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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06 금단의 열매, 선악과

오늘날 사회적으로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사회 환경이 아무리 험해도 그런 죄에 물들지 않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외부의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외부적 죄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했으나 자유의지가 동의하지 아니할 때 죄가 성립되지 않은 것처럼(창 39:9), 인간은 자유로이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Augustine은 최초의 인간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역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죄를 짓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성이 처음부터 아담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죄를 지을 가능성과 짓지 않을 가능성만이 아담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했을 때 아담은 그것을 거부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윗처럼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삼하 11:1-5).  조금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벌써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이고(창 3:6), 그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미 그분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따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창 1:31),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들의 세계에도 그때에는 악한 마귀나 타락한 천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 타락의 동기를 제공한 사단의 등장이 창세기 3장1절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전에도 죄는 마귀의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들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첫 번째 죄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지은 죄였고(창 3:1-19), 이들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여러 가지 면에서 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들에게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창 2:17),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고(창 3:4), 이에 대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의심하면서 그 말씀이 진실한 것인지를 시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지만(창 2:16-17), 뱀은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속였을 때 그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창 3:5-6).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본분에 대한 질문으로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언제나 그분을 창조주로 섬겨야 했지만(사 43:7), 아담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도록 창조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창조하셨다면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고 기계적 존재로 인조 인간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의 수준에 넘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창 1:27),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사 1:18-20), 또한 본능으로 살아가는 이성이 없는 동물과 다르게(유 1:10),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피조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창 4:6-9).  개혁주의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책임을 선악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 아담에게 돌리는데(롬 5:12), 이 문제에 대하여 탁월한 조직신학자 William G. T. Shedd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는 무한한 의지(하나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유한한 의지(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죄는 불안전한 것인데 완전한데서는 불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한 시험의 도구 이전에, 선악과가 죄의 근원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남용에 있는 것으로 죄의 책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시 51:5).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창 1:26-28), 결코 인간을 무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고(마 6:27), 비록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피조물이고(욥 10:9),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고(창 2:15-17), 이것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창 3:17).  따라서 선악과는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고(욥 4:17-21), 피조물인 인간이 넘어가서는 안 될 한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있어야할 이상적인 관계, 즉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신 27:26).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고 그분만이 주권적 입장과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딤전 1:17).  이렇게 본다면 선악과는 결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거나 덫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질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선악과는 피조물인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참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표지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신 28장).


이 선악과에 대해 Chares Hodge는 “행위 언약의 조건은 단순히 아담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는 말씀처럼(레 18:5),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될 것이지만(롬 10:5, 갈 3:12), 만약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롬 6:23).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을 기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고 무엇보다도 아담이 도덕적 인격자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에 대한 자의적 순종을 발휘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사 1:19-20).  Calvin 역시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그에게 주어진 도덕적 자유를 주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라고 한 사실을 볼 때(호 6: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세운 언약의 상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3:11).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오고 또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롬 5:15), 금단의 열매, 선악과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명백한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것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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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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