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7.09.30 기적을 구할 때 주님은 기뻐하시는가?
  2. 2017.09.29 부자가 보낸 편지
  3. 2017.09.28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4. 2017.09.27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5. 2017.09.26 그리스도는 그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6. 2017.09.23 예언사역자
  7. 2017.09.22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8. 2017.09.21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치관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
  9. 2017.09.20 그리스도의 승천을 입증하는 증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10. 2017.09.19 타락하지 않은 천사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11. 2017.09.16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한 웨슬리
  12. 2017.09.15 칼빈주의 v 알미니안주의 v 웨슬리주의
  13. 2017.09.14 웨슬리 신학에 대한 서철원 교수의 망언
  14. 2017.09.13 요한 웨슬리는 이단
  15. 2017.09.12 자격 요건의 하나가 반드시 무죄한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6. 2017.09.09 은사중지론
  17. 2017.09.08 말씀하신다
  18. 2017.09.07 그리스도의 승천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19. 2017.09.06 그리스도를 맏아들이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20. 2017.09.05 자격 요건의 하나가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1. 2017.09.01 찬양과 그리스도인

Christ for all Nations의 창시자이며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는 아프리카 Lesotho에서 선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서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작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모임에서 설교할 때 사랑하는 주님이 기적들을 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시작했을 때, 곁에서 통역하던 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임재 속에 쓰러졌고 성령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눈이 떠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  Bonnke의 사역 속에서 이러한 기적들은 계속 일어났는데 그는 기적은 우리의 흥미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그분이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계약이라고 말하면서( 1:8, 18-19, 17-20), “기독교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적의 운동이며( 2:43, 3:1-10, 6:8, 8:6, 13:50-14:3, 고전 12:28-29), 신유의 기적, 구출의 기적, 변화된 삶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안다. 이러한 경이는 그분의 검증서이고 예수님이 불변하신 이상 그분의 능력과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까지 기적 행함의 은사는 교회에 남아 있다.라고 말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다른 세상 사이에 벽을 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특별히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오직 구속을 근거로만 기적을 행하신다.”

 

반면에 오늘날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B. B. Warfield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 기적들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죄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9절에 나오는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불신자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들을 수반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정말 죄가 되는가?” 그리고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고 건강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셨는데,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첫 번째 요구는( 12:38), 예수께서 마귀에 사로잡혀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직후에 나왔고( 12:22), 두 번째 요구는( 16:1),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이신 후에 나왔습니다( 15:32-39).  다시 말해 두 본문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표적을 요청받으실 때 이미 두 가지의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셨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누가 표적을 요청했느냐는 것인데, 마태복음 1238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고 164절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이들은 불신앙과 외식하는 자들이었기에 그 요청이 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려서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혹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것보다 더 인상적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기적은 없을덴데 그 이상의 표적을 또 구한다는 것 자체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불순한 의도가 마태복음 1228절에 대응하는 구절에서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고( 11:16), 표적을 구하는 두 번째 요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1, 8:11).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는지 왜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분명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있다면 이 기적만큼은 조작하거나 속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만약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면 그분이 메시야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치유 받은 눈먼 사람은 진짜로 눈먼 사람인지 혹은 그의 실명은 신체적 원인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사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에 대한 보고는 어떤 가벼운 속임수로 과장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들은 의심하거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의 속마음은 진정으로 표적을 원하지 않았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표적 보여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분에 대한 불신을 믿음이 없는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9:16, 22).  그러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에수님께서( 2:24), 그들을 꾸짖고 계신 것은 표적들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악하고 불신하는 마음에서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믿게 하신 것보다( 6:26),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적들을 행하셨던 적이 많았습니다( 8:1-3, 2:5, 10:52, 7:9, 8:48).  그러므로 만약 표적들을 소망하거나 심지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신약교회는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고.( 4:29-30), 이 기도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지진을 수반하는 표적과 기사들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며( 4:31), 사도행전의 연이어진 표적과 기사들의 흘러 넘침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12).  더 나아가 기적적인 일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방법과 올바른 이유들을 위하여 기적들을 구할 때 그분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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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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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 오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

이런 곳이 정말로 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여기는 밤도 낮도 없고,

시간 기준이 없어 세월의 감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계속되는 괴로움과 공포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여기는 처절하고도 상상을 초월한 고통과 두려움뿐입니다.

하루가 몇 날이 되는지,

이 무섭고 끔찍한 나날을 앞으로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세상에서 한 시간이 여기서는 아마 수 십 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영혼은 소스라치며 뜨거운 화염 때문에 이를 깨물고 몸을 떨고 있고,

세상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소름끼치는 참상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죽기 전에 남들처럼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들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손가락을 촛불에 넣어 보라. 고통을 참을 없을 것이다,

지옥의 불도 이처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창조나 신화가 아니듯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은 비유가 아니다.”

만약, 그 당시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했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고통과 공포가 가득 찬 이곳에

아무도 오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전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고 비웃었습니다.

교회에 다녔고, 직분도 받았고, 봉사도 많이 해서 상당히 좋은 소문이 났지만,

그런데 내 마음 깊은데서 부터 진정한 죄의 회개는 하지 못했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 친구가 내게 해준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다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거듭나지 않으면 제 신세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도 들었고,

도적질 같은 것은 하지 않아 별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하나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안타까운 절규를 마음으로 받기만 한다면

지옥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삶을 돌이켜 보고,

이 가공할만한 문제에 대하여 다시 숙고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잠깐이라도 다시 살아나서 땅에 사는 가족과 형제들에게

이곳의 비참한 상황과 무서움을 전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죽었던 날 나에 대한 호화로운 장례식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모여와서 내 업적을 칭찬하고 나의 죽음을 서러워했습니다.

실은 내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 위해 마지못해 가끔 자선을 베풀었고,

직분 때문에 헌금을 했고,

봉사나 구제할 때마다 교회에서 은연중 광고해 주길 원했고,

나보다 믿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상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잘 믿고자 하는 마음이 가끔 생기기도 했지만,

세상적인 욕심과 정욕, 그리고 재산과 사회적 지위 등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염려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이웃에 가장 모범적인 목사와 장로,

그리고 권사와 집사가

나와 같이 이곳 불 못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에 내가 보기에는 직분을 받아 잘 믿는 것 같았는데,

그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분들 가운데,

예수님 믿지 않고 성경과 담 벽을 쌓거나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생활 한다면서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결국 똑같이 비참한 운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말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영접하신 분은 쭉정이, 염소, 가라지,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온갖 불의를 행하고,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에 와서

당을 짓고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 지체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 올 가능성이 거의 백퍼센트입니다.

 

만약 지옥에 오는 것이 소망이요 꿈이면,

지금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열심히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당신도 나와 같은 신세가 되어

이곳 지옥에서 슬피 울며부득부득이를 갈며

그때잘 믿을 걸, 잘 믿을 걸하면서

영원토록 고통과 형벌 속에서 후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제발 지옥에는 오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천국으로 가세요.

그곳을 보니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서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고 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압니까?

만약, 당신이 지옥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면

죽은 후, 일분도 못되어 그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은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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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인간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인간 구원에 협조한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온전한 인간이어야 하나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3:23).  마리아가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였지( 1:20), 그녀가 의인이었기 때문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3:11).  물론 마리아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특별하게 쓰임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통로()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복 있는 여인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2:48-49).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세우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령 가나의 혼인 집에서 마리아가 떨어진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하여 응답받은 것은 중보자의 위치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한 인간의 입장에서 그리한 것입니다( 2:1-12).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문화에서 정혼한 처녀가 배우자와 상관없이 임신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대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한 마리아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나 그녀를 통하여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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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계셨다면 인간 구원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인간의 대속적 죽음이 있어야 하는데, 인류의 시조 아담의 후손은 모두 죄인이므로( 5:12),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래 하나님이셨으나( 1:1),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죄 없는 인간이며( 4:15),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1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셨으나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2:6-8), 자기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감격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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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24:51),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으신 채 승천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딤전 3:16, 행 1:9).  즉 그리스도는 영적 식별력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전 15:6),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실재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16:19), 이러한 승천의 모습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의 보증이 됩니다( 1: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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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사역자

예언사역자 2017. 9. 23. 12:02

하나님께서는 종종 인간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데( 18:1-2), 이로 인해 그분을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같이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13:16).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 않는다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인간이 과연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18-25).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시는 것입니다( 35:15, 21:33-36).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면 자신의 생각이나 평소의 행동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자신에게서 나올 때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인데(고전 14:29), 그 방법으로는 세상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성경말씀(딤후 3:15-17)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 어떠한 열매를 맺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7:15-23).  솔직히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방법들 역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즉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은 이러한 방법들을 악용한 발람처럼 자기의 욕심과 만족을 채우는데 얼마든지 남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벧후 2:15-16).

 

예를 들어 한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예언사역자들 중에 끝에 가서 타락하는 경우들을 간혹 보게 되는데, 비판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좋지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분별 없이 그 사람이 거짓예언자라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자로 한 때 쓰임을 받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 같이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103-14-16).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한 때 쓰시는 당나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고( 22:28), 하나님 손에 붙잡혀 쓰이는 도구들을 너무 신령한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경험하고도 후에 큰 낙오를 하는 선지자들이 나오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7-11)과 홍해를 가르고( 14:13-16),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었지만( 33:11), 말년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20:10-12),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광야를 떠돌다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 죽었습니다( 34:1-5).  엘리야 역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기도하여(왕상 18:36-38), 기적을 일으키는 큰 역사를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죽이러 오는 이세벨을 보고 두려워하여 도망갔던 적이 있었습니다(왕상 19:1-4).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어떤 놀라운 영적인 경험이나 체험도 믿음을 가지고 매일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신앙생활과 대체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당나귀처럼 쓰임 받는 사역자들 역시 언제든지 범죄 하기 쉬운 인간이기에 대단한 것처럼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5).

 

오늘날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들 중 가장 영적이고 신비로운 경험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고전 12:10), 문제는 이러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영적인 경험의 신비로움에 넋이 나가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여겨 Todd BentleyPaul Cain같이 하나님은 뒷전이 되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영적인 계시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더 중시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고 맡기신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 1:18)을 잘못 관리하는 악하고 탐욕스러운 사역자가 되어(벧후 2:1), 자기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이들까지도 현혹시키는 타락한 예언사역자로 전략할 것입니다( 24:24).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거룩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8:32), 무엇보다도 이러한 메시지를 받고 전하는 사역자라면 먼저 그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있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시고 그것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 안에 모든 사람들(고전 12:7)로 하여금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기를 원하고 계시지만(고전 14:3), 만에 하나 예언사역자가 이것을 빌미로 돈에 미친 발람의 길을 걷는다거나( 11), 한 때 쓰임을 받다 타락한 유다에서 온 선지자처럼 행한다면 시작은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그 끝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왕상 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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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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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패배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수많은 교회 일꾼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참된 기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실패의 원인은

은밀한 기도를 하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정말로 기도가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가?”

기도가 세상에서 최고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기도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고 믿는가?”

정말 하나님의 기도 명령에 관심이 있는가?”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여전히 효력이 있는가?”

 

사실 영적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있어서 실패들은

모두 기도의 결핍과 부족에 기인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생활할 수 없고, 올바르게 봉사할 수 없다.

얼핏 보기에 엄청나게 과장된 표현 같지만,

성경에 비추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말이 사실인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기도하는 일임을 잊지 말자!

 

그 이유는 기도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기도 중 가장 놀라운 기도를 하시기 직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론하면서 약속하셨다.

어떤 사람의 입술에서 이런 약속이 나왔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하신 이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4:12-1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약속이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겠는가?

그 어느 누가, 언제, 어디서 이런 엄청난 것을 제시한 적이 있었던가?

이 약속은 제자들뿐 아니라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케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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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가치관에서 긍정적 가치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즉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채 절망과 허무함 속에 빠져 인간에 대하여 하잖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2:7), 인간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는 사실( 2:8)을 믿는 자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참으로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43:4).  따라서 인간이 실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은 성도는 재물이나 권력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16:26),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인격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4:32).  그런데 진화론적 사고 방식에 물든 인간은 생명의 존엄성을 경시하고 물질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즉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마치 멸망받을 이성없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벧후 2: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 존중의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고 가장 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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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승천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오직 다음에 제시하는 것들과 같은 성경의 풍부한 증언들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습니다.  먼저 전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지상에 계실 때부터 스스로 여러 차례 자신이 원래 계셨던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62, 14:2, 12, 16:5).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말했습니다( 16:28).  그리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의사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역사가였던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거듭 증거했습니다( 24:50-52, 1:9-11).  한 때 기독교를 박해했던 바울 역시 그리스도께서 하늘 위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증거했습니다( 1:20, 4:10).   심지어 순교 직전 스테반조차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노라고 증거하였습니다( 7:56).  이처럼 다양한 성향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의 승천을 증언하고(딤점 3:16), 이것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 4:14)은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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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본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창조된 존재로서( 1:14),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거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될 자격은 없습니다.  그것은 천사는 인간의 혈육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순수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사는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도 아니며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천사가 중보자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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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을 향해 많은 망언들을 쏟아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뽑으라면 일본의 대표적 극우인사 하시모토 도루(はしもと とおる)가 오사카 시청에서 기자 회견을 할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총탄이 오가는 중에 정신적으로 흥분된 강자 집단에게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위안부 제도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도 알 수 있다. 왜 일본의 종군 위안부 제도만 문제가 되느냐. 위안부제도는 세계 각국이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군에게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영원히 못을 박는 막말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로 했다!  ‘표준어국어대사전’에 보면 이런 망언(妄言)을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말함”이라고 나와 있고, ‘우리말샘’이라는 개방형 사전에서는 “이치에 어긋나게 함부로 말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단어와 비슷한 말로 사용되는 ‘망발’, ‘헛소리’, ‘허튼소리’라는 말이 사전에 나옵니다.  ‘망언제조기’라고 부르는 하시모토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음대로 지껄리는 망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계열과 쌍벽을 이루는 네덜란드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했다는 신학자 입에서 망발을 쏟아낸다면 이것은 조금 문제가 다를 것입니다.   

 

믿음에 선행(先行)하는 것으로 ‘회개’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 Wesley Calvin과 대조적이지만 선행적 은총과 영화롭게 하는 은혜는 사람의 호응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역사하시는 것으로 믿었는데, 이 점으로 보아 그는 구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출발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그의 수많은 설교집에 기록되어 있듯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했고, 이러한 은혜를 언제나 그리스도의 대속과 연관시켜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성질은 선하게 만들어졌으며 만일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쉽게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창조자에 의하여 주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원죄와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 그리고 세례 등을 부정한 펠라기우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부정하는 이단으로 정죄된 펠라기우스주의와 다를 뿐 아니라 인간이 어느 때나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와도 다르게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공로나 선행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Wesley Calvin은 공통의 견해를 견지했지만, 그러나 Calvin과 차이점을 보인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작용하시느냐에서 Wesley는 의견를 달리합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Calvin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이중예정, 즉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하여 선택과 유기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오직 택자만을 위한 특별구속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그의 설교 ‘Free Grace’ 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구원하기로 정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한하는 것은 전도생활에 큰 지장과 모순을 초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구원이 수동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반율법주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에 있어 Wesley의 입장은 Calvin과 같이 하지만, 다만 그가 Calvin이 강조한 이중예정과 제한속죄를 반대하면서 구원에 있어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는 주권적이라는 점에서는 Calvin의 신학과 일치하지만, 그러나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이 Calvin처럼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점에서 Calvin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 목사들은 극단적으로 치닫는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거나 신학적 편향성을 갖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관점의 신학적 기반을 기준으로 서로 견해가 다른 각 교리적 입장의 강점과 약점을 바르게 평가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서철원 교수는 웨슬리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도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이런 망발을 쏟아냈습니다.  “신학에 관한한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이분의 노망끼 섞인 망령된 주장은 Harry G. Frankfurt가 쓴 책 제목처럼 “On Bullshit”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Wesley의 신앙을 가진 사람 모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고 이단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림 받고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이냐는 것입니다.  남침례교 신학교수 Chad Owen Brand 말을 인용한다면 “개혁주의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약간의 해석 차이를 가지고 한 집안 형제를 집 밖으로 쫓아내려는 사람”이 먼저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죄값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벤뎅이 소갈딱지 같이 앞뒤가 꽉 막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악취를 풍기는 소가 하품할 정도의 신학을 가지고 타교단 신학과 목사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개혁주의와 웨슬리 신학을 공부했지만 칼빈주의도, 웨슬리주의도 아닌 그냥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목사로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을 비방하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치고 말로가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을 다른 형제를 비판하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그 비판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 앞에서 겸손한 척 외식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와 실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없이 입으로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나팔 부는 겉과 속이 다른 박제(剝製) 신앙을 가진 개혁주의자들은 주님이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심기가 불편하고 비위가 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당사자가 망언에 대한 직접적인 공개 사과없이 바지(?)목사 정이철을 내세워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인품을 갖춘 신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갖춘 분이라면 찌를 것이 없겠지만 가지고 있는 신학이허당’이라 한국 속담에 나와 있는 말처럼 못 먹는 늙은 감 한 번 찔러 봤습니다.  앞으로 공격적인 글에 대해서는 예의와 존중과 인격을 내려 놓고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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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즉 “하나님이 완전하게 주관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모두 인정하고 믿는 반면 실제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하나를 유난하게 강조하면서 다른 하나를 심하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나 목사들은 '하나님 결정설’, ‘하나님 능력제한설’, ‘하나님 전지설’, ‘하나님 지식제한설’ 파로 나누어집니다.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가?”라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문제 역시 고전적 칼빈주의와 온건적 칼빈주의의 해석이 다르고, 웨슬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개혁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인간의 책임과 죄의 정복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개혁주의적 관점, 웨슬리주의적 관점, 루터주의적 관점, 오순절주의적 관점,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나누어집니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은 어떻게 일하시며 믿는 자의 삶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세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도 개혁주의, 오순절주의, 웨슬리주의, 은사주의, 카톨리주의가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이 구원하고자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이 얼마나 선한지 나쁜지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성격과 행위에 관계없이 자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구원할 자를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은 그분의 주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를 성령을 통해 얻고, 그분의 은혜로 끝까지 견인하는 가운데 성화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구원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의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기 위해 구원할 자들을 영원 전에 택하신것을 시작으로 해서 때가 되어 예정된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새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거룩의 온전함에 이르도록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선택받은 사람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완전하게 타락한 생활을 할 수 없고, 비록 죄의 부패한 요소가 남아 있어 때로는 방황하며 죄에 빠질수는 있지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회복되고 성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인간의 선택과 행위를 개인의 구원에 있어 결정적으로 만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는 다르지만 이들에게 있어 약점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논리적 모순이 뚜렸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창세 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받은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리라는 걸 미리 아신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누가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자인지 알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믿을 자를 선택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자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선행 은총을 주어 하나님을 믿도록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람이 그 속죄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효과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인간이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고 그 구원을 받지 못한 책임은 성령의 부르심을 끝까지 거부한 인간의 선택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칼빈주의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도의 견인’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라는 말로 인해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방종의 삶을 경계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솔직하게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도르트 회의)하였고, 지금도 이들을 사악한 이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알미니안주의가 침례교단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한 시대에 당나귀처럼 쓰임을 받았던 Billy Graham이나 평신도 설교자 D. L. Moody 같은 탁월한 사역자들을 배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더 mystery한 것은 한국에 있는 수많은 장로 교단들이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시하면서도 Graham이나 Moody를 따르는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웨슬리주의는 양쪽 진영인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사실 Wesley의 수많은 설교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의 신학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화론 중심의 구원론입니다. 그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구분하는 Calvin과 달리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자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시고(외적 부르심), 성령으로 말씀을 적용하도록 하신다고 주장하였는데(내적 부르심), 이 두 가지 일반적 소명과 유효적 소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을 강조한 Wesley는 인간의 죄 문제를 강조하는 면에 있어 어느 학파들 못지 않게 강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 영향은 온 인류에게 미쳐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보는 가운데 영아도 원죄를 물려 받은 죄인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Wesley의 신앙에 대해 감리교의 역사가 중 한 사람이며 Derbyshire, Cliff 대학 학장인 A. Skevington Wood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sols gratia(오직 은총) sola fide(오직 믿음)만의 표어가 메아리쳤다.  물론 치매(?)끼가 발동하는 사람들 중에 심각한 ‘언어장애’로 인해 Wesley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고 해서 그가 마치 인본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궤변을 늘어놓지만, 이것은 Wesley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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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박사가 정이철 목사에게 보낸 글>

요한 웨슬리는 믿음으로 칭의 받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웨슬리는 믿음은 칭의의 한 조건이고,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선행이라고 합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칭의 받으려면 먼저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고 믿기로 작정하면 성령이 중생시키신다고 말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 믿기로 작정하면 중생의 역사가 나타는데 그와 동시에 사랑의 선행을 해서 성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성화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행은혜 곧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일반은혜와 자유의지가 협력하여 성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완전성화’를 이루면 그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완전성화는 현생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또한 완전성화도 잃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완전성화는 선행을 함으로도 이루지만 또한 금욕과 금식과 고행으로 이룹니다.  그리하여 완전 성화에 도달하면 죄를 완전히 벗어나고 또 의롭게 되므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자유의지가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일반은혜와 협력하여 완전성화를 이루고 그 완전성화로 칭의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고, 받아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예정은 불가능하고 그런 예정은 하나님의 의, 사랑, 종교의 근본을 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이루셨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구원이고 신자는 그것을 내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일은 자유의지가 선행은혜와 협력해서 이룹니다.  아담의 타락, 즉 원죄는 인간의 의지에 별 영향이 없어서 일반은혜와 협력해서 구원과 칭의를 다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웨슬리의 종교사상은 자연주의 방향으로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구원은혜의 주권적인 역사는 전적으로 부정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선행을 한다고 하였는데, 웨슬리는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사역은 이루었어도,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은 전적으로 내가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사상을 요약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학에 관한한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펠라기우스를 에큐메니칼 공회의가 이단으로 정죄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점을 남겼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에 대해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의 완전성화 주장만 부정하였지, 이단으로는 정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약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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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적정한 임상 연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의사들에 의하면 노인성 우울증과 치매는 구분하기 힘들고, 치매에서 우울증은 흔하게 동반되는 증상인 동시에 우울증이 치매의 원인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이 병이 오래동안 지속되면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뇌세포가 손상되면서 기억력, 학습능력, 언어능력, 사고력, 판단력이 감소되고, 기억력의 장애와 함께 실어증과 집행기능의 장애를 수반하기 때문에 다양한 검사와 면담을 통해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문제는 일반 사람이 아닌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치매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빌리면 치매 환자의 약 40%에서 우울증이 관찰되고 지적능력이 장애가 심하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런 치매 증세가 심각한 사람들 중에 기억장애의 심화로 인해 표현 상실과 이해력 저하로 엉뚱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 말을 다시 인용한다면 치매의 증상인 인지적장애증상, 기억력장애, 언어장애, 지남력장애와 정신행동증상인 망상, 환각, 오인, 우울증, 불안증세, 성격변화의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배웠던 것을 망각하는기억력 장애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횡설수설하며 질문을 해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하는 언어장애’, 그리고 시간과 사람과 장소에 관한 파악력이 저하되어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가까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남력장애의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Wesley 신학을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고 그의 서적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거나 혹은 서너 권 정도 읽은 것을 가지고 John Wesley의 생애와 신학 전체를 안다고 나불거리는 것은 한국 속담으로 말하면 섬 무당이 사람을 잡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정말 궁금한 것은 서철원 교수가 말하대로 Wesley믿음으로 칭의 받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한 적이 있는가?” 더 나아가 “Wesley의 교리와 신학이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한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Wesley의 구원론의 가장 초기의 완성된 요약을 잘 보여주는 설교는 로마서 45절 말씀인데, 이 본문으로부터의 칭의 관한 구전 설교들의 journal에 나타난 첫 번째 기록은 1738 528일에 대한 것이고(Long Acre Street in London에서), 후기 목록들은 1742 68 Epworth에서 설교하기(그의 아버지 묘비에서) 까지 최소한 8번 이상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제목은 ‘Justification by Faith’(믿음에 의한 의롭다 하심)인데 10장이 넘는 그의 설교를 간략하게 핵심적인 것을 요약하면칭의(의인)의 성서적인 명백한 견해는 사면이요 죄의 용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화목제물 즉, 아들의 보혈로 인하여 지난날의 지은 모든 죄들을 용서함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는 그의 영혼을 희생제물로 삼으셨고 죄인들을 위해 그의 피를 부으셨습니다. 오직 단 한 번의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덟 번째 나는 Epworth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를 충분하게 강조했다.”  

 

Wesley는 칭의 교리가 성립되는 근거로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의()를 들며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는 그의 위대하고 놀라운 자비와 은혜, 그리스도에게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킨 대속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참되고도 살아 있는 믿음,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Works 361.f).  조금 더 그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Rotherham에서 설교하고 1765년 소책자로 처음 출판되었던 에베소서 28절 말씀에 근거한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성서적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에서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천명했습니다.  칭의(의인)라는 말은 용서와 같은 말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취하는 값, 즉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입니다. 다시말해 이 값(칭의의 근거)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다 쏟는데 까지 행하셨고 고통을 당하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입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성령으로 납니다.” 더 나아가 1739 429일에는 로마서 832절 말씀을 가지고 ‘Free Grace’(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란 제목으로 설교할 때도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 하나님의 은혜를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결단코 사람에게 있는 능력이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며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값이 내어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만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인 동시에 잘못된 성경해석을 막아내는 방패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데, 치매 증상이 있는 사람처럼 신학을 잘못 배우면 성경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보다는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정신행동증상의 하나인 성격변화와 망상으로 인해 쉽게 화를 내거나 남을 공격하기 위한 난폭한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논쟁만 일삼는 허접한 신학을 가지고 언제나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Wesley의 교리와 신학이 펠라기우스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 이단으로 단정해도 무리가 없다는 거의 치매 증상의 말기인 기억망각속에서 떠들어 됩니다.  솔직하게 말해 Wesley를 이단으로 매도한 서철원 교수가 한국의 신학자라고 말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 개나소가 신학자되는 판인데, 이것도 기독교계의 수치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이고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을 추종하는 정신나간 목사들이 많다는 것이 기이(奇異)한 현상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안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말할 수 없을지언정(딤전 1:15), 무지한 후배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주의를 준 것 같이 무익한 논쟁을 피하고 ‘믿는 자의 본이 되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딤전 4:13), Mentor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는 가운데 올바른 충고를 주어야 하는데, 얼마나 사탄에게 충동질을 당했으면 망령(妄靈)된 궤변을 늘어 놓아 같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논쟁이 일어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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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는 단절되게 되었음은 물론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교제하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요청되었습니다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출생한 인간은 그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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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중지론

은사중지론 2017. 9. 9. 12:22

전라도 지방의 방언인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속담이 아닌 실제 언어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말 같지 않는 말,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 비유적으로 이르는 관용구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초식 동물이 아닌 개가 풀을 뜯어 먹는다는 것은 병든 개가 아니고서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Lloyd Jones의 성령론을 불편해 하면서 그를 비성경적인 목사로 심하면 이단에 가까운 사람으로 매도하거나 폄하합니다.  솔직히 이것은 Princeton University 철학과 교수인 Harry G. Frankfurt가 쓴 책 제목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비속어인 “On Bullshit”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 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엡 4:29)에 한 마디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평신도들 앞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개나소나 신학자가 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말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르치는 밥벌이 목()사들이 많아지는 세상에 교인 하나만 생기면 자신보다 배나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23:15), 잘못 가르치는 선생들로 인해( 3:1), 현대교회가 타락할 때로 타락하고 신앙과 신학이 썩을 때로 썩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18:8).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은사중지론 자들의 생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영적은사들은 오직 사도들 시대에만 연관되어 있으며 마지막 사도인 요한과 더불어 심지어 그가 죽기 전 주후 90년경에 이미 소멸되었다고 말하면서 초대교회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허용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필요했기 때문에 예언적 계시(고전 14:26)나 꿈( 2:17), 치유( 16:18), 이적( 6:8), 방언(고전 14;2), 방언통역(고전 12:10) 등의 은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복음주의 은사 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의심하는 사악한 궤변들을 내세우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살전 5:21)보다는 무조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귀신의 장난이다”, 혹은 “무당 신내림을 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신비주의자나 정신이상자인 것처럼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극소수의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은사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못되었거나 미혹의 영에 속는다고 단언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고전 14:1), 모두가 감정적이며 영적인 도취에만 빠져 있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22:37-40),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하는 사단의 현혹(살후 1:9)과 인간 부패의 기만성( 3:9-18), 그리고 타락한 세상 가치관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요일 2:16),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분명 성경이라는 완성된 정경을 가지고는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현대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 2:1-7), 버가모 교회( 2:12-17), 두아디라 교회( 2:18-29), 사데 교회( 3:1-6),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3:14-22), 모든 면에 있어 쇠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목회자를 통해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릴 정도( 23:29)로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라면( 4:12), 반드시 초대교회처럼 무슨 변화( 2)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살전 2:13).  물론 강해설교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강해설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들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고전 4:6),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열심을 보이는 것은 칭찬할만 하지만, 문제는 진리를 전달하는 일이 삶으로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6:46-49).  최근 여론조사 자료들에 의하면 세상이 교회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닮아간다는 절망적인 통계가 나왔는데, 이것은 수준 높은 강해설교를 하거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덧입을 기회를 놓치기 때문인데, 물론 은사중지론 자들은 신앙을 사수한다는 목적 아래 “우리의 신학적인 범주들은 그런 것들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어!”라고 강조하지만, 사실 바리새인처럼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는 신학을 가지고( 23:15, 11:52), 성령께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왈가왈부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치고( 12:24-37),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3:19).  따라서 은사 중지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주님을 진정으로 닮아가는 일들을 상실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태도와 많은 허점을 가진 야바이(やばい)같은 신학 체계이고, 이런 탁상 공론적인 은사중지론에 대한 논증은 Wayne Grudem, D. A. Carson, Jack Deere, Vern Poythress, Gordon Fee, Sam Storms, R. T. Kendall 같은 신학자들 의해 호된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은사중지론 자들도 목회에 있어 성령의 존재를 남겨 놓기는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특정 한 가지 사역만을 하시는 분으로 제한되고 격하시키는데(고전 12;3), 예를 들면 성령의 주요 역할은 신자로 하여금 단지 성품에 있어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5:22-23), 이것이 비록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주장은 근시안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뿐만 아니라( 2:5), 그분이 하신( 14:12)일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2:21).

 

따라서 균형 잡힌 신앙관을 가진 목회자라면 단지 성품에 있어 예수님을 닮는 일에 만족할 수 없고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야 하며( 14:12),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적적인 역사 사이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2:4-11).  Gerald F. Hawthorn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기적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 있는 초자연적인 현시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참으로 우리가 그분의 능력 없이 그분의 성품을 지닐 수 없는 것처럼(15:5), 올바른 사역자라면 그리스도의 성품만을 닮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 사역하고자 하는 그분이 주신 내적인 열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말씀 선포사역( 5-7)과 능력 현시사역( 4:40, 5:15, 6:19, 8:26-39)에 있어 균형 있게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9:35).  물론 일부 은사 지속론적 전통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한 과도성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여기서 은사 중지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Dallas Willard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는 성경의 정경 외에 여전히 초자연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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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오늘날은 성령님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성경, 기도, 환경,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사용해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쓰는가는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열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친밀한 사랑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확신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당신의 인생과 생각을 그분께로 조정할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실 사명에 걸맞는 인격을 계발시키려고

당신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당신을 준비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충분한 시간을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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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신 후( 1:3), 배다니 근처에 있는( 24:50),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1:1-12).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은 사람들이 꾸며낸 허구이거나( 28:11-15), 아니면 한 두사람만이 보고 증거하는 신빙성 없는 일이 아니라(고전 15:6),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역사적이며 사실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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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성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요 1:12).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빌 2:7).  즉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케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우리가 천사보다 못한 존재 같으나 장래에는 천사도 흠모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벧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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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인간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보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14-15).  그러나 인류의 대표가 되어 하나님과 선악과 언약을 체결했던 아담은 범죄하여 그 자격을 상실했으며(롬 5:12), 그의 후손도 모두 죄로 오염되어 자연적 방법으로 출생한 인간 가운데서는 참 중보자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서는 인간과 똑같은 성정(性情)을 갖되 자연적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 나서(마 1:20), 죄에 오염되지 않은 중보자가 필연적으로 요청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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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하나님, 인간, , 그리스도의 구속 등과 더불어 성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난 찬양은 고난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 많다.  시편 63편도 다윗이 유다 광야에서 고생하면서(1) 지은 것으로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를 찬양하고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3-5).  이처럼 찬양은 신앙을 가진 자들 누구나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중에 하나인 것이다.  


1. 찬양의 원어 

찬양이라는 말은 예배, 경배, 감사 등의 개념과 떨어져 생각할 수는 없다.  찬양은 그 자체로서 경배이고 감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Shir’찬양하는 것혹은찬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92, 108).  즉 노래뿐만 아니라 언어 행동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 다른 언어로는 ‘tehillah’가 있는데(대하 7:6), 이는 찬양하는 시를 가리키는데 쓰였던 말이다( 96:2).  신약에 와서 찬양이라는 말은 헬라어 ‘aineo’로 일컬어졌는데( 2:13), 원래 이 단어는가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찬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에게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18:43).  이러한 원어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찬양이 노래만이 아니고 예배 및 생활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2. 찬양할 이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생명과 활동을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당연히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43:21, 102:18).  물론 하늘에 천군 천사들과( 103:20-21, 148:2), 하늘( 89:5), ( 98:4), , 안개, 광풍, , , 짐승, 과목, 가축, , 세상의 왕들,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48:8-13), 모든 자연계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② 죄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것이다( 19:5).  또한 이러한 사역을 담당하셨던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하나님께 찬미를 드렸다( 14:26).  


3. 찬양과 그리스도인 

하나님께서는 제물보다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69:30-31).  즉 형식이나 물질로 표시되는 경배 행위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영혼으로 주를 찬양하고 영혼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실되고 체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 말과 물질적인 풍성과 안락에서 비롯된 자기만족적이며 즉홍적, 그리고 일시적인 찬송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찬양이 될 수 없다.  찬양은 오히려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 잉태되어 고난이 지나간 후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즉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과 은혜를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 찬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성도는 그만큼 성장한 신앙을 가진 자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예배할 때뿐만 아니라 침상에서나( 63:5-6, 149:5), 산꼭대기( 42:11),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57:9), 심지어 행군하는 군대 앞에서도(대하 20:21-22), 찬양이 계속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찬양이 계속될 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고 신앙은 더욱 성장하며 생활에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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