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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15 칼빈주의 v 알미니안주의 v 웨슬리주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즉 “하나님이 완전하게 주관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모두 인정하고 믿는 반면 실제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하나를 유난하게 강조하면서 다른 하나를 심하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나 목사들은 '하나님 결정설’, ‘하나님 능력제한설’, ‘하나님 전지설’, ‘하나님 지식제한설’ 파로 나누어집니다.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가?”라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문제 역시 고전적 칼빈주의와 온건적 칼빈주의의 해석이 다르고, 웨슬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개혁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인간의 책임과 죄의 정복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개혁주의적 관점, 웨슬리주의적 관점, 루터주의적 관점, 오순절주의적 관점,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나누어집니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은 어떻게 일하시며 믿는 자의 삶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세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도 개혁주의, 오순절주의, 웨슬리주의, 은사주의, 카톨리주의가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이 구원하고자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이 얼마나 선한지 나쁜지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성격과 행위에 관계없이 자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구원할 자를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은 그분의 주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를 성령을 통해 얻고, 그분의 은혜로 끝까지 견인하는 가운데 성화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구원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의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기 위해 구원할 자들을 영원 전에 택하신것을 시작으로 해서 때가 되어 예정된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새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거룩의 온전함에 이르도록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선택받은 사람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완전하게 타락한 생활을 할 수 없고, 비록 죄의 부패한 요소가 남아 있어 때로는 방황하며 죄에 빠질수는 있지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회복되고 성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인간의 선택과 행위를 개인의 구원에 있어 결정적으로 만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는 다르지만 이들에게 있어 약점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논리적 모순이 뚜렸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창세 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받은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리라는 걸 미리 아신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누가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자인지 알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믿을 자를 선택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자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선행 은총을 주어 하나님을 믿도록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람이 그 속죄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효과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인간이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고 그 구원을 받지 못한 책임은 성령의 부르심을 끝까지 거부한 인간의 선택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칼빈주의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도의 견인’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라는 말로 인해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방종의 삶을 경계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솔직하게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도르트 회의)하였고, 지금도 이들을 사악한 이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알미니안주의가 침례교단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한 시대에 당나귀처럼 쓰임을 받았던 Billy Graham이나 평신도 설교자 D. L. Moody 같은 탁월한 사역자들을 배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더 mystery한 것은 한국에 있는 수많은 장로 교단들이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시하면서도 Graham이나 Moody를 따르는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웨슬리주의는 양쪽 진영인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사실 Wesley의 수많은 설교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의 신학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화론 중심의 구원론입니다. 그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구분하는 Calvin과 달리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자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시고(외적 부르심), 성령으로 말씀을 적용하도록 하신다고 주장하였는데(내적 부르심), 이 두 가지 일반적 소명과 유효적 소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을 강조한 Wesley는 인간의 죄 문제를 강조하는 면에 있어 어느 학파들 못지 않게 강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 영향은 온 인류에게 미쳐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보는 가운데 영아도 원죄를 물려 받은 죄인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Wesley의 신앙에 대해 감리교의 역사가 중 한 사람이며 Derbyshire, Cliff 대학 학장인 A. Skevington Wood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sols gratia(오직 은총) sola fide(오직 믿음)만의 표어가 메아리쳤다.  물론 치매(?)끼가 발동하는 사람들 중에 심각한 ‘언어장애’로 인해 Wesley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고 해서 그가 마치 인본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궤변을 늘어놓지만, 이것은 Wesley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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