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8.01.31 낮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들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가?
  2. 2018.01.30 승귀의 신분을 찾으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세 번째 사역은 무엇인가?
  3. 2018.01.27 죄를 죽이는 삶과 영적은혜의 상관관계
  4. 2018.01.26 성령세례와 충만
  5. 2018.01.25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성경에 기록된 것 밖에 없는가?
  6. 2018.01.24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사실을 믿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7. 2018.01.23 그리스도께서 왜 낮아지셨는가?
  8. 2018.01.20 예언사역의 남용
  9. 2018.01.19 기도하려면 거룩한 삶을 살라
  10. 2018.01.18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란 증거가 되는가?
  11. 2018.01.17 그리스도 외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없는가?
  12. 2018.01.16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신분을 가지셨는가?
  13. 2018.01.13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14. 2018.01.12 성경을 통해서
  15. 2018.01.11 예수님의 호칭 가운데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16. 2018.01.10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직후 살아난 성도들도 그 후 승천하였는가?
  17. 2018.01.09 신분이란 과연 무엇인가?
  18. 2018.01.06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19. 2018.01.05 미신과 신앙
  20. 2018.01.04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안 사람들이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21. 2018.01.03 오늘날 목사는 중보자가 아닌가?
  22. 2018.01.02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 사람들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가?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로 구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가지를 덧붙여 여섯 가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즉 일반적인 구분에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成肉身/ 1:14)과 율법의 제정자이신( 5:22),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복종( 4:5),  그리고 수난 받으심( 8:20, 5:7, 26:39, 9:22, 고후 5:21)  사망( 19:33-34)과 장사되심이 포함됩니다( 6:4-6).  여기에다 지옥에 내려가심을 덧붙여 여섯 가지로 구분하는 자들도 있으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단지 삼일 동안 사망의 권세 아래 머무르셨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4:9, 벧전 3:18-19, 벧전 4:6).  본래 하나님이셨던 제 2위 성자께서 자기를 낮추시되 죽어 장사 지내기까지 낮아지신 것은 우리 인간 구원을 위해 얼마나 크신 사랑을 베푸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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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1:25),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는(2:6), 잠시 보류해 두셨던 제 2위 하나님으로 신분을 회복하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높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역을 단계적으로 행하십니다.  부활(2:24), 승천(1:11),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3:1), 재림(26:64)이 바로 이러한 단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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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88:1-2).

우리가 죄를 죽이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죄를 죽이는 삶은 은혜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신분상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죽이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결과

첫째, 죄는 영혼을 약하게 만들고 그 힘을 빼앗는다.  다윗이 잠시 마음속의 욕정을 이기지 못했을 때 그의 욕정은 그의 뼈를 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적 힘을 앗아가 버렸다.  그 결과 그는 병들고, 약하고, 상처 입은 나약한 자가 되었음을 고백했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38:3).  내가 피곤하여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38:8).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그 정욕은 영혼을 삼키고 영혼의 기운을 빼앗아 약하게 만든다.

둘째, 죄는 우리의 마음을 희미하게 하고 무력화시킨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필요한 영적 틀에서 마음을 떼어놓는다.  죄는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사랑을 내쫓고 죄를 짓도록 부추키고(요일 2:15, 3:17), 영혼에게 다른 것을 사모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영혼은 하나님께 똑바로 진실하게 주님은 나의 기업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셋째, 죄는 영혼의 생각을 죄에 대한 나쁜 생각으로 채운다.  보통 영혼은 생각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양분을 얻는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죄를 죽이지 않게 되면 우리의 생각들이 오히려 육체를 위한 공급원이 되어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들이 육체를 윤택하게 하고 육체를 만족시킨다.  실로 죄로 인해 우리의 생각들이 더러운 추한 상상력을 위해 사용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순간에 다른 것을 연구하며 일하거나 이니면 허황된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넷째, 죄는 영혼을 어둡게 만든다.  죄는 영혼 위에 드리워져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의 광채를 차단하는 빽빽한 구름이다.  그것은 우리의 양자됨의 특권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영혼들이 위로의 생각들로 자양분을 받으려는 순간 죄는 재빨리 그 생각들을 흩어뜨린다.

 

죄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희생과 경계

죄를 죽이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더욱 번성할 수 있도록 때때로 은혜의 가지를 자른다.  영적인 삶의 생명과 기운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나무가 얼마나 활력을 갖고 번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이 정원에 귀중한 화초를 심고 땅을 일구었지만 주위에 있는 잡초를 방치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화초는 여전히 살아 있었도 시들어져서 쓸모었게 된다.  그래서 화초를 감상하려면 그것을 찾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때때로 그것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화초는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화초가 비슷한 토양에 심겨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당신이 주위에 해로운 것들과 잡초를 제거해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화초는 확실히 번성하며 자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성령의 은혜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실 성령의 은혜는 죄를 죽이는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은혜들은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3:2).  그래서 그것들은 시들어 썩어간다.  그러한 마음 밭은 게으른 농부의 밭처럼 잡초로 무성해서 그 곳에서 좋은 알곡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이런 사람은 믿음, 사랑, 그리고 열심을 자기 속에서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것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진배없는 은혜들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죄를 죽임으로써 마음 밭을 정결하게 하고 장욕의 잡초들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해서 뿌리를 뽑았다고 하자.  그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나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되면 속의 은혜들은 각자의 역활을 수행하여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받게 된다.  죄를 죽이지 않는다면 신실할 수가 없다.  죄를 죽이는 사람만이 가장 확실한 신실함의 증거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신실함은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커다란 기초가 된다.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영혼이 자아와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 싸움에서 신실함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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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교재 28과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세례의 바른 의미에 대해, 성령 받은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개인적인 결단과 적용의 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이러한 이해가 가져다주는 실천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존 스토트 목사의  『성령세례와 충만』은 28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저자는 성령 세례와 충만,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는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갖는 실천적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 하고픈 훈련생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바른 이해를 돕기를 원하는 인도자들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다.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네 가지 서론적인 요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는 성경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으로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성령은 직접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후에 성령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셔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울의 경우 양쪽을 다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 안에 거하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는 것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바울의 생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이라는 이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성령의 선물과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는 자들은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두 가지가 같다고 보며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에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또는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그룹은 2장의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 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이렇게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세례가 단회적인 선물을 말한다면, 성령의 충만은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서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다 살펴보면, 첫째, 이 동사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둘째, 이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이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그 분의 충만함을 누리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그 분에게 무조건 맡기는 것이다.  넷째,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형으로 된 명령은 단회적인 행동을 가리키고, 현재형의 명령은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익어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737-39절에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님께로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목마르다, 오다, 마시다, 믿다)은 모두 현재형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와야 하고 계속해서 마셔야 한다.  성령 충만에 관한 신약성경의 두 번째 본문은 충만에 대한 명령도 담고 있지만 무엇 보다고 성령 충만의 증거를 강조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가장 주된 증거는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충만의 결과들을 묘사한 유일한 본문은 에베소서 518-21절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도덕적인 자질들이다. 

 

이러한 성령의 세례와 충만의 구별에 대한 반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죄나 불신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처럼 비영적인또는 육에 속한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다.  두 번째 반론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독특한 성령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서 잊어서는 안 될 세 가지는 첫째, 이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경험들이 실상은 심리적인 것이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이나 영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  셋째, 어떤 또 다른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마귀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심리적인 것도 아닌, 그리고 회심의 경험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경험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도 깊은 경험들이다.  이러한 경험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할 수 없고, 성령은 때로는 그리고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일하시기도 하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열거하는 이 아홉 가지 특질들은 세 개씩 묶어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둘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셋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가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질 중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진리는 성령의 열매는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원에만 의지해서 자연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가리키고,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께 반응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특질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충만한 내주하심의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깊이 역사하시는 진정한 증거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나 굉장한 표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적 특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음 진리는 이러한 특질들이 성령의 열매라고 묘사된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의 초자연적인 기원과 자연적인 성장을 둘 다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연적 성화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기 원한다면 제대로 된 밭에 제대로 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거둔다는 말인가?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된다.  사도가 사용하는 이 열매의 비유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교훈이 있다.  성령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영혼에 즉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심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많은 시간을, 아주 오랜 시간을 사용하셔서 이 생명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키우신다.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열매 맺는 일에서 더 적극적으로 성령과 협력하게 되고, 좋은 결실을 수확하기 위해 우리가 심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공적, 개인적 경건의 삶의 습관을 위해 자신을 더 훈련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와 관련 적용할 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과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는 육체의 토양에서 이러한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 둘 다 필요하다.  둘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성장이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며,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 둘 다를 위한 훈련된 습관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성숙의 과정이 점진적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들도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영적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 창조, 즉 교회의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 받은 자녀들에게만 영적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영적은사이며, 몸의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은사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는 것들도 있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 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또는 믿음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기적이란 그 정의상 비범함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일하시는 방법에서 창의적으로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며 그분에게 어떤 것은 하실 수 있고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은사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그 분배 역시 다양하며, 은사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무런 은사도 받지 못하고 간과되거나 뒤로 처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많은 지역 교회들은 회중이 평신도 지도력이 은사를 갖추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무것도 시도하려 하지 않고 또 그나마 겨우 시도되는 것들을 목회자가 손에 꼭 움켜쥐고 통제하려고 하는데 대한 전형적인 변명이다.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첫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카리스마타카리스를 부여하는 것인데, 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다.  둘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은사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 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  영적은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다.  인간의 몸의 기관은 기능을 담당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그들의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이다.  모든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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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이적들도 많이 행하셨습니다(20:30).  그런데 오직 이것만을 기록한 것은 이것만으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마 14:25-33), 구원의 주 그리스도란 사실을 분명히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0:31).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 기사를 단순히 신기하고 놀라운 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신성과 은혜로운 구원 계획을 깨닫고(14:11), 이러한 신적 사역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 그리스도에 대해 진정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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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마다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계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재 대언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는 분이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처소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차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처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할 것이므로 반드시 이에 합당한 거룩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장차 재림하실 것이므로 재림을 소망하며,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전파함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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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존귀함을 버리시고( 2:6-8),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낮아지신 것( 2:14)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20:28).  이처럼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킴을 통하여 인간 구원을 성취하셨으므로( 19:30), 기독교는 철저한 희생의 종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므로 모범을 보이셨던 겸손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벧전 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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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치유사역을 시작할 때에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8살 정도의 어린 딸을 데리고 집회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자신의 딸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 정상인과 다르게 척추가 S자로 휘어지고 틀어져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에게 무서운 병으로 통하는 척추측만증’(scoliosis)이라고 알려주면서 고침 받기를 원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 젊은 부부의 심정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처럼 간절하고 애절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딸이 건강하게 고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빌립보서 25절의 말씀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긍휼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여야 하는데(14:14), 이제 시작하는 초짜가 무슨 대단한 치유사역자가 된 것처럼 느닷없이 사람들 앞에서 그 젊은 부부를 향하여 죄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얼굴 색이 달라지면서 꼭 나에게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딸의 병을 고침 받으러 왔지, 당신에게 죄를 지적받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날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지만 젊은 부부의 어린 딸은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의 일이지만 그때 당시 치유사역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한 가운데서 나의 육적인 본성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미명 아래 영적사역을 남용했던 사건입니다.    

 

Montanus가 개인이 받은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자신의 해석한 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을 일삼는 소견머리가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들 못지 않게 예언사역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남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예언( 13:2)이나 성경해석을 가지고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받은 것 같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발언과 책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왕상 22:5-28).  사실 하나님께서 어떤 영적 활동을 허락하시거나 장려하게 되면 모든 사역자는 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하는 성령충만한 사역자이든 아니면 메마른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목회자이든 혹은 예언을 하는 사역자이거나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역자이든지 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본성적으로 이런 기회를 남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합법적인 성령의 은사들을 이용해 사역을 남용하는 일을 바로 잡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고전 12-14, 12:3-13, 4:7-16).  문제는 예언사역자들 중에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들었던 그 음성을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가운데(고전 14:29),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공개적으로 죄를 언급하는 예언사역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언자들이 그렇게 행했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5:1-16)과 박수 엘루마의 죄를 언급하면서(13:4-12), 사람들 앞에서 죄를 지적합니다.  사실 범죄한 장로들은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하고(딤전 5:20), 고린도교회와 같이 음행 죄를 치리할 때에는 공개적으로 해야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고전 5:1-13).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특별한 경우에만 신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했지 일반적으로는 죄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설득했습니다(18:15-17).  즉 장로가 범죄한 경우에 교회는 확고한 증거를 가진 두 세 사람이 증거하지 않는 한 그 장로에 대한 고발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딤전 5:19), 예언사역자는 자신이 받은 개인적인 계시를 근거로 하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죄가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물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 일을 감당할 정도로 성숙하고 신뢰성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사역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특별한 죄가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죄를 언급하기를  원하시는지 먼저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사역은 신자를 돕는데 있기 때문(고전 14:3)에 죄 가운데 있는 형제의 죄를 은밀하게 다루는 가운데서 이들이 회개하기 전이나 후에도 그것을 비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예언사역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9:1, 삼상 10:18)이나성령이 말씀하시길’( 21:11)이라는 표현을 첫 머리에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들은 음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하며 정당화 하려는 남들이 갖지 못한 기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메시지를 전단했을 때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을 들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거나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 외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언사역에 대한 시끄러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해 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남용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성경을 남용할 경우도 있지만 만일 이런 주장을 택할 경우 남용할 대상이 오직 성경 하나에 국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골치 아픈 환상이나( 10:9-23), 주관적인 꿈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23:13-28).  그러나 이러한 정리된 접근방식을 선택할 때의 문제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communication을 닮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37).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 특히 예언사역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의존하다 보면 특별한 함정(물질, 이성, 신비주의, 이단, 사이비 교주될 가능성)에 빠질 수 있고, 받은 예언의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크게 사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촌의 박태선처럼 타락할 가능성이 그만큼 클 수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처음 시작과 달리 예언, 혹은 치유사역을 하면 할수록 돈에 길들여질 경우 발람(벧후 2:15-16)이나 가룟유다( 26:14-16)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더 어긋날 경우 심지어 교인들을 부자로 만든다는 미명하에 주식과 부동산 시장, 그리고 경제에 관한 예언을 하기도 하는데( 23:16-17), 그러면 귀중한 예언사역은 점치는 것에 불과하고 그 황당한 예언은 우연히 맞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음성)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의 경제적인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시고(고전 14:3),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부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44:21).  이런 예언을 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5:31).  사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분별해 내는 것이고(고전 12:10), 무엇보다도 사역자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높은데 마음을 품고 방심하면 이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고전 10:12).  참으로 미스테리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예언사역을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 두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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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실의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열심히 기도할

살아있는 말씀과 

승리의 삶의 주인공이 있다.

흔히 거룩한 삶을 살려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가 더욱 중요하다.

, 기도하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누구며

거룩한 곳에 자가 누군고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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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이적을 원하시는데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하나의 분명한 증거입니다(14:22-33).  왜냐하면 자연법칙을 잠시 보류하거나 일시적으로 바꾸는 것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막 11:12-14, 20).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풍부한 이적 기사들을 보면서(8:5-13, 7:11-17, 6:1-15),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만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신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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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들리워 갔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5:24).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11:5).  엘리야 역시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왕하 2:11).  그것을 목격하고도 믿지 못하던 선지자의 생도들이 오십 명의 용사들을 시켜 사흘을 찾았으나 엘리야를 찾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문자 그대로 승천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한번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6:23, 9:27).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죽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악한 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참된 믿음을 기쁘게 여겨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변화된 몸으로 데려가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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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신분을 가지셨습니다.  곧 인간으로서의 신분과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낮아지신 신분 즉, 비하(卑下)의 신분(4:4-5)과 높아지신 신분 즉, 승귀(昇貴)의 신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0:1, 1:20).  원래 만물을 창조하시고( 1:3), 우주를 통치하시며( 17:2), 율법을 제정하신 제2위 하나님께서( 5:21-48), 피조물인 인간이 되어 행하신 일들은( 2:9), 그 자신을 낮추신 것으로 비하의 신분을 지니고 행하신 일입니다( 2:6-11).  그러나 낮아지신 상태에 계속 머무르지 않으시고 원래 하나님으로서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부활하신 이후의 일들은( 28), 그 자신을 다시 높이신 것으로 승귀의 신분을 지니고 행하신 일입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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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11:19).

실제로 죄를 죽이는 일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다.  성령을 배제한 모든 방법과 수단들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성령만이 이 사역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원천이다.  성령은 자신의 기뻐하는 뜻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죄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완악하고 교만하고 반항하며 불신적인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죄를 죽이는 사역에 속한다.  실로 이런 일은 성령에 이해서만 가능하며 다른 방법은 실패한다(11:19, 57:17-18).

둘째, 우리가 죄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15:5).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사를 베풀고 그것을 더욱 넘치도록 하며 효율적으로 적용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성령을 통해서만 성도 안에 들어와 역사하신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5:31).

그러면 성도는 죄를 어떻게 이기는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죄를 이기도록 우리에게 그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2:33).  Tertullian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은 성취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여러 군데에서 약속하셨다. 

 

성령이 죄를 어떻게 죽이는가?

첫째,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써 죄를 이기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멸매를 서로 대조시켰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는 서로 다른 차원이다(5:19-23).  그런데 이 두 열매가 우리 안에 넘치도록 함께 공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과연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함께 거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으로써일어난다는 것이다(5:25).  즉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풍성한 은혜에 따라서 행할 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강도로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야말로 죄를 이기는 가장 위대한 방법이다.  성령은 육체의 열매들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활동을 무너뜨리고 그것들을 대적하게 하여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라나고 성장하도록 역사하신다. 

둘째, 성령은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여 죄의 뿌리와 습관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고 제거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성령을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라고 말씀한다(4:4).  성령은 돌 같은 우리 마음을 전능한 능력으로 없애주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하실 때 강도를 점점 높여 실행하신다.  실로 성령은 정욕의 근원을 소멸시키는 불이다.

셋째, 성령은 믿음으로 성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져다 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고난에 동참케 한다(8:17).

 

죄를 죽이는 것이 오직 성령의 사역이라면 왜 성경은 인간인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권면하는가?  하나님의 성령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성령에게 맡기는 것이 옳지 않는가?

첫째, 성령의 사역 방식은 우리 안에 은혜를 주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로 선행을 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는 분이다(2:13).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한다(26:12).  또한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살후 1:11, 2:12).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간구의 영이기도 하다(8:26, 12:10).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 모든 일을 하라고 권면하신다.

둘째,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이기도록 역사하실 때 죄를 이기는 행위를 여전히 우리의 순종의 행동으로 간주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받기에 적합할 때만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역사하신다.  순종을 위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지혜, 의지 , 양심, 그리고 감정을 우리의 인품에 따라 사용하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협력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를 꺽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를 도아주시는 방식은 우리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어 태만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이길 수 없다.

실로 여기서 가련한 영혼들이 끊임없이 어리석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다.  죄를 자각하지만 그 죄를 대항할 힘이 없는 이 가련한 영혼들은 죄를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방법들(맹세, 계율, 금식, 고행)과 의무(전통)들을 지어내어 자신들을 속박으로 얽어맨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헛된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의 싸움은 승리 없는 싸움이며, 평화 없는 전쟁이다.  실로 이들의 삶은 항상 노예와 같다.

율법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만다.  때때로 이들은 죄를 이겼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죄의 실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실상 이들은 단순히 죄의 겉 먼지만 털어낼 뿐이다.  두려움, 슬픔, 그리고 고뇌들을 일부러 외면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죽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결국 죄를 죽이겠다는 그들의 열기는 곧 식어지고 다시 죄와 대면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이 이미 죽였다고 생각했던 육체의 욕심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채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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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두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미 많은 메시지와 명령을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이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과 길을

당신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분이 명확하게 말씀하시면

당신은 진리에 따라

당신을 조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께 순종할 때,

당신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당신을 통해서 성취시키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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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호칭 는 만물의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의미합니다(2:11, 고전 2:3).  그리고 예수님의 호칭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바로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2위이신 성자(聖子)임을 의미합니다(1:23-24).  또한 예수님의 호칭 로고스는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존재하였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동참한 하나님이란 것을 나타냅니다(1:1).  그 외에도 예수님에게 적용된 하나님이란 직접적인 명칭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임마누엘등의 명칭도 예수님께서 하나님되심을 나타냅니다(2:6, 1:23).  이처럼 성경은 너무나 여러번 하나님께 사용된 명칭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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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증거했습니다( 27:52-53).  여기서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니라 회생(回生)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도 전에 죽은 성도가 먼저 부활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죽은 성도의 부활이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살전 4:16).  따라서 육의 몸으로 회생한 성도들이 승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느니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죽어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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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란 어떤 존재가 출신 배경이나 소속 집단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등을 통해 얻어지는 사회적 지위나 자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출신 배경에 따라서는 과거 귀족이나 서민 신분이 있었고, 소속 집단에 따라서는 군인과 공무원, 그리고 학생 신분 등이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서는 원고와 피고 신분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 대해 알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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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12:3), 간혹 그리스도인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구절은 생각하면(요일 4:19),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1:17).  그러나 Peter Wagner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는 주고 또 다른 지체에게는 주지 않는 그런 의미의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이유는 만약 사랑이 은사라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6-8, 고린도전서 12:8-10, 29-30, 에베소서 411절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에 이것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덴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다음 바로 뒤이어 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더욱 큰 은사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에 이어 13장에 사랑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을더 큰 은사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말한 은사가 단수가 아니라 은사들’, 즉 복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절에서 강조한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더 큰’(meijon)이란 동일한 단어를 145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크고 더 유익한 은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더 크다라는 개념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제한규정에 지배받는 개념으로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은사의 목적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도록 권면한 다음 하반절에서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더 큰 은사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제일 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rit』에서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최고의 은사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성령의 최고의 열매인 사랑을 제쳐놓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사랑을제일 좋은 길로 제시한 것이다. 사랑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한 은사가 아니라 그 중요성 면에서 이런저런 카리스마를 전적으로 앞서는 총괄적으로 감싸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의도는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보면 모든 신자의 삶을 특징지어주게 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하는데 있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바울은 은사 면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한 제일 좋은 길을 사랑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7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미 이상적 혼합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는데 있어 은사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무질서했던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혼란스러운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고전 3:3).  이들의 문제는 은사가 아닌 열매에 있었습니다.  즉 열매가 없는 은사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J. I. Packer는 이 문제를 가지고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인식해야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퓨리탄 학자 John Owen이 말한 대로 은혜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참된 신지식이 가져오는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 5:22-23)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면서 전자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도 은혜는 거의 가지지 못할 수 있는데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와 같이 진정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은혜는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삶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Packer의 말을 요약하면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 사랑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은사에 관한 구절과 열매에 관한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물론이고, 로마서 126-8절의 은사 목록 다음 구절에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고 있고( 12:9-10), 에베소서 4장의 경우에도 16절에서 은사의 목록이 마쳐지고 그 다음 구절부터 열매의 대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2절에 가서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49절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강조합니다.  즉 모든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에 기초를 두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Charles Stanley 역시 고린도전서를 주해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있어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아무 유익이 없듯이(고전 13:1-3), 만약 교회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공기가 빠진 타이어와 같아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불행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영적은사를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을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15:16),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헌신은 그 열매를 통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7:19).  이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역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벧후 1:8), 만약 어떤 사역자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5:22-23),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은사는 무언가 잘못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적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논한 13장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졌지만(4:12),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고전 13:2).  즉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사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1:17).  이처럼 사랑이 은사를 행하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은사보다 더 귀한제일 좋은 길로 바울은 제시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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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들은 미신을 믿는다고 한다.

그들은 경기를 잘 하려는 뜻에서

온갖 이상한 행위를 다 한다고 한다.

어떤 선수는 외야에서 뛰어들어 올 때

행운을 빈다는 뜻에서 2루를 꼭 밟고 들어온다고 한다.


또 어떤 감독은 팀이 연속적으로 패배를 당하고 있을 때엔

이를 막는다는 뜻에서 팀의 버스 뒤좌석에 앉는다고 한다.

이밖에도 야구계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미신적인 행위는

스트라이크를 두 번째로 받은 다음엔 야구 방망이를 바꾸지 않기,

승리를 연속적으로 하고 있을 때엔 

야구복을 새것으로 바꾸어 입지 않기,

홈루를 야구 방망이로 세 번 두들리기,

그리고 파울 선을 밟지 않는다는 것 등이 있다.

 

1920년 대의 뉴용 양키팀의 투수 레프티 오도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파울 선을 밟았다고 반드시 경기에 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그 선을 밟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알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어디엔가 있다면

그는 이 힘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자기 심중 깊이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과연 이러한 미신들은 해가 되지 않는 의식일까?

어떤 사람은 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알 수 없는 힘을

믿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재수나 행운을 바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참 신앙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의 생활 중에 나타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C. 에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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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그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하여 주님을 따르도록 연결시켜 주었습니다(1:29).  이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1:40).  안드레 역시 바로 당일에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메시야를 만났노라고 말한 후 그를 예수님에게 데려 갔습니다(1:40-42).  그 다음날 예수님은 빌립을 초청하였고(1:43), 다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사람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1:45).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1:49).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안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자기 혼자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이 사실을 널리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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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중보자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목사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4:16).  왜냐하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3:22-24).  그러나 목사는 중보자는 아니지만 그 직임상 중보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일을 합니다( 13:17).  물론 일반 성도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목사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중보자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도들은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목사는 그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은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한 방법이며( 21:15-17), 주님이 목사에게 맡겨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5:14-15).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목자의 기도는 더 잘 들으시고 자신의 기도는 듣지 않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드리는 것이지( 18:19), 자신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5:10).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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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9:3-5).  그리스도는 자신을 박해하는 바울을 찾아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입니다( 9:15).  그후 그리스도는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 직가라는 곳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9:10).  그리스도는 밧모섬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를 상징하는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1:13).  이상과 같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그리스도는 직접 혹은 환상 중에 세상에 다시 나타나셔서 자신의 종들에게 계시하시며 굳센 신앙을 가지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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