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책인 성경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실 것이 예언의 형태로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사야는 처녀가 잉대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예언했습니다(9;6).  예레미야는 때가 되어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터인데 그는 여호와 우리의 의로 불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3:5-6).  미가도 유다족속 중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을 예언하면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했습니다(5:2).  이처럼 실제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기록된 구약성경 가운데도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에 따라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것이 기록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계획에 포함된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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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그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7:48)와 영원한 심판권, 즉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5:22, 27).  둘째, 예수님의 통찰력은 그의 신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지고 사람의 속마음을 미리 알았고 장래 일어날 사건을 예견하였습니다(2:24-25).  즉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성품(1:47)과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4:18)를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16:21), 가룟 유다의 배반( 26:21),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26:34)에 관하여 미리 알고  예언하였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살리는 영’(고전 15:45)이시란 것이 곧 그분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든 후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2:7).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결과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고(5:2),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살리려고 예수님을 보냈습니다(2:14).  하나님은 아들 예수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였고(5:26),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요일 5:11-12).  넷째, 예수님께서 진리시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14:6).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했고(17:9),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3:10).  그러므로 세상에 어떤 사람도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라고 주장했습니다(14:6).  진리는 한 분뿐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이것은 그분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불변성또한 그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13:8).  피조된 만물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변합니다.  인간은 물론 강산도 십 년이면 변합니다.  인생관이나 세계관도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3:14).  즉 불변성은 하나님께만 속한 특성입니다.  따라서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속성은 그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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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이란 직접적인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육신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서 여러 차례 강조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성경 가운데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3:16),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8:3),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4:4),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7),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등의 표현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성육신이란 직접적인 표현은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 차례 강조하는 분명한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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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16:19).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5-56).  누가 정죄하리요 죽을 실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4).  말씀들은 하나님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알기 쉽게 인간적으로 묘사한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 anthropomorphic) 표현들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며( 4:24, 딤전 6:16), 하나님의 오른 혹은 왼편의 구분도 불가능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문자적 의미에서 오른편과 왼편이 있다면 이것은 공간적 측면에서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닌 유한한 하나님이 것입니다( 139:7-1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공간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우편 자리에 계신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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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12:4).

죄를 죽이는 일은 죄를 완전히 도말하거나 근절시키고 파괴시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힘을 밝휘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죄를 죽이는 삶은 그런 목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목표를 완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진실로 죄를 완전히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마음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것을 억제하는 것뿐이다. 

 

죄를 죽인다는 의미

사람은 죄를 죽여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다시는 유혹하지 않도록 영원히 잠잠히 있어 주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로 우리는 죄에 대해 괄목할만한 승리를 거두고 엄청난 성공과 함께 죄를 거의 계속해서 죽일 수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죽이고 제거하는 일은 이 땅의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3:12).  그는 훌륭한 사도였고 성도들의 모범이었으며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그는 심지어 다른 성도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말하기까지 했다(3:15).  그렇지만 그도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썼던 자였다.  그는 여전히 우리처럼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씻김을 받아야 하는 더러워진 몸을 가진 자였다(3:21).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몸으로 온전치 않는 것이 오히려 유익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우리를 위해 최선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2:10).

 

죄를 숨기려는 것은 위선이다.

죄를 죽인다는 것이 죄를 감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외형적으로 죄의 행동을 포기하는 외식자를 보고 우리는 그를 변화된 사람으로 칭송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는 이전의 죄에다 저주스러운 위선 죄를 덧붙인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보다 훨씬 지옥의 문에 더 가까워진 셈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새로운 마음보다 더욱 교활한 마음이 자리잡게 된다.


차분한 품성이 죄를 죽였다는 증거는 아니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침착하고 고요한 성품을 더욱 함양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들 중에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혈질적인 기질이나 참을 수 없는 격정 등이 없이 고요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품을 계속 훈련을 통해 계발하고 단점들을 고쳐 나간다면 비록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불경한 것들이 내재해 있을지라도 겉으로는 타인들이 보기에 죄를 극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또 개중에는 일생동안 화를 거의 내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심지어 그는 한번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사람보다 오히려 때때로 화를 내는 사람이 죄를 죽이는 삶을 더욱 잘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성적으로 나쁜 기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마치 그 기질을 죽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분명한 외식이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자신 속에 있는 불신, 시기, 또는 그밖에 영적인 죄를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마술사 시몬은 잠시 자신의 일을 청산하고 떠났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탐심과 야심이 계속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그런 그에게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8:23)라고 지적했다.  당신이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불의의 행위를 버렸다 할지라도 여전히 당신 마음속에는 이전처럼 정욕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정욕의 물줄기를 잠시 딴 곳으로 전환시켰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다른 형태로 위력을 발휘하며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특정한 형태의 정욕을 분별하고 그것의 분출을 막이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정욕의 습관에 굴북하게 된다.  그는 퍼져 가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는 동안 타락한 죄의 기질은 그의 육체에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여러가지 형태로 죄가 전환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은혜에서 떠난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죄의 전환은 인간의 생활 방식, 관심, 관계, 그리고 계획에 영향을 받아 여러 형태를 취한다.

세월이 가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신체의 변화도 전환되어 나타나는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든 사람은 젊었을 때의 졍욕을 가지고 있지만 확실히 그 때처럼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이가 들면서 정욕의 형태가 바뀌는 것도 일종의 죄의 전환이다.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세속적인 사람에서 교만한 삶을 살거나, 바리새적인 삶 대신에 외설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자신이 특정한 죄의 형태를 피했다고 다른 모든 죄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주인을 바꾸었을 뿐 여전히 죄의 종이다.

 

순간적으로 죄를 이기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죄를 이겼다고 죄를 죽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죄와 싸우고 그 싸움을 통해 자신이 죄를 이겼다고 쉽게 착각한다.

첫째 상황은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보고 극도의 슬픔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가 깨지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이 그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염려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가 되면 그는 자신을 일깨우고 죄와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을 위해 울부짖는다.  또한 자신의 정욕을 증오하고 그것과 싸우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처럼 사람이 깨어 있을 때 죄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죽은 것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고린도교회의 죄상을 보면 그들이 처음에 얼마나 일치단결해서 죄를 무너뜨리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후 7:11).  사람도 이와 같다.  정욕이 틈새를 통해 양심에 침범해 죄를 짓도록 만들 때 사람은 죄를 물리치려고 분노와 두려움, 복수심, 그리고 세심함을 가지고 죄와 대항하게 된다.  그러면 죄는 잠시 몸을 낮추어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야단법석이 사라질 때 이 도둑 같은 죄는 다시 살아나서 이전처럼 활동을 개시한다.   

둘째는 재난과 고통의 압박, 그리고 심판을 받는 상황이 올 때 그런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경우이다.  이 때 당사자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동을 한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다시 화평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로 벌을 받는 일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래서 분노를 피하기 위해 그는 죄와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더 이상 죄가 자신 속에 발을 내딛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더 이상 죄에 자신이 종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 때 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 영혼이 죄와 대적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의 도구로 사용되던 그의 기능들이 일시적으로 다시 회복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앞의 다짐들이 사라지게 되면 죄는 다시 등장하여 이전의 활력을 되찾는다.  시편 7832-37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확실히 시편78편의 이들은 처음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진실된 마음으로 죄를 죽이려고 했었을 것이다.  이것은 돌이켜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기억하라! 

주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죄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처음에 그들은 열심과 성의를 다해 주님께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는 죽지 않았다(78:36-37).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수치스런 모습은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거짓됨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가련한 영혼들은 자신들을 계속적으로 속인다.  그래서 자신들 속에 죄가 강력하게 살아 있고 틈만 나면 자신들을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의 정욕을 죽였다고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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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진리의 성령 2018. 2. 9. 13:31

성령의 내주사역과 달리 능력사역은 신약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오늘날과 동일하게 성령이 사람에게 임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9-11, 삼상 10:1-11, 11:16-17, 24-29).  특히 민수기 11장에 나오는 말씀은 사도행전에 기술된 내용과 매우 흡사합니다.  성령이 개인에게 임하여 능력으로 무장시키고 그 증거로 초자연적인 예언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능력사역은 내주사역과 전혀 다른 것으로 신구약에서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이 사역을 했으면 하는 소원을 표출했지만 구약시대에는 이 사역에 제한이 있었고 선택된 소수만 이 사역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 사역이 가능한 때가 온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요엘서에 잘 나와 있는데,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2:28-29).  오순절 날 베드로가 이 말씀이 성취됐음을 선포합니다( 2:16-18).  이제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는 것 그리고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과 환상과 꿈은 주님의 자녀로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의 능력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같은 예수님을 믿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똑같이 주님을 믿는데 한사람은 영혼만 구원받고 육체는 질병으로 시달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건강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시는지요?  온 몸에 온갖 질병을 다 가지고 살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우울증, 디스크, 신경통, 당뇨병, 위장병, 중풍병, 심장병, 갑상선 암, 등등 여러 가지 질병들이 우리 것이라면 주님이 채찍에 맞을 필요은 없을 것입니다( 53:5).  어떤 사람은 이사야서 535절 말씀을 오직 영혼구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약성경에 기록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8:17)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도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2:24).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통해 구원이란 개념이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가는 영혼구원에 머물러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소조)이란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에서의 고침과 귀신에게서 자유함을 얻는 구원을 말합니다(9:21, 8:36, 2:8).  즉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23:25, 7:15)와 감정( 147:3, 61:1-3)과 영( 3:22, 14:4)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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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적에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주님을 시험하는 자(8:11), 외식하는 자(6:30) 등이 주로 예수님에게 이적을 요구했고, 주님께서는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했습니다(12:38-39).  또한 사단에게 근거한 이적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요일 4:1-3).  그것은 이적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한 계시를 보여 주거나 덕스러운 일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이적인지를 생각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20:31).  더 나아가 이적이 적그리스도의 표징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살후 2:3, 9, 13:13).  따라서 이적을 대할 때 이적 자체만 볼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진리의 계시인 성경 말씀과 합치하는지를 세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고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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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成肉身)이란 한자어를 풀이하면 살을 가진 몸을 이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2:6-8).  즉 성육신은 성경의 증거대로 말씀/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아들( 1:14)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몸에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가리킵니다(2:7).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내용이며( 1:21), 기독교만이 인간 구원을 가능케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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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를 예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파송된 큰 무리에게 잡히시고(26:47), 대제사장 앞에 서셨을 때,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했습니다(26:46).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벧전 3:22)라고 증거하였고, ‘네가 네 원수로 네 발등사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다윗의 시편 1101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했습니다(2:35-36).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증거했습니다(1:20).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영안(靈眼)으로 이 사실을 목격했고(7:55-56),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요한도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22:1).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천여 년 전에 다윗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자신과 사도 및 초대교회 성도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음을 일관되게 증언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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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중에 서울에서 중형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는 예장합동 목사와 지방 대도시에서 대형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예장통합 목사가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면 주로 가족과 목회에 대한 이야기, 혹은 감명깊게 읽은 책과 오늘날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민감한 주제(은사)를 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들 목사로부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가 은사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심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충성스럽게 사역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이구동성 말을 합니다.  사실 이들을 통해서 하나 깨달은 것은 중대형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목회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들 중에 목회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허구헌날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운데 이단 사냥질만을 업()으로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적인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영혼이 메마르거나 병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에 비위가 상하는 목회자들이 있겠지만, 전도사 때부터 개척을 시작해서 목사가 되어 두 번의 교회개척을 통해 20년 넘게 사역을 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못지 않게 구멍(?)가계 수준의 목회가 어떠한지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오랜 기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다른 목회자에 대해 판단하거나 비판적인 일에 몰두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목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부정적이고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입만 열면 남의 허물을 찾아내려고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동원하는 가운데 사악한 궤변을 통해 상대방을 매장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이런 목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구멍가계 수준의 목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확신컨대 오늘날 이단사냥질 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목회에 충실한 목회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거의 밑바닥을 기고 있거나 몇 명, 혹은 몇 십명 놓고 자신이 무슨 대단한 목사인 것처럼 설교 같지 않는 설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교 원고를 가지고 앵무새같이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마담 수준의 이야기로 양들을 호도하는 수준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목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 목사로 생각하는 순진한 양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양을 맡길 때는 형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목사에게 맡기기 보다는 모세처럼 입이 뻣뻣해 말에 능하지 못하더라도 맡겨진 양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복음에 열정적으로 생명을 거는 목자에게 맡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은 늘 살기가 등등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있던 사람들을 빼내어 다윗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사울 왕은 하라는 목회는 안하고 허구헌 날 사단의 충동질 받아 다윗을 비롯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죽이려고 날뛰다가 비참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반면 다윗은 하나님을 늘 두려워 하는 가운데 적은 수의 백성들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돌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주의 종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4:4).  그런데 오늘날 이단사냥질을 하는 사람들은 먹이를 만난 더러운 Hyena처럼 교회를 하나로 화합하기 보다는 논쟁과 분열, 인신공격과 덕스럽지 못한 비방을 통해 난타전을 벌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궁금한 것은 광견병에 걸린 미친 개처럼 날뛰는 이 사람들에게 누가 이단사냥질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사이비 이단제조자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이비 기질을 가진 사람의 전형적 사고방식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획일화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반영하는 구성원적(3:11), 인종적(5:9), 은사적(고전 12:12-27), 다양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기질을 가진 사람은 의견의 다양성시각의 다양성’, 그리고 경험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때문에 공장에서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듯 앞뒤가 꽉 막힌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무식하게 우겨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흑백 논리가 강합니다.  이런 사람은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을 자신이 배운 신학 안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자의적 해석합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옳고 그른 측면이나 요소가 혼재(混在)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항상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억지주장을 내세웁니다.  셋째, 개인적 나르시즘을 강화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세뇌시키는 가운데 이를 통해 자기 생각속에 그릇된 자부심을 고취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피해의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만이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을 가진 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단 사냥질을 일삼는 무경험자들(성경에도 없는 권사 직분을 가진 사람과 조폭처럼 겁박하는 목사)의 글을 읽어보면 참으로 한심할 때 한 두번이 아닌데, 이들은 흑백 논리가 강해서 자신은 정통이고 상대방은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특히 John Wesley를 이단으로 매도한 바른믿음의 정이철이라는 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데, African wild dog의 습성을 가진 것처럼 닥치는대로 물고 늘어지는 좋지 못한 동물의 기질을 가졌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물론 본인 스스로가 다른 목회자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그 배후가 귀신에게 순간순간 충동질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분의 신학과 신앙이 많이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이유는 이미 고인된 목회자들(옥함흠, 하영조, Peter Wagner등등)의 신앙을 뒷담화 치기 때문입니다.  왜 살아있을 때 맛짱 토론을 벌이지 못하고 이들이 죽고 난 뒤에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인 것처럼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영이 비틀어져 있고 중증 환자와 같은 병든 신학을 가지고 천방지축 날뛰는 이 분이 이단 사냥질을 하든 이단 제조자이든 상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뒤에서만 물고 늘어지지 말고 정식적으로 박영돈 교수와 김세윤 교수에게 정중하게 공개토론을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개() 훈련사의 말에 의하면 겁이 많은 똥개일수록 집에서는 잘 짖어대는데 막상 싸움에 있어 꼬리를 내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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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들인

나는 그분께 마음의 집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지저분한 마음의 서재를 깨끗이 치워 주셨고,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했던 주방을

하나님의 양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아늑한 거실은 그리스도와 대화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재능과 기술,

작업실에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게 되었고,

모임, 교재 활동과 여흥들인 오락실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즐길 있는 침실에는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나는 나의 존재와 모든 소유인 집문서를 그분께 맡겼습니다.

그날. 그분은 삶을 받으시고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이보다 좋은 방도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릴 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하시고,

삶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이제 영원토록 나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은 나의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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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근거한 이적이 있는 반면 사단에게 근거를 둔 이적도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에서도 애굽의 술사들이나(7:11-22), 엔돌의 신접한 여인(삼상 28:9-12) 등이 인간이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져 오면 사단은 더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믿는 자라도 유혹하려 할 것입니다(13:22).  따라서 성도들은 영적인 눈을 떠서 이적의 근원이 과연 하나님인지 사단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요일 4:1).  이를 분별치 못하고 사단의 이적을 보고 미혹된다면 그 사람은 사단과 더블어 영원히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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