한 열정에 사로 잡혀 자신들을 광적인 흥분상태로 몰아넣는다”  이 글은 1906년 4월18일 수요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에 실린 기사로『The 100 Most Important Events in Christian History』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정적인 언론보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집회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침례교 목사, 그것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교인들로부터 방언을 유난히 강조하다가 쫓겨난 윌리암 세이무어를 사용하여 아주사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아주사 부흥은 근대 오순절 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으로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오순절 운동은 오늘날 수많은 나라로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스탠리 프로드셤은『With Signs Following』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워보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했고, 노르웨이의 학자이며『성경문고』의 국제판 편집자인 Thoralf Gilbrant은 1985년 세계 오순절 대회에서 말하기를 이탈리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기 할머니가 유창한 이탈리어로 이탈리아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간증합니다.  물론 방언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중단론자들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면서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해 일축해 버릴 것입니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방언은 지나치게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 가운데 방언만큼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은사도 없고 반대 의견도 가장 많았던 은사이기에 앞으로도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거나 반대나 거부하는 의견은 언제나 계속해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고전 14:39).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를(약 1:17), 거부하거나 소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살후 5:19).

 

그렇다면 오늘날 각종 방언 말함이 과연 성경적인가?(고전 12:10), 라는 것에 대해 고든 피는『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방언은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과 방언통역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는데 바울이 말한 방언은 성령에 감동된 발언이고(고전 12:7), 화자가 몰아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으며(고전 14:27-28), 통역되지 않는 한 화자나(고전 14:14), 다른 청자들이(고전 14:16),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어이므로(고전 14:2, 14-15, 28), 통역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신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버트슨과 풀루머는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이성과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점에서는 이교도들의 “광증”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보통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성령이 제공하시는 언어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몰아경의언어”(ecstatic language)라고 말하며, 웨인 그루뎀은 “방언은 말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음절로 말한 찬송이다”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방언의 종료 문제에 관해 로버트 레이몬드는 방언의 은사는 이미 중지된 계시은사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이 계속된다고 할 때에 교회로 하여금 괴이하고 공상적인 각종 주장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문제 이외에 성경 교훈과의 모순을 유발한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리차드 개핀도 방언은 교회에서 철수된 일시적 은사였다고 말하면서 방언과 같은 계시은사는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교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앤터니 후케마 역시『Tongues and Spirit-baptism』에서 방언은 오늘날 교회에는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고린도전서 외에 신약의 어떤 서신에도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방언이 교회 안에 계속 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AD 100년에서 1900년까지 교회사에 방언이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시키실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주장과 거의 양립될 수 없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방언이 교회에서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그린은『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의 종료 문제에 관해 “우리는 방언을 거절해서도 안 되지만 또한 그것을 영성의 전부라고 보아서도 안 되고 방언은 가치도 있지만 위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만일 방언할 줄 안다면 그 동안 너무 두뇌적인 것에 매였던 금기에서 벗어나 성경대로 바로 사용해야 하고 동시에 방언이 “슈퍼 영성”의 표징이라는 착각을 하지 말며 또한 방언을 못한 자가 방언을 구해도 받지 못하였다면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으며 현재로는 구하는 자에게 방언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11).  이렇게 오늘날 교회 내에서 방언에 대해(고전 14:5), 논쟁이 심한 것은 칼빈의 말한 것처럼 “야심에 이끌린 나머지 자기 과시와 허영에 잘못 사용한 사람들”과 무가치한 두려움과 질서개념 때문이지 사도바울의 지침을 따르거나 진리의 말씀을 잘 배워(딤후 3:14),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교훈을 익히 알아둔다면 질서 면에서 문제될 것이 없고(고전 14:27, 29, 40), 방언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D. A. 카슨도 방언의 은사가 계속된다는 측면에서 방언 논쟁에 있어 관건 되는 몇 가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데 먼저 방언에 “엑스타시”가 포함되느냐는 여부에 대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윌터 홀렌버거는『The Pentecostals』에서 “뜨거운 방언”(정신이완이 고양된 상태)과 “차가운 방언”(화자가 정신적으로 깨어서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을 구분하여 전자는 엑스터시가 포함되고 후자는 엑스터시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카슨은 현대의 압도적 다수의 방언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하며 또한 고린도의 방언이 “실제의 언어”(외국어 방언)인가 혹은 인간 언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언어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카슨은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실제적인 언어들, 즉 사람들의 언어들이건 천사들의 언어들이건 간에 “인식적인”(cognitive) 언어들의 은사라고 주장하고 현대 방언에 대한 언어학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현대의 방언현상 수천 건을 테이프에 담아 분석한 언어학자들 간에 그것이 어떠한 인간 언어가 아닌 보편적인 합의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학자들 간에 방언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아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오늘날 주로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들이 주로 내세우는 말은 교회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주후 4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며 성경주석가였던 크리소스톰은 방언은 이미 그쳤다고 했으며, 5세기의 어거스틴도 방언은 초기의 표적으로 사라졌다고 말했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기적의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칼빈은 제네바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6, 11, 19절을 인용합니다.  이렇듯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위선적인 행위라면 왜 성경은 방언통역의 은사가 있고(고전 12:10), 이 은사를 구하라고 말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고전 14:14).

 

또한 칼빈은 사도행전 10장 44-46절을 주해하면서 방언이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방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기독교강요』에서는 방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 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이렇듯 제네바 교리문답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볼 때에 칼빈 자신도 방언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로이드 존스는『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방언은 우리가 주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원하는 대로 방언을 한다면 “영적인 방언”이 아니라 “심리적인 방언”이라고 주장하면서 은사는 성령이 통제하는 것이지(고전 12:11), 사람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살전 5:21).  이렇듯 오늘날 방언이 논쟁이 심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방언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 그 당시 그들은 방언을 최고로 생각했고 누구나 다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고전 12:30), 자랑하려다가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은사목록에서 의도적으로 방언을 마지막에 둔 것은(고전 12:8-10), 고린도교인들이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고전 14:5).  사실 방언은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처럼 정령주의자들도 흉내 낼 수 있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 방언을 주신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에(고전 12:7),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거듭남 사람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보통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는 사도요한이 말하는 진정으로 중생한 사람이란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과 “진리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요일 3:9),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요일 2:29),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거듭난 사람은 그 안에 생명을 창출하고 자라나게 하는 능력, “영적인 씨”를 가지고 있어 그것이 계속되는 죄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도록 해준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거듭난 사람이 완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고(요일 1:8-10), 다만 그 삶의 양식이 삭개오처럼 죄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게 되지 죄를 끊임없이 탐닉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눅 19:8-10).  그러면서 요한은 거듭남의 가장 구체적인 결과 중에 하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제시하고(요일 4:7),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요일 5:3), 세상을 이기는 것(요일 5:4), 그리고 사탄으로부터의 보호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요일 5:18).

 

사실 거듭날 때에 정확하게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는 신비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요 3:8),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거듭난 사람은 인격전체, 지정의가 새로워집니다.  펠라기안주의에서는 의지만의 변화로 보지만 칼빈주의에서는 인격전체의 변화로 보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개혁파 변증학의 선구자이며 웨스트민스터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은 세 가지 인간상을 말합니다.  하나는 타락하기 전의 인간(아담에게만 해당), 그리고 타락한 인간(모든 인류 전체에 해당), 마지막으로 중생한 인간(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타락 전의 인간은 완전했지만(창 2장), 타락한 자연인은 지정의 모든 면에서 이즈러졌고(롬 5:12), 거듭난 인간은 지정의가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고후 5:17).  성경은 거듭난 사람에 대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골 3:10).

 

여기서 지성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일반은총에 속한 과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그의 지성이 타당성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로서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중생하면 성경의 합리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의존사색”을 하게 되는데 성경이 말하는 신관, 인생관, 사회관을 가지게 됩니다.  보통 일반은총에 관한 지식은 교육을 통해 배우지만 거듭나면 지성이 새로워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고전 2:14-15, 고후 4:6, 엡 1:18).  그리고 감정이 새로워지는데 성경 갈라디아서 5장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의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거듭나기 전의 불순하던 감정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나기 전의 감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랐지만(요일 2:16), 중생 후에는 깨끗한 것을 보고 기뻐하는 감정으로 정화됐다는 것입니다(시 42:1-2, 마 5:3-12, 벧전 4:3).

 

또한 의지가 새로워지는데 의지는 인격의 방향을 결정을 짓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19-23절까지 보면 인간이 맺는 열매는 두 가지인데 육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가시나무에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마 7:16),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반면에 중생하면 성령의 열매를 안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갈 5:23).  만일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의 요소들이 그 삶 가운데 점점 더 현저하게 나타나지만 대조적으로 중생하지 않은 사람, 즉 신자인체 하는 사람은 그의 삶 가운데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마 7:17-20).  사실 예수님도 기적들을 중생의 증거로 소개하지 않으셨고 삶에 나타나는 특징들로 거듭남을 강조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언이나 축귀 같은 것은 자연인들도 행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사탄의 도움을 통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살후 2:9).

 

그러므로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보여지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참된 사랑과(마 22:37-40), 그의 계명에 대한 마음을 다한 순종(요 14:21), 그리고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 그리스도를 닮은 인품들은(골 3:12, 고후 6:6, 엡 4:2), 사탄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겔 36:26-27, 갈 5:16).  그러므로 만일 한 사람의 삶에서 진정한 거듭남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와 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것이고(행 16:14-15), 유대인들처럼 죄의 습관을 반복적으로 좇지는 않을 것이며(롬 2:17-24, 요일 3:6, 5:18), 형제에 대한 사랑과(요일 4:20-21), 세상 유혹을 이기는 가운데(요 16:33, 요일 4:4), 하나님의 보호아래 악한 자의 궁극적인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요 17:12).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말씀에 굴복하지 않고(롬 8:5-8),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며 육체의 욕심 따라 자신의 원하는 대로 삶을 살 것입니다(갈 5: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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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와 존 맥아더와 같은 신앙 라인에 선 R. C. 스프롤은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로 흔히 장로교인에 대한 문화적 이미지는 영적 자발성을 조금만 암시해도 이마를 찌푸리는 자로 말하면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세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가 감리교회, 두 번째가 침례교회, 세 번째는 장로교회였다. 그가 귀향해서 상급자들에게 이런 보고를 했는데 감리교회를 방문했더니 “불! 불! 불!” 소리만 지르고, 침례교회를 방문했더니 “물! 물! 물!” 소리만 지르고, 장로교회를 방문했더니 “질서! 질서! 질서!”라고 소리만 했다”  스프롤은 이 예화를 소개한 뒤 장로교인들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16장까지 모든 말씀은 생략하고 오직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40절 말씀만을 읽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이 예화가 주는 의미는 특히 장로교 사람들 그것도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너무 교회질서와 전통만을 따지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한 은사를 무시하므로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웨인 그루뎀은『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으로 안위와 권면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 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이(고전 14:25), 그 주된 기능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29-30절에 나오는 ‘예언’과 ‘계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이 둘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11).  즉 성경에 ‘계시’라는 말은 꼭 정확무오한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을 찾아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5),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 1:18),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가는 것(엡 1:17),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4:26).  그러면서 절대적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일절 없는 성경말씀과(벧후 1:20-21),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를 구분하고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분별할 것을 말하면서(고전 14:29), 또한 신약의 예언자들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과신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D. A. 카슨 역시 ‘계시’라는 말을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는데『Exegetical Fallacies』에서 “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돈 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중단론 신학자들만의 생각이지 카리스마적 입장의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의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에 중단론자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계 22:18-19),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누스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계시를 받았거나 혹은 예언을 하면 곧 성경말씀에 무엇인가 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예언을 하거나 환상을 보든지 아니면 꿈을 꾸는 사람을(행 2:17), 무조건 신비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정죄하거나 이단시하는 사람은 개혁주의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로 존 맥아더와 리차드 개핀을 들 수 있는데 물론 이들의 말씀과 가르침은 배울 것이 많지만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예언(계시)의 은사는 사도시대에 모두 끝났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루뎀은 지금도 예언의 은사는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이트레스 교수는 그루뎀과 개핀의 견해를 비교 평가한 후에 전체적으로 구르뎀 편에 서서 “특별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 때문에 개핀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도 이런 은사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은사를(고전 14:1, 살후 5:20), 자기들이 무엇이길래 부정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책망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거나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에(히 6:18), 우리에게 틀린 예언(계시)을 주시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실수할 때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받은 사람이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던 베드로는 이 일이 세 번씩 반복될 때까지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슨 뜻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을 했습니다(행 10:9-17).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 할지라도(약 1:17), 그것을 받는 사람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가 계시(예언)을 받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직통계시”라고 판단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살후 5: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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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20세기 교회에도 예언이 필요한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서적인 희랍 어원에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어휘들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신약 속에서 두 개의 희랍어가 영어 단어로는 “말씀”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로고스”와 “레마”입니다.  희랍어 학자들과 성서 신학자들 간에 이러한 단어들이 동의어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논의가 벌어졌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단어가 각자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영원히 변하거나 폐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인(요 1:1, 14), 성경 전체를 의미하며(딤후 2:15), 반면에 “레마”를 사용할 때는 우리가 개별적으로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롬 10:17),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구체적인 말씀을 뜻합니다(엡 6:17).  쉽게 말하면 로고스는 우물 안에 물과 같고 레마는 우물에서 길어낸 한 통에 담긴 물과 같기 때문에 레마는 항상 로고스에 의존하고 넓은 의미에서 오늘날 말하는 신약의 예언은 “레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약의 예언은 설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사람들은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사역이다”라고 말하거나 “신약의 선지자의 기능이 오늘날 설교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며 또는 “당시 성경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이 설교의 기능을 대신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구절인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여”라는(행 15:32), 말씀을 놓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믿음을 장려하고 격려하는 말씀이 설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이사랴에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로부터 한 선지자 아가보가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행 21:8-11), 이것도 설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앞으로 당할 일을 예언한 것이고 바울도 성령을 통해 자신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을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행 20:22-23).

 

이 신약의 예언에 대해 로버트슨과 풀루머는『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에서 “예언은 반드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 3, 24, 30절 말씀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것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과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위대한 능력을 암시하지만 이것은 기능면에서의 예언정의라고 볼 수 있고 사실 이것은 예언과 설교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4장3절에서 바울이 예언은 “강화와 격려와 위로”를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 여기서 예언을 정의한 것은 아닌 이유는 강해, 기도, 교육 등도 그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언을 설교 내지 성경강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구약예언이 주로 개혁과 갱신에로의 호소, 즉 권면이므로 신약 예언도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단론자의 많은 학자들은 예언을 설교와 동일시하거나 또는 어떤 종류의 계시이건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경의 최종성과 안정성에 위협이 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심으로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말로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을 ‘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4:30-31).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꼭 성경을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등한 말을 의미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는데(빌 3:15, 롬 1:18, 엡 1:17, 마 11:27), 바울은 단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생각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의식 속에 심어주신 생각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 생각은 한 개인의 평소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일 수도 있고 생생함이나 긴박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게 만들 수 있는데 바울은 이러한 느낌이나 본능을 계시라고 칭하고 하나님께서 촉구하신 것을 교회의 회중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예언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4:26).  물론 그 안에 말하는 사람의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도 포함되어 있기에 판단과 분변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지만(고전 14:29),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매우 소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에 근거하기 때문에(행 11:28, 21:4, 10-11, 요 11:51),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예언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행위나 교사가 하는 일 등에서 “가르치다”라는 동사가 묘사하는 어떤 활동도 신약에서는 계시에 근거해서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르침이란 단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행 15:35, 11:26, 롬 2:21, 15:4), 또는 사도들의 교훈의 반복내지는 설명을 가리킵니다(롬 16:17, 딤후 2:2, 3:10).  우리는 이것을 “성경 가르침” 혹은 “설교”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신약의 예언은 권위에 있어 설교보다 앞서지 않고 교회에서의 회중 예언은 언제나 성경의 권위 있는 가르침 아래 있습니다.  디모데는 교회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고(딤전 4:11, 6:2),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예언을 굳게 잡으라는 교훈을 받지 않고 바울이 가르친 것을 굳게 잡으라는 교훈을 받았습니다(살후 2:15).

 

또한 장로들 중에는 ‘말씀을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이 있었고(딤전 5:17), 장로들은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지만(딤전 3:2,딛 1:9), 예언하는 장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또 이들이 예언하기를 잘하며 확실한 예언에 견고하게 선자들이어야 한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디모데는 지도자로서 자기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는 권면을 받았지만(딤전 4:16), 예언을 삼가라하는 권면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설교 혹은 가르침이라고 부릅니다(골 3:16, 히 5:12).  그러기 때문에 예언과 설교, 이 둘은 명백하게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 신약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가르침입니다(행 19:8-10, 딤후 2:2).  그러나 만일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눅 1:67).  그러나 만약 잘 준비된 설교에 전혀 계획에도 없던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주신 보충자료에 의해 중단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 그것은 예언이 가미된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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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피는『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구약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 하에 계시를 받아 주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고 예언의 주류는 “몰아지경”이나 “광증”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예언 속에 미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요엘 2장2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그 결과 모든 신자들이 받을 수 있으며(행 2:17-18), 바울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고(살전 5:19-22, 롬 12:6),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4:26-33).  간추린다면 예언은 성령의 계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로 이미 과거에 주어진 성경계시를 삶의 현장에 현재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과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하는 것으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요 16:7),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 중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웨인 그루뎀이 말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기록된 후에는 교회에 더 이상 성문화되거나 구두화된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고 역설합니다.  이들에 의하면 이는 특히 예언의 은사의 경우에 잘 들어맞는데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이것이 주의 백성을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기 때문에 지속되는 예언적인 말씀을 더하는 것은 성경을 더하거나 성경을 완성하는 행위가 되는데 이는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있어 성경의 유일한 권위가 침해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신약시대의 회중의 예언이(고전 14:26), 그 권위에 있어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 사도들의 말씀과 동등하다면 중단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의는 지극히 타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오늘날 선지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경에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또한 계시록을 완성된 후에 계속해서 성경에 더하지 못하도록 완성해 놓았다는 확신이 있다면(계 22:18-19), 오늘날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예언은 더 이상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언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 많은 중단론자들의 주장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중단론자들은 예언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지 말론은 “기독교의 주류에 있는 비중단론자 중에 오늘날의 계시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신약 교회에서 회중의 예언이 성경적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사도 바울은 예언을 분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29),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살전 5:19-21).  여기서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인데 구약 선지자의 말이나(신 18:19, 렘 1:9, 겔 33:7), 신약 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행 1:2, 엡 2:20, 3:5),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는지 않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4:29, 요일 4:1).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에 “계시” 혹은 “계시하다”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러나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인데(마 16:17), 베드로는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엔 에모이’, 문자적으로 “내 안에”, “내게” 혹은 “나에 관해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계시(하나님의 아들),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합니다(마 11:27, 고전 2:10).  에베소서 1장17절 말씀도 개별적인 계시(중생시), 이후에 은혜와 성숙과 관련된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빌 3:15).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계시가 평가되어야 하고 사도와 사도의 복음에 원칙적으로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의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개신교 조직신학의 용어와 성경의 용어를 혼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추린다면 사도 바울은 예언이 “계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결론을 짓지 않았고 아무리 탁월한 예언적 말씀이라도 사도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갈 1:6-9).  카슨은 “이러한 원리가 어떠한 예언(계시)은사에서도 성경자체에 대한 위협을 발견하는 현대의 비은사주의자들의 경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예언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계시종결과 함께 계시은사의 종결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존 맥아더는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 일으켰음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남용이 예언의 은사의 기능에는 항상 수반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오류와 남용이 하나님의 은사를 무효하게 만든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성경공부도 그리고 교회 행정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경 선생들이 잘못된 것을 가르쳤고 이단들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오도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데에는 남용이 있는 법인데 은사의 바른 사용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은사의 남용을 우려하여 은사의 바른 사용을 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날드 기는『Spiritual Gift in the Work of Ministry Today』에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인도하심의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 받는 일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증거 하지만 그것은 균형 있게 보존되어야 하며 또한 은사를 통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사모하는 자들은 지난 세대와 오늘날 파멸된 것을 통해서 경고 받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데니스와 리타 베네트는『The Holy Spirit and You』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숙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의 사역이 아닌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성령운동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주 안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 말씀들은 유익하고 신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을 받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언이나 방언의 통역, 혹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무조건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당신의 친구가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 하지 말라.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위한 지시가 있었다면 당신의 마음속에 이를 증거 하실 것이며 이 경우에 당신의 친구가 한 말은 하나님께 이미 당신에게 보여 주신 일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당신을 인도하심은 성경과 일치되어야 한다”  이들의 말은 예언을 받을 때 신중하게 살펴보고 영이 하나님께 속했나 분별하라는 것입니다(요일 4:1).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과 예언의 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의 독특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것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중단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중단론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행하시는 일을 반대하고 그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대적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입니다(마 12:28-32).  하나님은 자기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며 그 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시며(사 43: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엡 4:12),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고전 12:7).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약 1:17), 대적하지 않도록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고(행 5:34-39),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해야 하며(마 12:34-37),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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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때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는 우리에게는 신비에 속하는 일이지만 에베소서 2장1절 말씀처럼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든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아나서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 거듭나게 되었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압니다(요 3:3, 7, 엡 2:5, 8, 골 2:13).  하지만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하셨는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8).  즉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결과를 보지만 그 자체는 볼 수 없듯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그와 같은 것으로 중생이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 한번 일어나며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벌코프는 이것에 대해 “중생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생의 수단으로 사용되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불어넣는데 있어 도구와 수단으로써 성경 말씀 혹은 설교 말씀을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펠라기안주의에서는 말씀선포 없이 성령이 직접 역사하는 것으로 보나 개혁주의에서는 말씀선포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수많은 마른 뼈들에게 성령이 역사해서 큰 군대를 이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부흥을 보여주는 동시에 개인 영혼의 부활도 보여주는 것으로 거기서 나오는 바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인데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고 말씀이 선포되자 마른 뼈들이 큰 군대로 살아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말씀선포 없이는 중생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에도 성령의 역사보다 먼저 베드로의 말씀선포가 있었고(행 1:15-26),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할 때에도 베드로의 설교가 먼저 있었습니다(행 10:44).

 

그러면 왜 성령께서는 말씀선포를 통해서만 역사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엡 1:13).  요한복음 3장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불뱀들을 보내어 물리게 하실 때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으로 놋뱀을 만들어 들게 하셨고 모세는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살아나는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후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민 21:4-9).  여기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 얻게 될 것임을 예표 하는 것으로(행 2:36), 말씀선포의 목적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말씀선포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스펄전은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전도의 약점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는데, “예수 믿으십시오!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이렇게 말하고 예수님을 보여주지 아니하는 전도는 마치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떠내려가는데 언덕 위에서 어떤 사람이 나오라고 소리 지르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물 밖으로 나와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나오란 말입니까?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바로 생명의 밧줄을 던져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로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광경과 생명의 구주되시는 예수님의 대해 잘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행 26장).  성경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합니다(롬 10:14).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해 들어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중생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말씀을 듣지 않고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실례를 찾아본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 20:23).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둘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신학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죄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사죄의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으로(막 2:10), 그분께서 사죄의 역사를(중생의 은혜), 제자들의 말씀선포를 통하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말씀선포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말씀선포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기지만(행 2:37-42),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막 16:15-16), 말씀선포를 통해 성령께서 죄인인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요 3:3-6, 5:24-25, 고전 12:3).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성령이 역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인간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주권에 달려있으며 말씀을 선포하거나 말씀을 들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때가 있는데 주로 사람들이 마음이 완악하고 성령을 거역할 때입니다(행 7:51-60).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는데 왜냐하면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기초공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역사는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여기서 말씀선포는 기초공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마 13:1-23).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마음에 뿌려진 사람은 언젠가는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중생시킬 가능성이 있지만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중생할 기초공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주께서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의 문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도록 하신 것처럼(행 16:14), 죄인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의 능력과(롬 1:16),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분의 설득력에 감화된다고 볼 수 있는데(겔 11:19), 이것이 바로 중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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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이루어졌던 선지자들의 예언자적 사역의 예를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전체 실례들은 커다란 단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습니다(사 6:6-8, 렘 11:6-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을 전하며 기록할 수 있었으며(렘 1:9), 이들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라고(출 9:1, 삼상 10:18), 말한 다음에 한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신 18:19, 겔 33:7).  이렇게 선지자들이 말로 메시지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계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민 22:38).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으며(신 18:18-20, 겔 2:7), 따라서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선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삼상 8:7, 왕상 20:35-36).

 

이렇게 구약 선지자들이 주요 역사가이며 오류 없는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었고(대상 29:29, 대하 9:29, 12:15),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행 4:33), 기록하며(엡 3:5), 성경에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행 1:2), 예수님은 그들을 선지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에 준하는 사람들이지만(고전 2:13, 고후 13:8, 갈 1:8-9, 11-12, 살전 2:13, 4:8, 15, 벧후 3:2), 교회의 권위 구조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각 사도들에게 각각 다른 영역을 위한 권위를 주셨는데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위가 있었고(벧전 1:1),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향한 권위가 주어졌으며(롬 11:13, 행 9:15), 교회는 이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에 선지자란 호칭에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언제나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고(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벧전 1:1, 벧후 1:1), 그리고 이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20).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이고 신약의 사도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오늘날 신약의 선지자들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처럼 이들이 전한 말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웨인 그루뎀은 신약의 예언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는데 그는 고린도의 신약 예언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 및 신약의 사도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이에 대해 카슨은『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에서 그루뎀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예언은 계시를 전제하는데 구약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가라사대” 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의 형식을 취하지만 신약은 이런 경우들이 드물다. 구약 선지자들의 합법적인 후계자들은 권위 면에 있어 신약 예언자들이 아니라 사도들이었다. 구약 선지자가 일단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 그 예언이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이 없었으나 신약 선지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신약의 선지자들은 자기 메시지와 하나님의 영의 메시지를 혼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언을 일인칭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테스트 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신약의 선지자들도 얼마든지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행 21:10-12),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른 지체들에게 확증 받고 시정 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고전 14:29).  사실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 혹은 “미래를 미리 말하는 자, 아니면 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채 대변인” 정도를 의미했던 것 같은데(요 4:19, 딛 1:12), 이것에 대해 헬무트 크래머는 “선지자라는 헬라어는 단지 알리고 선언하고 선포하는 전달자라는 공식적인 기능을 나타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약의 선지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을 하지만 바울은 이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는데(행 21:17), 만약 두로의 제자들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언을 분변하라는 것인데 만일 예언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분변할 필요가 없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29절에 분변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합니다.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하는데(살전 5:20-21), 만일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선지자의 말이나 신약 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언자들이 전한 계시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기를 바래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실히 그랬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유다에 머물러야 하는지 이집트로 탈출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만을 지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죽음을 당합니다(렘 42장).  그러나 오늘날 신약의 선지자들은 계시를 전함에 있어 예레미야나 구약의 예언자들을 표준으로 삼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장 29-30, 36절에 나타난 대로 예언의 은사가 상당히 규제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신약의 어떤 예언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지 않고 신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전달하는데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부르스 요컴은 “우리가 말씀을 직접 받든지 아니면 메시지의 느낌을 받든지 간에 예언은 불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언자로부터 구약 선지자처럼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삼상 9장), 신약에서는 완전히 불법화된 구약의 중요 기능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믿는 자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가집니다(롬 8:14).  다시 말해서 신약의 사람들은 인도와 방향, 삶에 대한 관리 등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딤후 3:16, 벧후 1:21),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갈 5:18).  그렇다고 신약 예언자들이 믿는 자들을 도울 수 없다는 말은 아닌데 이들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여 기도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예수님과의 개선된 관계로 나아가도록 권면의 말씀과 확신을 제공하기도 할 것입니다(고전 14:3).  간추린다면 신약의 어떠한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다스리는 예언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믿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고 명확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만약 새로운 또는 미래에 관한 예언적 말씀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인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요일 4:1).

 

그래서 바울은 말년에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것을 권면했고(딤후 2:15),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특성을 강조했으며(딤후 3:16), 베드로도 ‘어두운데 비치는 등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하면서(벧후 1:19-20),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벧후 3:16).  성경은 교회에 있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주목하라든지 이들을 통한 말씀에 순종하라는 권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 사후에 많은 지역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지만(행 11:27, 13:1, 15:32, 21:9), 이들은 사도들과 같은 권위에서 예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끝 날에는 예언자의 역할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두 명의 강한 예언자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의 권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을 것입니다(계 11:3-12).  마이클 그린은 “예언이 사도 시대에 죽어버렸다고 생각할 여하한 이유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언’이라고 하면 무조건 정경적 예언으로 생각해서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은사의 종료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것을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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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다수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이 적절하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 은사라면 사도 바울이 은사의 목록에 이것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덴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장).  물론 넓은 의미에서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이기는 하지만(요일 4:10), 그렇다고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는 주고 또 다른 지체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그런 의미의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한 다음 바로 뒤이어 1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더 탁월한 은사들, 혹은 더 큰 은사들”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장31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이 나오고 바로 뒤이어 13장1절에 사랑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더 큰 은사’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단수가 아니라 “은사들” 즉, 복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도록 권면한 다음 뒤이어 고린도전서 12장31절 하반절에서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더 큰 은사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제일 좋은 길’을 제시하는 데 그 이유에 대해 카슨은『Showing The Sprit』에서 “최고의 은사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성령의 최고의 열매인 사랑을 제쳐놓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한 것이다. 사랑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한 은사가 아니라 그 중요성 면에서 이런저런 카리스마를 전적으로 앞서는 총괄적으로 감싸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의도는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보면 모든 신자의 삶을 특징지어주게 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하는데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은사 면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한 제일 좋은 길을 사랑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교회의 불행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영적 은사들을(엡 4:7-8),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처럼 시기와 분쟁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고전 3:3).  사실 열매가 없는 은사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7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상적 혼합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는데 있어 은사에 충실했지만 영적으로는 무질서했던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혼란한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은사가 아닌 열매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한 연유도 이것이며 여기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대해 웅변적으로 토로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하지 아무 유익이 없듯이(고전 13:1-3), 교회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가(고전 12:7),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공기가 빠진 타이어와 같아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점에 있어『Keep in Step with the Spirit』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인식해야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퓨리탄 학자 존 오웬이 말한 대로 은혜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참된 “신지식”이 가져오는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면서 전자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도 은혜는 거의 가지지 못할 수 있는데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와 같이 진정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은혜는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삶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에 보면 은사에 관한 구절과 열매에 관한 구절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물론이고 로마서 12장6-8절의 은사 목록 다음 구절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며(롬 12:9-10), 에베소서 4장의 경우에도 16절에서 은사의 목록이 마쳐지고 그 다음 구절부터 열매의 대목이 이어지는데 5장2절에 가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며, 베드로전서 4장9절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말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모든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에 기초를 두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헌신은 그 열매를 통해 평가를 받는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6).  이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역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벧전 1:8), 만약 어떤 사역자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은사는 무언가 잘못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영적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논한 13장이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 없이는 모든 은사가 제 아무리 굉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은사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그것은 이 둘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약 1:17).  이처럼 사랑이 은사를 행하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가장 높은 은사보다 더 귀한 ‘제일 좋은 길’로 바울은 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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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단순한 구원의 시작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은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생은 구원의 시작만 아니라 과정과 완성의 요소와 능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준비와 확신과 성화의 완성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중생은 새 생명을 받는 것일 뿐 구원의 과정과 완성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농부가 심는 “종자”에는 성장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듯이 중생을 단순히 심는 것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안다. 구원의 회복은 한 순간 또는 하루, 일 년에 되는 것이 아니라 택자의 육적 부패성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계속하신다. …중생 안에는 장성의 여지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말은 중생은 단순한 구원의 시작만이 아니고 완성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누가 중생을 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성령이 중생을 시킨다고 대답하겠지만(요 3:3-8), 그러나 이 문제는 성령만이 전적으로 역사하시는가 아니면 인간과 합동을 하시는가 하는 것인데 모든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라기안주의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중생을 “신인협동”으로 생각하는데 이들은 인간에게는 아직도 자신 속에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선의 요소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인간이 중생을 소원하며 움직일 때 성령의 협동함으로 중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에게 만일 중생하기 원하는 의지의 활동이 있다면 그 소원마저도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빌 2:13).  즉 성령은 우리에게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롬 1:17).

 

그러면 왜 인간은 중생하는 일에 있어 성령과 협동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중생하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롬 8:7).  이런 원수관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하지 못한 인간은 죽은 송장과 같기 때문에 협동할 수가 없는데 에베소서 2장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합니다.  협동은 산 사람끼리 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하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그와 의논을 하고 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있는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협동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독자적 권능으로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에 있어 인간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겔 11:19, 요 1:13, 행 16:14, 롬 9:16, 빌 2:13).

 

따라서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의 요소들 중에는 인간이 능동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요소들도 있지만(회심, 성화, 성도의 견인), 중생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중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삼위 중에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영으로 거듭 난다”라고(요 3:8), 말씀하실 때 특히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가리켰지만 다른 구절에서는 중생에 성부 하나님이 관여하신다고 증거한 적도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엡 2:4-6), 야고보도 말하기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이는 ‘빛들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약 1:17-18).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벧전 1:3), 이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성령께서(요 14:16, 26, 15:26), 하신 일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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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언자”라는 단어를 대할 때 사교의 지도자들이나 협잡꾼을 연상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성경에 새 책들을 추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예언자란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한 사도바울 등을 닮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오늘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예언과 예언자들 및 초자연적인 계시는 신약시대의 마지막 사도가 사라짐과 더불어 종식되었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신빙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은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지시를 자신의 성경지식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바람직한 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러한 종교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떠나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요 5:37).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요 10:27).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경건이 없는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고(마 23:1-7), 이것은 이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교만을 강화해 주는 지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으며(마 23:13-15), 이런 지식은 생명의 없는 말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들에게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추종자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적 행위에 만족한다면 교만은 증가하고 편견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Paul Thigpen은『Did the Power of the Sprit Ever Leaver the Church』에서 “신약 시대가 교회가 출발한 이후로 하나님은 각 시대의 신자들에게 항상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 아울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4장11절에 나오는 말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장래 일을 예언하며 마음의 비밀을 말하고 정확한 느낌을 받고 꿈을 꾸며 정확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행 2:17).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의 사역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제를 삼으며 걸고 넘어지는 것은 예언하는 중에 실수를 범한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붙이고 한번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지 하나의 예언이 맞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란 참 예언자의 가르침과 예언을 반대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벗어나게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지(신 13:1-5),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장15절에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거짓 선지자에게는 나쁜 열매가 나오고 참 선지자에게는 좋은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짓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맞춘다고 해서 이 거짓 선지자를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언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도 강력하게 미래를 예언하고 증표를 보이기도 하며 이적을 행하기 때문입니다(사 44:25, 렘 23:13, 마 7:21-23, 24:24).  그러니까 예언이 틀린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봐야 하는데 발람처럼 돈을 사랑한다면 거짓 선지자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벧후 2:15-16).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인용하여 실수로 잘못된 예언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이단처럼 성경 앞뒤 문맥을 다 빼버리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은’은 곧 예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모세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한 사람이었고(민 12:6-8),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묵상하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 모두를 대표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신 34:10-12).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신명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해야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감히 모세를 흉내 내어 사람들을 가짜 신들에게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렘 23:9-32, 행 13:6-8).

 

더 나아가서 예언자가 저지른 실수를 추궁하여 사형의 벌을 내렸다는 뒷받침이 될 만한 성경구절을 구약에서 찾을 수 없으며 신명기 18장15-22절을 실수한 예언자를 추궁하기 위해 인용한 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Peter C. Craigie는『The Book of Deuteronomy』에서 “이러한 기준들을 예언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규칙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단의 말을 정정하셨을 뿐 그로 인해 나단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라 부르는 자도 없었고 돌을 던지려는 자도 없었습니다(삼하 7:1-17).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사람들의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켜 그 결과를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히스기야는 죽지 않고 살았을 때와(왕하 20:17),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욘 3장).

 

또한 사도행전 21장 10-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아가보의 예언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했다는 내용도 없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에 넘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이 두 번이나 바울을 결박했고(행 21:33, 22:29),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게 바울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행 23:12-14),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천부장을 통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구출되어야만 했습니다(행 21:27-36, 22:22-24, 23:10, 16-36).  물론 이런 결과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지만(행 28:17), 이렇게 틀린 예언을 한 아가보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매우 훌륭한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적 사역전체의 표본으로 삼고 오늘날 예언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기적, 그리고 예언의 정확성을 기준으로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사역이 맺는 열매를 보고 구별해 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43-44).  그리고 만약 예언자들의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면 왜 사도바울이 ‘예언 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라는(고전 14:29), 명령을 교회에 내렸겠습니까?  모든 교사들과 목사들, 그리고 선교사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고 베드로 역시 위선된 모습과 실수를 안디옥 교인들에게 저질렀고 이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바울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갈 2:11-1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고(마 26:69-75), 또 신자들 앞에서 실수했기 때문에 거짓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벧후 1:1).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언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언자적 사역만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고 관대함 속에서 자라날 수 없는 분야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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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여러 단계들 중에는 복음을 듣는 것, 성령에 의해 거듭나는 것, 믿음과 회개로 응답하는 것,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으시는 것, 그리스도의 삶의 성장 과정, 끝날까지 신실하게 우리를 지키시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다 마친 후에 우리는 죽어 하나님 앞으로 갈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부활의 육체를 받게 되는데 그때 비로소 구원의 과정이 완성됩니다.  여러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사건들에 구체적인 용어를 부여했고 그들이 믿는 순서대로 이 사건들을 각각 다르게 나열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시키는 사건의 목록을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 혹은 “구원의 순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구원의 서정”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하는 순서를 말하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순서별로 정리한 구원의 전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구원의 서정이라 할 때 “소명”(부르심), “중생”(거듭남), “회심”(믿음과 회개), “칭의”(의롭다함), “양자”(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 “성화”(바른 삶의 행동), “견인”(최후까지 은혜 가운데 거함), “영화”(부활의 몸을 받음), 등을 가리킵니다.  물론 성경은 이 같은 구원의 서정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서 8장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어느 정도 논리적 순서들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 여기에서도 “소명”, “칭의”, “영화”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타 다른 성경구절에서도 구원의 서정이 있음을 암시하지만(요 3:3-5, 롬 3:10, 10:17, 갈 2:16-20, 엡 1:13-14, 빌 3:9-11, 벧전 1:22-23), 그 순서를 명확히 하고 있지는 않고 사도행전 26장18절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한다는 사죄와 성결과 기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구원의 서정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생겼는데 구교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만 두지 않고 인간은 성령의 역사를 거절할 수도 있고 또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합동된 것으로 생각하고, 루터교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시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으나 하나님의 은혜 면보다 인간의 노력에 중점을 두는데, Pieper Christ는 말하기를 “구원의 획득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복음에 대한 신앙이 생성되는데 달려 있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중생은 인간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로 단번에 이루어지는데 인간의 반항 여하에서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의 기회와 문을 개방하지만 결과는 인간의 태도여하에서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구교나 루터교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나 결과는 인간에게 결정되고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다른 세 교파 신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인간의 구원은 동기만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과도 하나님께 하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전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유지된다는 사실 즉 구원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는 견해를 취한다는 점에서 세 교파와는 달랐습니다.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벌코프의 말을 빌리면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데 있어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의 일부로서 구원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논의하는 구원론은 일련의 총체적 사건인 구원을 어느 한 측면을 중심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그 전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각 단계별 관련된 사항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직시함으로써 구원의 실체에 가장 생생하고도 통시적으로 접근하며 취해진 진술 방법이 바로 구원의 서정에 의한 진술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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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든 존스의 목회설교는 193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신이 세 그룹의 사람들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는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가 처음에 강조했던 것을 잘못 이해해서 참된 기독교 체험과는 격리된 성경적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고, 두 번째 부류는 기쁨을 결여하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몰려든 칼빈주의적 경건주의자들이었고, 세 번째 부류는 그의 초기에 가르쳤던 그 강조점은 회피하고 이제는 더욱 지나쳐 은사 운동에만 관심을 가지는 감정주의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 건강을 성경적 이해의 빛에 비추어 로이드 존스는 첫 번째 그룹을 죽은 정통으로 보았고, 두 번째 그룹을 영적인 벌레들에게 먹혀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고, 세 번째 그룹을 암적인 광신주의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데, 먼저 성경적 정통주의자들의 특징은 무슨 말만 하면 항상 성경을 들이대며 성경만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18세기의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숭배했다면 오늘날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을 숭배하며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을 신격화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인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들도 무슨 이야기만 하면 칼빈을 내세워 말을 하는데 마치 칼빈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칼빈이 한 말에 맞춥니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칼빈은 그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도구일 뿐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류는 감정적인 사람들로 절제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흠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 부류가 오늘날 현대교회에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 성령의 은사에 냉담한 사람들은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지는 초교파 신학교인 달라스 신학교라 할 수 있고 이 신학교 총장이며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월부어드는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기적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의 동료이며 엉거성경사전을 펴낸 메릴 엉거도 “기적적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사실을 교회 역사에 의해 잘 입증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신앙이 복음의 확증을 위해 외부의 표적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메릴 엉거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인 벤자민 브레킨리지 위필드가 1918년에 저술한『Miracles Yesterday and Today』를 참조했는데 이 책은 오늘날 미국 안에서 카리스마적 은사의 타당성을 반대하는 가장 유력한 책으로 위필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 은사들은 분명히 사도들에 대한 확증이었다. 이 은사의 기능은 사도시대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 사도들이 죽을 때 그 은사들도 필연적으로 그들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현대의 위필드 계승자들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먼저 커버넌트 신학교와 낙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로버트 레이몬드는『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성령의 은사 계속설은 계시 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을 개괄적으로 주석하면서 “계시가 사도시대 말기에 중지되었다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 / i, vi), 이런 의미의 선지자들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예언은사를 추구하려는 바울의 권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언과 방언, 지식 등 계시은사들은 계시과정의 종결과 함께 종결되었다고 주장한 다음 기적의 관계를 거론하면서 능력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랬듯이(요 5:36, 10:38, 행 2:22), “사도적 메시지의 확증”  즉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었던 “특수 표징”들은 사도들이 지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중지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리처드 개핀은『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근거하여 “교회는 사도들과 신약적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 예언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비계속적인 기능으로 사도직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사라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베드로전서 4장10-11절 말씀을 근거하여 성령의 은사들은 말씀은사와 행위은사로 나누고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은사는 교회창설적 성경을 띤 것으로 교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개핀은 이런 원리하에서 신유와 기타 관련된 은사들에 관해서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런 은사들은 “사도적 표징들”이므로 사도 이후 교회의 생활에서는 사라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런던개혁침례신학교의 교장인 피터 마스터스도『The Healing Epidemic』에서 “카리스마적인 혼란의 시대인 요즘에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했고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 이렇게 예언, 방언, 신유, 기적 등의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런 은사들은 교회 창설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성경계시의 종료 면에서 중지된 은사들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엡 2:20, 3:5, 고전 13:8-12, 14:20-25, 29-30절 등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옥스퍼드대학 위클리프홀 신학대학장인 마이클 그린은 “은사중지설은 우리 자신들을 성령의 강력한 삶에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단순한 도피주의이며 성령은 바람과 불의 영으로 남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를 어떠한 교회적 박스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며 신유, 예언, 축사 및 방언이 마지막 사도들과 함께 죽어버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웨인 그루뎀은 고린도전서 13장8-12절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영적인 은사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말했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 신약학 교수인 고든 피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 중에 존 스토트는『One People』에서 은사목록 중에 사도직과 예언과 기적은 제외시켰고, 존 맥아더는『The Church, the Body of Christ』에서 기적과 방언과 신유와 방언통역 같은 은사를 일시적 은사로, 데이비드 호킹은『Spirit Gift』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말하며, 메릴 엉거는『The Baptism and Gifts of the Holy Sprit』에서 “표적은사” 신유, 이적을 행하는 것, 방언, 방언통역, 예언과 사도 같은 은사는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존 월부어드는『The Holy Sprit』에서 모든 은사의 기능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동등하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찰스 험멜, 리크 연, 케네드 킹혼, 레슬리 프랜, 도널드 지 등이며, 특히 마이클 그리피스는『Cinderella Betrothal Gifts』에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입장은 자유주의에 가까운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입장을 중간에 바꾼 사람들도 있는데 보수주의 침례신학교 교장인 장 얼 레드마커는 오순절 계통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오순절 교회를 떠나자 교회 안에서의 방언사용을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하며 비판했습니다.  마치 제자훈련 세미나로 한국과 미국에서 잘 알려진 빌 헐처럼 성령의 은사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탈봇 신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철저하게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굳게 믿은 것처럼 말입니다.  빌 헐은『성령에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중단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 설교자의 영향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나중에 돌아와 오늘날도 기적의 은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장로교 학자 로드먼 월리엄즈도 전에는 기적적인 은사가 사라졌다는 위필드의 견해를 따랐으나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확신하며 “오랜 세월 동안 신약성경을 잘못 읽어 온데서 돌이켜야 한다”라고『The Era of the Sprit』에서 강력히 말합니다.

 

◈ 종교개혁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성령의 은사에 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루터는 기적적 은사의 활용을 사도시대에 국한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은사가 당시의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칼빈 역시 성령의 은사가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 사상에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은사는 사도시대에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와 20세기 사이에 성령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다룬 저슬로 17세기 영국의 존 오웬의『The Holy Sprit His Gift and Power』저서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저서는 후기 개혁자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존 오웬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처음으로 일반은사와 특별은사를 구별한 사람으로 이런 구별은 후기 개혁신학에서 보편적으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특별은사란 사도시대에 국한 것으로 방언, 기적, 신유, 사도, 예언, 전도자의 여섯 은사를 말하는데 이와 비슷한 사상을 19세기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 20세기에는 벤자민 위필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존 스토트는『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면에 로이드 존스는『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견해 중에 어느 견해가 옳다고 보십니까?  만약 존 스토트의 견해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로이드 존스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고, 로이드 존스의 견해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존 스토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셨던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더 예로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지역에 두 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그레이스커뮤니티 교회”는 존 맥아도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카리스마 운동 가운데 잘못된 것”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에서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고『무질서한 은사주의』란 책을 써서 오늘날 교회 내에 어지럽게 퍼지고 있는 잘못된 은사운동에 대해 비판하며 이런 부류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바로 옆 “처치 온 더 웨이”인 잭 헤이포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방언으로 설교하고 통역을 하며, 완전히 오순절 초대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고 많은 책들을 저술했지만 특히『영적 언어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 방언은사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 교회 모두 그 지역에서 4천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로 양쪽교회 신자들 역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지만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견해를 달리할 뿐이지 그렇다고 두 교회 중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로이드 존스의『성령세례』서문에 보면 “초대교회가 기독론 논쟁 시대라면 교부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 시대라고 볼 수 있고 종교 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 시대이고 현대는 성령론 논쟁 시대라고 할 만큼 성령론에 관한 논의가 국내외를 물론하고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 논쟁은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으로서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고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오순절파의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계속성과 오순절은 하나의 교회부흥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성령론에 대해 전쟁 아닌 전쟁이 그것도 믿는 자들 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여야 할 인격을 갖고 하나님이시지 논쟁이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은사를 거론하면서 은사주의자들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성경대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존 입장을 고집하며 성령에 대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소천한 존 스토트의 책을 읽어보면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연과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나 자신은 영적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영적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은사운동의 문제점을 강조하면서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없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체험한 고린도교회를 두고 문제투성이 교회라고 운운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거와 같습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성령의 은사로 시끄러웠던 고린도교회가 이단이었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였습니까?(고전 6:20).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시끄러워서 ‘너희가 아직도 육신의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말하면서 다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말고 “말씀만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고전 14:39), 말합니다.  은사 문제로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모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공동묘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문제들도 많은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사데 교회는 어떠한 교회입니까?  인간들 눈에는 살아있는 교회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보인 것은(계 3:1),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살전 5:19-20).  사실 우리는 고린도교회로부터 배워야 하고 오늘날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피터 루이스의 글을 인용해 “만일 개혁주의와 은사운동의 최선의 요소들의 결함이 잠재적 폭탄이라면 부흥은 그것에 불을 불이는 성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카리스마주의에 속한 사람들과 중단론자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존중한다면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확장이 될 것이지만 웨인 그루뎀이 말한 것처럼 이 두 진영이 서로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대로 만약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결국 같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갈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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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성령을 믿는 것과 성령을 만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누구나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그분을 만나는 것은 아닌 거와 같습니다(요 5:37-38).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심하게 논쟁하는 부분은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성령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높여야 할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논쟁하는 이유는 아마도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현상이 나타날 때 항상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한 부류는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지만 다른 한 부류는 성령의 역사를 악령의 역사라고 쉽게 판단해서 말합니다.  그러면 만약 오순절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교회가 공동묘지처럼 쥐 죽은 듯이 잠잠할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아마도 인간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이때에는 분명히 교회에 논쟁이 생기고 충격을 받고 갈등이 일어날 것입니다(행 2:6-8, 12).

 

물론 사탄도 성령의 역사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며(고후 11:14),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6:12, 계 12:9).  그리고 엄청난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합니다(살후 2:9-10).  마치 애굽 바로의 왕의 술객들처럼 말입니다(출 7-8장).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이나 16장에 나오는 점치는 여자처럼 사람들을 심히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라파엘 개슨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강신술을 심취했던 사람으로 자신의 저서매력적인 모조품(The Challenging Counterfeit)에서 “사단은 극히 교묘한 방법으로 귀한 성령의 은사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 거짓으로 모방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적, 치유, 방언, 방언통역, 영분별, 예언의 은사까지 사탄에 의해 교묘하게 모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 뒤에 나타나는 열매입니다(눅 6:44).  예를 들어 알콜 중독자이며 아내를 때리고 자녀들에게 온갖 더러운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어떤 계기를 통해 집회 기간 동안 말씀을 듣다가 아니면 기도를 받다가 쓰러져 몸을 떠는 체험을 했는데 집회가 끝나고 난후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아내를 때리지도 않고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면 무엇인가 달라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쓰러지는 것이나 몸을 떠는 현상만을 보고 쉽게 귀신의 역사라고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그 뒤에 나타나는 열매입니다(마 7:16).  그리고 기억할 것은 악령은 다른 것들은 다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는 모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갈 5:22-23).

 

◈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 있을 때 항상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무질서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의 깨달음 속에 신음하고 아파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성령의 강력한 능력아래 신음하거나 쓰러지거나 몸의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고꾸라지는 현상들에 대해 “이러한 현상들이 부흥에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부흥이 있는 곳마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30년간 섬겨왔던 20세기 서구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쳤던 정통복음주의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저서신앙 감정론(Works)에서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인간적인 것인지 반드시 분별하는 것은 말할 것이 없겠지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시 영적 대각성을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사람들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일어나는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설사 그 현상이 우리들 눈에 거슬리고 낯선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먼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가?  두 번째, 죄를 미워하고 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가?  세 번째,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는 결과를 낳는가?  네 번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가?”(마 7:15-20).

 

이렇듯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눈에 가려졌던 영적인 세계가 열립니다(엡 1:17-18).  그래서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행 2:17).  구약성경에는 소수의 예언자들이 있었고 예언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거의 예언을 하지 않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성령은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예언과 환상과 꿈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믿는 자들게만 주어진 엄청난 은혜이며 특권입니다(고전 12:7).  그러나 이렇게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해서 다른 지체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하여 높은데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와 사역들은 역할과 강도가 다를 뿐이지 모든 것은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롬 12:6, 고전 1:29).

 

◈ 한편 여기서 ‘예언’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격려의 말로서 개인이나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 전달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기 위해 전해주는 말이 예언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4:3).  그러나 사람들이 예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으면 성경이 계속 쓰여 지는 것이 아니냐며 이것을 “직통계시”라고 해서 이단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오해를 해도 대단히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성경의 계시와 전혀 다르고 그 범주가 다릅니다.  오늘날 주어지는 이 예언의 말씀은 “현재의 말씀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한 특별한 방향 계시 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나처럼 오늘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언은 신뢰적인 측면에서도 성경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의 그릇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사람의 성품에 따라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고전 13:9).  예를 들면 마음에 깊은 상처나 쓴 뿌리를 치유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예언사역을 할 때 치유 받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예언과 함께 같이 묻어서 나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위로하고 덕을 세워주기보다는 상처를 주거나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예언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약 1:17).  그래서 성경은 반드시 예언을 분변하라고 말하며(고전 14:29), 그 주어진 예언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해야 하고(요일 4:1), 좋은 것은 취하되 멸시치는 말아야 합니다(살전 5:20-21).

 

그러나 성경은 이와 달리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입니다(딤후 3:16-17).  영감이란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을 통해 주어지지만 초자연적인 보호를 입어 혼탁함이나 오류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딤후 3:16).  성경의 원본에 적힌 글은 하나님의 의도한 뜻을 정확히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은 시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신뢰성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은 영원한 진리로서 모든 상황에 다 적용한다는 것입니다(계 22:18-19).  다시 말해서 1세기에 성경 기록은 마감되었지만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약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 14:1).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예언사역이 성령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구약성경에서 꿈과 환상은 주로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정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민 12:6).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신약에 와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행 2:17).  하지만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꿈과 환상을 비웃으며 사람들에게 그런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성경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을 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성경이 수중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열등한 수단을 사용하실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예를 든다면 먼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꿈들 중에 하나는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마리아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입니다(마 1:18-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이사야 7장14절만 상기시켜주시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꿈을 통해 그분의 뜻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의 살인적인 진노로부터 어떻게 보호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13).  이때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본문인 호세아 11장1절 말씀을 가지고 계셨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행 11:1-10).  이 환상은 앞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고 환상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아모스에 기록된 성경말씀 9장11-12절을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요약하자면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욥 33:13-18).  이렇듯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지만 사람들이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요 10:27).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예언과 환상과 꿈을 불필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령의 초자역적인 역사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에게 속아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믿지 못하도록 마음에 의심을 주는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요 8:44).  다른 하나는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방언을 하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다른 예로 자기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다가 주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으면 그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기적을 빼놓으면 성경은 그냥 평범한 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요 20:31-31).  오직 그분에게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행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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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믿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요8:44-47).  사실 이렇게 어중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토하여 내치게 될 것입니다(계 3:15-16).  예수님은 신앙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한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한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이 말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좇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사탄을 좇아가는 추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바로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고(엡 4:30), 성령을 소멸케 할 수도 있으며(살전 5:19), 심지어 성령을 거스릴 수도 있습니다(행 7:51).  그러나 이러한 죄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죄들입니다(요일 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도 모르게 연약하여 성령을 거스리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함으로 성령을 근심시킬 수는 있겠지만(사 63:10),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할 때 성령을 근심시킨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마 26:69-75).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고(눅 22:31-32), 그는 회개하고 귀한 종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행 2:14-42).  사도 바울도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라고 고백했습니다(딤전 1:13).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용서해 주시고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셨던 것이었습니다(행 9:15).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면(사 1:18), 그 죄가 무슨 죄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엡 1:7, 요일 1:1:9).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로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마 12:31).

 

◈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훼방(모독)하는 죄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먼저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롬 2:5), 만약 이 견해대로 라면 지금도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다 성령훼방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소스톰은 이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죄로서 그분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하여 마귀의 역사로 매도한 것이라고 합니다(눅 12:10).  또한 루터교파의 학자들은 성령훼방 죄는 중생은 했지만 신앙을 도중에 버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의 동역자 데마나(몬 24절),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가(눅 6:12-16), 주님을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기에(딤후 4:10, 요 18:1-3), 이에 해당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견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다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교리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롬 8:38-39, 요 6:39, 엡 1:13-14, 벧전 1:4-5).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라(요 5:24), 그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요 10:29),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 6:4-6, 10:26-2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1-2).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를 성경본문에서 찾는다면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마 12:22-37).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예수님을 향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마 12:28).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마 12:24),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합니다(마 9:3-4).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루이스 벌콥은 이 문제에 대하여 그것은 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삼상 2:6-7).  그러면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호와를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훼방 죄에 대한 중요한 해답의 열쇠를 바리새인들이 말한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마 12:2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는데 살 수 있을지 블레셋 도시 중 하나인 에그론에 가서 바알세붑 신에게 묻기 위하여 사람을 보냅니다(왕하 1:2).  그때 엘리야가 사신을 만나서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서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느냐고 하면서 네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파리의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파리의 신이 병을 치료한다고 믿었고 블레셋 사람들도 쥐나 파리 같은 신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왕하 1:4-6, 16).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치시면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파리의 귀신에게 부탁해서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참으로 대단하고 무서운 반역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왜냐하면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회개가 될지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만약 회개가 된다면 사함을 받을 수 있을 덴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구속사역 즉,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들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말씀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들입니다(요 3:10).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요 3:2, 막 2:1-12), 실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구원받은 것처럼 행세하거나 자신이 성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행 9장),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갈 1:13-14, 빌 3:5-6).  바로 이런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가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히 6:4-7).

 

그렇다면 또 하나 이러한 죄를 범한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하지만 반면에 “인자를 거역하며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마 12:32).  이 말은 ‘인자’가 ‘성령’보다 지위가 낮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에 그분의 메시야 신분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앞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베드로나 바울이 주님을 거역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인자를 거역하는 말과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것을 실제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의지하여 그분 앞에 겸손하고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함 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행 4:1-22).  그들의 생각에 진리는 자기들의 생각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눈앞에서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도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단이요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합니다(눅 11:14-23).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 죄를 짓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믿고 있고 분명히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데도 시기심이나 교만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단정해 버리고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마 12:34-37).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과 제자 요한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분노에 가까운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막 9:38).  왜냐하면 귀신 쫓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마 10:1).  사실 요한이 품은 이런 배타적인 마음이 오늘날 교회 속에 분파주의로 나타나기 쉬운 마음입니다.  아무튼 요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야!”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시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9).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막 9:40).  이 말씀의 의미는 설사 주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면 그들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아침마다 물 떠놓고 서낭당 귀신에게 정성스럽게 빌어서 병이 낫든지 아니면 무당에게 돈을 투자해서 굿을 해든지 혹은 무속종교를 통해 병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난다고 합시다.  물론 이들도 얼마든지 그들이 믿는 신으로 병 고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을 사용하고 의지해서 병을 고쳤느냐는 것입니다(행 4:10).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귀신의 이름들을 사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귀신의 역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마 1:21).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한 역사를 귀신들이 행하는 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지만 무조건 자신들이 가지고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요 8:15).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은 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신앙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상태가 좋고 은혜가 하다면 누구에게라도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요한처럼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편이 아닌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분명히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인 마술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행 19:13-16),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는 이상 성령의 힘입어 기적을 행하면 그 사람은 주님을 반대하는 자는 아닐 것입니다(눅 11:23).   만약 이러한 사람을 귀신의 역사라고 치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것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 귀신들인데, 믿는 자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을 믿는 자들끼리 서로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집단을 놓고 이단이니 귀신의 역사니 떠들어 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종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롬 14:4).  그러기 때문에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마 12:36-37).  오늘날 인간들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주님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는데 인간들이 진짜니 가짜니 판단하고 입으로 떠들어 되니 말입니다(잠 18:21).  누군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령의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속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입으로 모독하는 죄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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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오늘날도 존재하는가?  (0) 201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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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4불짜리 지폐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4불짜리 지폐를 만든 적이 없고 그런 지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00불짜리 위조지폐가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가게마다 100불짜리 지폐를 식별하는 작은 기계를 가져다가 돈을 받을 때마다 검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왜 100불짜리 위조지폐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진짜 100불짜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100불짜리 진짜 돈이 없다면 100불짜리 위조지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은 오늘날 거짓 사도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사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진짜 사도가 없다면 가짜인 거짓 사도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쓴 신약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도에게는 특징과 표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하나님의 사역자들 중에 사도는 아니지만 이러한 특징과 표징을 소유할 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사도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특징과 표징을 가지지 않고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 등급이나 서열에 관계없이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누구에게든 해당하는 어떤 일반적인 특별한 특징들과 표징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특징이나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며 의심해 봐야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도적인 직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사람에 의해 확증되는 것을 성경으로 통해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1-2절에 보면 다섯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선지자이거나 교사입니다.  여기서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니라 교사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환상과 계시를 가진 자인데 성경에서 바나바가 환상과 계시를 받았거나 가졌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민 12:6).  반면에 바울은 선지자이며 교사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신약성경의 거의반 정도를 기록했기 때문에 선지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갈 1:11-12).  그리고 그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엡 3:3).  이것은 이때까지 이들 사역의 범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선지자겸 교사이고 바나바는 교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역의 범위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들 두 사람은 성령께서 그들을 따로 세워 보낼 때까지 아직 사도적인 직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구절에 보면 두 사람이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3:2-3).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행 14:14).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함으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기초를 놓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엡 1:4).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안수와 예언을 통해 사도적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확증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금 더 성경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내가 지금 부르는(I am calling) 일을 위하여 따로 세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킨(I have called)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3:2).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두 사람에게 그들의 사도적 사역의 부르심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과거시제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안디옥 교회에서 사람들을 통한 안수는 단지 하나님께서 이미 두 사람의 삶에 계획해 놓으신 사도적 부르심에 대한 단순한 확증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것을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란 사람들에 의해 소명을 받고 사역의 직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전도사와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담한 문제는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전도사의 말에 의하면 교회 담임목사는 기도해 보니까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고 말하고 신학교 교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니 반드시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본인 생각은 어떠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아직은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 불안한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에게 지금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무엇라고 책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주변사람들이 의견을 참조만 할뿐이지 중요한 것은 주의 길을 가는 본인에게 성령의 정확한 부르심이 없으면 마음에 목회자의 소명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안수하고 예언해 주는 것을 통해 그들을 사역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사도적 직임의 또 다른 특징은 우선적으로 사도는 말씀의 설교자이며 가르치는 교사라는 것입니다(눅 24:45-48).  성경에 보면 바울은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거나 처음으로 세우심을 받은 사도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설교자(전파하는 자, 혹은 선포자)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딤전 2:7, 딤후 1:11).  이것은 바울이 최우선적으로 복음의 설교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행 9:15).  이것은 사도의 주된 사역이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이지 교회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두 성경 구절에서 바울은 사도의 주된 사역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설교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도적 직임과 관련하여 “영적 권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참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은 교회를 지배하거나 다스린다는 생각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도의 직임이 대단한 것처럼 다른 모든 직임들 보다 높이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에서조차 사도들은 모든 교회를 다스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들이 세웠던 교회들조차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사도가 지역교회에서 목사의 직임보다 더 높은 직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목사들과 다른 사역자들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동안에 오직 교회에 대해 영적인 감독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교회나 다른 어떤 교회도 감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단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독권을 이양해 주었습니다(행 20:28).  그리고 그가 떠난 후에 교회가 질문을 해오면 그것에 대해 대답을 해주었고 바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을 뿐 그들을 조종하거나 지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가 배워야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면 새로 부임한 목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조용히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는 않고 곁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그때부터 교회가 심한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10:32).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을 주시고 산 것이지 원로목사나 새로 부임해온 목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사도의 표징들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사도는 아니지만 이러한 표징들을 소유할 수 있겠지만 만약 사도로서 이러한 표징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사도의 고난당함입니다(고전 4:9-13, 고후 4:7-12).  이 고난당하는 목적은 고린도후서 4장7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사도들의 고난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하고 박해받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들의 약함을 보이셨습니다(고후 6:3-10).  

 

이것은 어느 누구도 “질그릇”인 그들을 신뢰하지 않고 그 질그릇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오해 받는 것과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위대함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놀라운 능력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사도들이 단지 인간이고 나약한 사람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고후 12:9-10).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따르면 고난과 박해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도를 생각하기란 불가능합니다(고후 11:23-33).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교회 내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말, 참 사도로서 고난의 흔적이 없다면 사도라는 말을 삼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갈 6:17).  왜냐하면 성경에서 반은 죽을 정도로 고난 받지 않는 사도는 없기 때문입니다(고후 1:8-9).  

 

두 번째 표징은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는 특별한 통찰력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엡 3:1-6)과 경건의 비밀(딤전 3:16), 그리고 이스라엘 회심에 대한 비밀(롬 11:25-32)을 보는 거룩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가 사람들에게는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환상들을 보고 계시를 들었습니다(고후 12:1-4, 7).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들을 보는 통찰력은 사도들에게만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의 비밀들을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3:5).  그리고 세 번째 표징은 사도들의 흠 없는 성결성입니다(고후 1:12, 2:17, 4:2).  물론 다른 사람들도 사도는 아니지만 흠 없는 성결성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성결함에 있어 흠이 있는 사도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까?(고후 7:2).  

 

네 번째 표징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표적과 기사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것임을 사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눅 24:49, 행 1:8).  이것은 열두 명(행 2:43, 5:12)과 이후에 나온 사도들의 사역에도 가득했습니다(행 14:3, 15:12, 롬 15:19, 고후 12:12).  다시 말해서 표적과 기사는 사도 사역의 표징이지만 스데반과 빌립도 그러한 사역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은 사도들에게만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행 6:8, 8:6).  마지막으로 사도의 권위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귀신과 모든 질병에 대한 권위가 주어졌습니다(마 10:1, 막 3:15, 6:7, 눅 9:1).  그러나 이 권위도 사도들에게만 유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칠십 인을 보내실 때 그 권위가 그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눅 10:19).  그리고 마가복음 9장38-41절에 언급된 익명의 사람도 분명히 귀신들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만일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사역에서 위에 열거한 사도적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직임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이상의 것들이 참된 사도들의 표징이었다면 오늘날도 초대교회처럼 거짓 사도들이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사실 무언가 거짓된 것이 있다는 것은 진정한 사도적 직임이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실제이며 참된 것만을 위조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1:13-15).  이외에 거짓 사도와 참 사도를 분별하는 한 가지 매우 단순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참된 사도는 건전한 성경적 기초, 즉 하나님의 말씀 위에 주님의 새 일들을 개척해 나가고 세워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있으며 비성경적인 가르침으로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합니다(엡 2:20).  반면에 거짓 사도는 분열, 분쟁,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허물어뜨리고 어지럽게 만듭니다(계 2:2).  

 

고든 린지는 참된 사도 사역에 대해 자신의 책Apostles, Prophets and Government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도적 사역에 겸손함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임을 공적으로 선포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행하는 역사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역의 직임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도 사도의 사역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도적 직임은 크게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림으로써 권위와 위치로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사도의 사역을 행하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인정받게 됨을 그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1950년대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날 우리를 위해 이것을 쓴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참된 사도는 다른 사역의 은사들 위에 군림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사도는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검증된 다른 복음 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복종시킬 것입니다(갈 2:1-2).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갈 1:17).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는 적어도 17년 동안이나 사역에 몸담아 오고 있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갈 1:18, 2:1).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바울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사 후보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역의 초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전파한 것에 대해 여전히 명성 있고 잘 세워진 복음의 사역자들과 의논하였다는 것입니다(갈 2:2).  만일 바울이 자신이 받은 계시를 검증받고자 사역자들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일 어떠한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 말씀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판단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사역을 판단해야 합니다(고전 14:29).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계시나 사역이 판단받기를 원해야 합니다(요일 4:1).  만약에 판단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와 사역이 판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시가 올바르고 성경적으로 건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사역에 오래 몸담아 옴으로 이미 많은 경험을 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나누었던 이유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환상과 계시를 받았다고 나에게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한 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그가 받은 계시를 듣고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하자 그는 하나님은 자신에게 정확한 계시를 주었다고 주장하며 성경으로 검증받는 것에 대해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으로 판단 받지 않거나 검증 받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사탄의 속임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고후 11:14).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가 하나님께로 왔다고 주장했지만 그때 아주 단호하게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속아서 미혹당한 것이라고 권면하고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짜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받은 계시나 환상에 대해서 검증을 받기를 아주 싫어합니다(요일 4:1).  

 

◈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은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6).  이 말씀은 분명히 다른 사람뿐 아니라 사도에게도 적용되는 말로서 열매가 없는 사도는 사도로 하나님께 세움을 받거나 능력을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빌 해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중사역자로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있고 그 사역을 위한 훈련을 받은 다음 과연 사역의 열매가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존 에카르트는 “자신에게 그런 은사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사도라면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 은사가 분명히 보일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당신에게 주어진 그 은혜를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사도적인 권위는 분명히 그들의 열매로 입증이 된다는 것입니다(마 7:20).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을 ‘은사중단론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1세기 교회 가운데 주어졌던 영적인 은사들은 사도시대가 끝나고 신약 성경이 완성된 시점에서 그 사용이 중단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중단된 은사의 목록은 은사중단론을 지지하는 학파에 따라 다양하지만 사도와 선지자는 은사이건 직임이건 간에 여러 중단 목록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컨티넨탈 신학교의 조지 뱃슨 교수는 “사도를 속사도시대의 직임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문용어로 보는 편이 낫다 이런 견해로 볼 때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권위의 ‘사도전승’은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말하며 오순절 신학자 라인훌프 교수는 “오늘날 사도적 사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나 '사도직함'은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초대교회의 근간을 이룬 사도직임은 종료되었지만 사도의 은사는 주님의 몸된 교회 위에 여전히 계속 부어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도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논쟁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폐일언하고 성경에 거짓 사도가 있다는 것은(고후 11:13-14), 하나님이 세우신 참 사도가 있다는 것입니다(롬 11:13).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분명히 사도를 세웠기 때문입니다(고전 12:28).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사도니 늙은 사도니 이런 명칭이 문제가 아니라 사도로서의 표징과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위에 열거한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칭 사도’일 수밖에 없습니다(계 2:2).  왜냐하면 열매가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마 7:15-18).  그러므로 오늘날 사도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엡 4:11-12).  그러나 사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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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좋은 글들이 수북이 쌓인 블로그나 인터넷 크리스천 신문에 들어가서 글을 읽을 때에 너무나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학적으로 잘 해석한 글들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평신도이면서도 오히려 목회자들보다 더 성경적으로 글을 쓰거나 성경을 잘 해석하는 사람들을 볼 때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자기 틀에 맞지 않는다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에 대해 공격하는 글을 쓰는 것을 볼 때 그리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1-2).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만일 여러분들 중에 달라스 신학교의 어느 교수에게서 천년왕국(계 20:4-6절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천 년간의 통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어본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인 어느 교수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을 때 아마도 그는 자신을 “무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도 역시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 양측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발견한 교리가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전혀 갖지 않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보내면 분명히 그 사람은 무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동일한 사람을 달라스 신학교로 보낸다면 그는 전천년주의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과 신앙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러한 법칙에는 예외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신학적 전통과 우리의 스승들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것과 믿는 것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들은 성경 그 자체보다도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요즘 한창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단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이것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이 제외되고 다른 직임만이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들을 제하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엡 4:11).  그러기에 그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서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다른 하나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헬라어로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그 성도들이 사역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며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 줍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됩니까?  바로 뒷 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합니다(엡 4:13).  이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8-12).

 

다시 말해서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몸이기에 항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4:13, 벧전 2:2).  우리들 중에 다 자라난 사람들이 있습니까?  육신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자라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벧후 3:18).  그러기에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령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 4:15-16).

 

◈ 성경에 보면 사도에 대해서 네 가지 서열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도라는 단어를 놓고 서열이나 등급이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렇듯 사도에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라고 해서 다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기초를 놓은 열두 사도와 바나바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이나 바나바, 혹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같은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지만 초대교회 기초를 세운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에 서열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견해들이 정립이 되지 않아서 서로 자신들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도의 첫 번째 서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히 3:1).  여기서 ‘사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소식을 전하는 자, 혹은 보내심을 받은 자, 또는 위임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머리 위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엡 1:22-23, 골 1:18), 예수님은 자신의 초기 사역에서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막 1:38), 소식을 전한 자(사 61:1), 그리고 위임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눅 4:18-19).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눅 8:1).

 

그리고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실 때 자신을 선지자라고 부르셨고(마 13:57, 눅 4:24, 요 4:44,, 행 7:37), 또한 그 분은 복음 전도자의 직임에 계셨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21, 눅 19:10).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목사이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고(요 10:11, 히 13:20, 벧전 2:25), 또한 교사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주된 내용 중 하나가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마 5:1-2, 9:35, 막 1:21-22).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한량없이 성령을 가지셨기 때문에(요 3:34),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가장 높은 서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골 1:15-18).

 

두 번째 서열은 어린양의 사도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계 21:14), 이 어린양의 사도는 오직 열두 명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두 번째 서열의 사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사도들의 첫 번째 자격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사역을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이어야만 합니다(행 1:21).  그리고 두 번째 자격은 예수님의 지상사역 하시는 동안 그분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로서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행 1:22).  이러한 자격을 가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신약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사용된 사람들입니다(엡 2:20).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했을 때 사도들은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맛디아를 유다의 대신할 자로 뽑았습니다(행 1:26).  어떤 사람들은 맛디아가 아니라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린양의 사도로서 자격이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사역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주님이 지상에 계실 적에 중생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도 아닙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났습니다(행 9장, 고전 15:8).  그러므로 어린양의 사도들은 맛디아를 뽑으므로 끝났지만 또 다른 사도의 직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를 포함해서 20명 정도는 나오기 때문입니다.

 

◈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계열입니다.  이 서열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그들 역시 신약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기에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사도와 선지자들을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복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엡 3:3-5).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성도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오늘날 교회의 기초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갈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뭔가를 더할 수도 없고 뭔가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계 22:18-19).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 또는 권위와 같은 서열, 또는 같은 정도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든지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서열인 다른 사도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사도의 자격이 나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실 바나바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성경은 그를 사도라고 부릅니다(행 14:14).  여기서 말하는 ‘사도’란 신약의 기초를 놓은 두 번째 서열과 세 번째 서열인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토대적인 사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서열의 사도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의 사도는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라는 단어는 지금보다 초대교회 시대에 더 넓게 사용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말을 많이 쓰지 않기에 사도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불편해 하고 거부감을 가지고 심하게 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도’라는 헬라어는 앞서 말했듯이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의 “아포스돌로스”로부터 번역된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2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사자’로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해 말합니다.  여기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아포스돌로스”입니다.  지금 바울은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십중팔구 우리가 오늘날 사도에 대해 생각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도의 직임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라는 말을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대리자(delegate)로서 또는 대표자(representative)로서, 또는 회중의 대표로 위임 받아(commissioned representative of a congregation)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초대교회에 있었지만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아니었고 신약성경의 기초를 놓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표자 회의나 모임에 한 사람을 대표로 보냈듯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에바브로디도는 단순히 사역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보냄 받은 사도”, “사자”(messenger), 또는 “대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적 직임의 완전한 활동범위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그가 바울처럼 교회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없고 어떤 교회를 향한 특정한 사도적 사역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러기에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행 13:1-3), 만일 어떤 목사가 한 도시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도시에 파송된 모든 목사들이 다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다른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 사역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한 가지가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바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행 13-20장).  오늘날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자로서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시작하고 세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사도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교사는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직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떤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네 번째 서열의 사도 사역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호칭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 2:4), 참된 사도의 표징은 삶의 열매가 있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표징들이 없다면 그는 사도 직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겸손함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자들은 없지만 네 번째 서열의 사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사도적 직임으로 어느 정도 사역을 해오고 있는 사역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종교적으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예를 든다면 예루살렘에서 터를 잡아놓고 목회를 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증거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을 때 많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주님을 귀신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고(마 12:22-32),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막 3:30).  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독설스럽게 정죄하고 비난했을까요?(약 3:14-16).  그것은 이제까지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본적이 없고 자신들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역사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면 무조건 마귀의 운동이라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도 능력과 표적을 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살후 2:9-10).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이나 16장에 나오는 점치는 여자처럼 백성들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자신만을 나타내며 사단을 힘입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입니다(고후 11:13-15).  성령을 모시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이 사탄의 궤계라는 것쯤은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후 2:11).  왜냐하면 성령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별적인 능력을 행사할 것과 시험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4:1, 눅 12:57, 히 5:14).  하지만 조심할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사역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눅 11:14-20).  그 이유는 마지막 날 그분과 일대일 면담할 시간에 우리가 입으로 뿌린 것들을 거두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12:34-37, 갈 6:7).  그러기에 교법사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행 5:34-39).

 

◈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맛디아(행 1:26), 바울(롬 1:1), 바나바(행 14:14), 디모데와 실라(살전 2:6), 주의 형제 야고보(갈 1:19, 2:9)와 같은 사람들을 추가함은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추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기념되는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고(계 21:14),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도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서열에 속해 있는 사도들은 교회가 세워지는 토대에 관한 그 이상의 어떤 계시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은 초자연적일 것이며 평범한 것을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역의 은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은 오늘날도 사람들을 사용해 초자연적인 역사와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행 4:30, 5:12, 6:8, 8:6).  이렇듯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는 것은 구원의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과 높임을 받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눅 16:15).  성경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고(고전 3:21), 구원받은 인간이 평생을 높이고 자랑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빌 3:3, 벧전 4:11).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이러한 성경적 직임과 그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건전한 사역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온전한 범위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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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