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탄의 권세가 완전히 무너졌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고 이러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롬 6:4).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근거가 되는 바 우리 역시 장차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활에 동참할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고전 15:23).  또한 우리 자신만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도 부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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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는 말씀에 기뻐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신자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눅 6:46), 귀신들이 결코 억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저 이 구절을 가지고 자신을 옹호하는데 사용합니다(요 10:28).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지 않는 자유를 신학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뿐이지(마 7:21), 만약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울 왕처럼 얼마든지 원수의 시험과 억압을 대적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삼상 16:14, 18:10).  한 마디로 이 약속의 말씀(요일 5:8)은 믿는 자의 순종 여하에 따라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요일 3:21-22).  그래서 베드로는 한 때 자신이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마귀에게 이용당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충고를 한 적이 있었고(벧전 5:5-9),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에게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 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약 4:7).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주의 자녀라도 교만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얼마든지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0:7-12).  다시 말해 십자가로 인해 신자들이 악의 세력에서 무장해제 된 것은 사실이지만(히 2:14-15), 아직도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엡 6:12).


사실 마귀는 닫혀진 문을 통해서는 들어올 수 없고 베드로나 가룟유다와 같이 책 잡힐만한 행동을 했을 때(마 16:22) 들어오게 되는데(요 13:27, 30), 가령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마귀를 만나거나 또는 집을 찾고 있는 귀신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영적전투에는 일정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요 8:44), 사탄 나라의 조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엡 6:10-13),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악의 세력에 의한 영적인 속박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Thomas White는 영적인 속박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네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한 우상숭배, 분노, 증오, 원한, 성적인 방종과 조상의 죄가 후대에까지 물려 내려온 경우, 그리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범죄인 강간, 근친상간, 폭행, 더 나아가 마귀의 공격목표가 된 목회활동이다.”  그러면서 처음 세 가지는 사탄의 계략이 인식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공격과 억압을 잘 분별하는 가운데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누군가가 귀신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탐욕과 거짓말로 가득 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죄 문제를 간과할 수 없고(행 5:3), 이것은 저절로 생겨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Occult Bondage and Deliverance』의 저자인 Kurt E. Koch 박사는 정신병 환자와 귀신들린 사람을 구별하는데 있어 중요한 점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은 악령들이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하여 감추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정말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철저히 감추려하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마귀는 아주 교활하고 간교하며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요 10:10),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고후 11:14), 마치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였던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끌고 간 것처럼(요13:2, 27, 행 1:25),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전쟁을 경험해 본적이 없거나 성령의 사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목회자에게는 이 말이 조금 비위가 거슬리거나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Maxwell Whyte가 말한 것처럼 만일 우리가 육체의 속성에 굴복하여 손과 눈과 귀를 그 속성에 내어준다면 그 특정 부위에 해당하는 귀신들이 그 부분을 차지해 버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간이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과 금을 보고 탐내듯이(수 7:21), 정욕의 귀신은 눈을 점유하고(요일 2:16), 이렇게 들어온 귀신은 신자의 선한 판단을 거스려 죄악된 행위를 점점 더 많이 행하도록 계속 부축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음란한 영화가 시각이나 청각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오도하고 색욕을 자극하여 마귀가 역사할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 12:43-45).


따라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악 가운데 살아갈 경우에는 그들이 사탄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귀신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귀신이 신자의 삶 가운데 발판을 마련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빨리 몸에 침투하는 방법은 죄를 통해서인데(갈 5:19-21), Francis MacNutt 박사는 이것을 ‘체내 침입’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귀신들이 체내에 침입할 수 있는 근거로 John WimberKevin Springer는 『능력치유』에서 여러 가지 죄악된 행동들을 열거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분노와 타인들에 대한 증오심과 자기혐오, 그리고 복수심과 탐욕과 성적인 범죄와 변태적인 행위, 즉 성도착증, 동성연애, 동물과의 성교행위, 더 나아가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을 통해 귀신의 영향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어 놓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나는 악령이 들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그들에게 자신과 또는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 ‘밀교’나 ‘사교’ 특히 동양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이 없었느냐고 물어보곤 한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것들에 관련된 경험이 있을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귀신들림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면서 밀교(密敎)에 관련된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성경구절 출애굽기 20장3-5절, 레위기 19장31절, 20장6-8절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귀신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는 과정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 계속된 불순종으로 인해(삼상 13:8-14, 15:17-23),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삼상 16:1),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6:14).  신약에 와서는 초대교회의 신자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그 모든 수입을 교회를 위해 헌금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이들 마음속에 탐욕이 생겨 그 돈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남겨 놓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을 때, 베드로는 지식의 말씀을 통해 이들의 잘못을 알아내어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쉽게 말해 탐욕이란 죄 때문에 이들 부부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들의 마음을 거짓말과 속이는 영들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의 영을 시험한 것입니다(행 5:4, 9).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이와 같은 일이 생길 수 있고(살후 5:19, 히 10:29), 무엇보다도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육체에게 죄짓는 것이며(갈 5:19-21), 그런 죄를 통하여 마귀가 침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의 본성에게 죄를 짓는 것(막 7:21-23)과 마귀에게 공격당하는 이중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날마다 점검하는 가운데 죄와 싸워야 하고(히 12:4), 또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겸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막 16:17).


오늘날 마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을 공격하기 위해 땅에 두루 돌아다닌 것처럼(욥 1:7),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을 통째로 멸망시키려고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벧전 5:8).  그렇다면 마귀가 어떤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삼키고 파괴시킨다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되고 내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기 때문에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가?”(요일 4:4)라는 신학적 강령을 끝까지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것은 논쟁이 심한 신학적 문제이긴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경고를 했고(딤전 4:1), 성경은 귀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든지 미혹할 수 있으며 신자들 역시 ‘귀신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고후 11:3-4).  예를 하나 더 들어 마귀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와서(고후 11:14), 신자들을 미혹하여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귀신들과 영적간음을 하도록 유혹할 수 있는데(약 4:4), 가령 어떤 그리스도인(남편/아내)이 유혹에 넘어가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을 범하여 한때 신실했던 부부관계가 깨어진다면 그는 이미 간음케 하는 귀신에게 복종하고 굴복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적의 진영, 사단에게 속박되어 있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눅 4:5-7), 육체의 본성과 욕구를 철저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갈 5:24), 마귀는 그것을 발판삼아 우리를 공격하고 억압하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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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기초를 놓았으며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룬 이스라엘의 찬양대 및 찬양 예배 제도(대상 25:1-31)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B. C. 586)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예배의 찬양은 물론이고 이외의 일상적이고도 개인적인 여호와 찬양과 관련하여 히브리인들은 여러 악기를 사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악기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비파 : 히브리어로〈네벨〉이라고 하는 이 현악기는 역사서(삼상 10:5, 왕상 10:12, 대하 9:11)와 시편 (시 33:2, 57:8, 92:1-3)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일종의 ‘하아프’이다.  ② 수금 : 히브리어로는〈킨노르〉라고 하며 역사서(삼상 16:23, 삼하 6:5)과 시편(시 43:4, 71:22, 137:2), 이사야서(사 5:12, 23:36, 30:32) 등에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대개는 6개 줄로 이루어져 있다.  ③ 제금 : 히브리어로〈무칠타임〉또는〈첼출림〉으로 불리는 이 악기는 심벌즈의 일종으로 역대상 13장8절, 15장16절, 16장5절에 많이 나온다.  ④ 양금 : 히브리어로〈무나아느임〉이라고 하는 이 악기(삼하 6:5)는 오늘날의 탬버린과 같은 것이다.  이 외에도 자주 사용된 악기로는 작은 북(출 15:20, 삼상 18:6, 시 81:2)이 있으며 신호용으로 쓰이던 나팔도 때때로 악기로 사용되곤 하였다(시 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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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시한 것처럼 ‘한 알의 씨앗’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요 12:24).  한 알의 씨앗을 땅에 심으면 그 씨앗은 썩으면서 동시에 그 씨앗 고유의 싹과 줄기가 나오고 마침내는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그 씨앗을 생전처럼 본다면 그 씨앗 속에 형체와 수많은 알곡이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겨울에 얼어붙었던 땅에 봄이 되면 다시 새싹들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그런 생명력이 나오는 것일까요?  자연의 법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도 썩어질 육의 몸을 심고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새로운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지라도 동일인의 특성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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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 성이다.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명약관화하거니와,

교회는 결코 어떤 특정한 계급,

또는 신분이나 교회 내의 특정한 당국

또는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는

온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 공동체이다.

모두가 선택된 백성이며,

왕다운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통하여

믿고 순종하며,

완전한 사랑으로 헌신하라는

요구를 받은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구별은 있고,

또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본 동등성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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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당신 안에 개발시켜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당신을 준비시킵니다.

당신의 관심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목적

그리고 방법들이 초점 맞춰져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른 어떤 관심도

당신을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죠지 뮬러와 같이

당신의 뜻이 온전히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하나님을 위한 꿈을 꾸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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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2권6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왜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그리고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삶과 인격의 변화에 대해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하나하나 밝히며,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2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미국 내 최고의 크리스천 작가로 세 번이나 선정된 맥스 루케이도의 단순 명쾌한 문체와 시적인 언어, 영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이 책은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가 주는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교만과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도 사랑을 표현하고자 선물주기를 좋아하는데 순전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즐겨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지만 십자가의 선물만큼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 주는 선물은 없다.  십자가의 선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단지 피를 흘리기만 하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많은 것을 하셨다.  십자가의 언덕에는 하나님의 선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선물들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  채찍질은 군병들이 십자가에 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세 번째 일이었다.  명령에 따랐던 것이기에 이 두 행동에 대해서 군병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딴 생각이 있었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다.  침 뱉음이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으로 군병들이 뱉은 침은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시고 그것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다.  죄인들에게 성인의 얼굴을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얼굴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중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시 말해 성육신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공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고 죄를 받아들인 것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마에 얹힌 가시면류관은 그분의 마음을 찌른 우리의 죄의 열매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죄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예수님의 양팔을 벌려 손에 대못을 대고 망치를 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으셨다.  십자가 옆의 무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기 위해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들의 죄의 목록이었다.  망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은 로마 보병의 것이 아니었다.  망치를 내리치던 힘은 성난 폭동의 것이 아니었다.  사형 선고는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결정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친히 못을 택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희생으로 가리고 피로 덮기 위해서 그분은 못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렇기에 못을 택하셨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 손으로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로마인의 명령에 따라 3개 국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죄 패가 있었다.  이 죄 패에는 온 세상에 다가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죄 패를 통해 유대인들을 위협하고 조롱하려던 것이 빌라도의 의도였지만 하나님은 다른 뜻이 있었다.  빌라도는 자신도 모르게 천국의 서기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죄 패에 받아 적었던 것이다.  그 죄 패로 인해 즉각적인 열매가 맺혔고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하였다.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못할 언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은 죄 패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때로는 풍요의 언어로 때로는 궁핍의 언어로, 때로는 아픔의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갈보리 십자가 옆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두 강도는 공통점이 너무 많았다.  동일한 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동일하게 사형을 선고 받았다.  동일한 무리에 둘러싸였으며 동일한 예수님과 동일한 거리를 두고 달려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분을 욕하는 길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그분께 기도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한 사람이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구해주셨고, 다른 사람이 그분을 욕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냥 두셨다.  그분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길은 ‘비아 돌로로사’ 즉 슬픔의 길이다.  전통에 따르면 예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갈보리로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빌라도의 법정이 아니라 천국의 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 하늘의 집을 떠나시던 날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분의 뜻은 오직 하나,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 여정을 화목하게 하심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온갖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했다.  한걸음 나아가 그분을 대적했으며 원수가 되기까지 했다.  교만은 우리를 넘어지게 했으며 수치는 넘어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초청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신다.


성경은 우리의 행실을 우리가 입은 옷으로 표현하곤 한다.  예수님의 성품은 그분의 옷처럼 솔기가 여기저기 이어 붙인 데가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입으신 옷처럼 나누어진 데 없이 온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리스도는 이 솔기 없는 완전한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으셨다.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벌거벗음의 수치, 패배의 수치, 죄의 수치, 그분은 이음매 없는 순결의 옷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누덕누덕 기운 우리의 추한 옷을 대신 입으셨다.  비록 우리가 죄의 옷을 입고 십자가 앞에 왔지만 떠날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어주신 그분의 옷을 입고 떠난다.  그리스도 그분을 입고 떠난다.  예수님의 몸은 찢기셨다.  채찍질에, 가시에, 십자가의 무게와 못의 구멍으로 찢기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았다.  처참하게 찢긴 그 몸을 통해 영광의 문이 열린 것이다.   찢어진 휘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자신과 지성소 사이에 더 이상 장벽이 없음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언제 어느 때든 자유롭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던 죄의 장벽을 그분이 제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장벽을 쌓아 올리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찢어진 육체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당신은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십자가를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목마르셨을까?  그분은 목말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셨다.  못 박히시기 전에 누군가 마실 것을 드렸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아니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당신도 아픔을 느끼리라는 것을 당신도 목마르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리에 서 보셨기에 당신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이 이해하시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분이 이해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는가?  포도주 적신 해융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위치적 성화는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며, 점진적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과 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피는 당신을 위해 내주신 하나님의 제물로서 당신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없애 준다.  물은 당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원 안에서 당신을 자라나게 한다.  세월이 간다고 처음 구원 받은 날보다 더 구원 받은 자가 될 수는 없지만 구원 안에서 자라갈 수 있다.  피는 받아들이지만 물은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쁘지만 그리스도와 화목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분은 어떻게 공의와 자비를 둘 다 지킬 수 있으실까?  어떻게 진리와 긍휼을 함께 베풀 수 있으실까?  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별 설득력 없는 해답 두 개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의 관점으로 보면 세 번째 해답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에게 옮겨 놓고 십자가에서 그 죄를 벌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간음죄를 범한 다윗도, 살인범 바울도, 배반자 베드로도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삶에 관한 한 그들은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바닥이 없으시다.  우리는 누구나 비극을 만나며 비극의 상징물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조차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요한에게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큰 비극적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빈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그 죽음의 옷자락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게 된다.  수의처럼 슬픈 것을 사용하셔서 요한의 삶을 바꾸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서 결혼식장의 빈 포도주 항아리는 능력의 상징이 되며, 과부의 동전은 아낌없이 드림의 상징이 되며, 베들레헴의 볼품없는 구유는 헌신의 상징이 되며, 사형의 도구는 그분의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죽음의 옷을 취해 생명의 화신을 삼은 것이다.


엉터리와 아이러니. 갈보리 언덕은 그 둘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라면 구속의 드라마를 그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탁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명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 시간의 각본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의 삶의 십자가가 되려면 당신은 그 언덕에 뭔가를 가져와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버리신 것을 보았다.  당신도 뭔가를 내려놓지 않겠는가?   당신의 나쁜 순간들, 화난 순간들, 불안한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라.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순간들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들은 절대 우연에 맡겨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길을 고르셨다.  하나님이 못을 택하셨다.  우리 주님이 세 개의 십자가를 꽂으셨고 죄 패를 써 붙이셨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세부사항, 하나님의 주권이 그 일보다 더 철저히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중하게 바로 이 메시지를 남기셨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이다. 다 너를 위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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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몸은 생전의 몸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성경은 우리의 몸이 부활할 때 변하여 새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체 불구로 죽은 사람이 불구자로 부활하거나 못생긴 사람은 못생긴 대로 부활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몸은 물질적 형체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부활 후 사람들은 지금처럼 남녀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두는 일은 없을 것이며 부활한 사람들을 천사로 비유했습니다(마 22:30-32).  이것은 성(性)의 구분이 없는 온전한 사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부활 이전의 몸의 열매로서 여전히 동질성을 유지할 것입니다.   가령 갑이라는 사람이 죽어 부활한다면 갑이라는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지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부활에 참여케 되는 사람들은 부활이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한 단계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러움을 입는 한 단계로서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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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적으로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사회 환경이 아무리 험해도 그런 죄에 물들지 않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외부의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외부적 죄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했으나 자유의지가 동의하지 아니할 때 죄가 성립되지 않은 것처럼(창 39:9), 인간은 자유로이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Augustine은 최초의 인간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역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죄를 짓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성이 처음부터 아담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죄를 지을 가능성과 짓지 않을 가능성만이 아담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했을 때 아담은 그것을 거부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윗처럼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삼하 11:1-5).  조금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벌써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이고(창 3:6), 그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미 그분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따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창 1:31),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들의 세계에도 그때에는 악한 마귀나 타락한 천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 타락의 동기를 제공한 사단의 등장이 창세기 3장1절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전에도 죄는 마귀의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들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첫 번째 죄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지은 죄였고(창 3:1-19), 이들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여러 가지 면에서 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들에게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창 2:17),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고(창 3:4), 이에 대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의심하면서 그 말씀이 진실한 것인지를 시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지만(창 2:16-17), 뱀은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속였을 때 그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창 3:5-6).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본분에 대한 질문으로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언제나 그분을 창조주로 섬겨야 했지만(사 43:7), 아담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도록 창조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창조하셨다면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고 기계적 존재로 인조 인간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의 수준에 넘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창 1:27),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사 1:18-20), 또한 본능으로 살아가는 이성이 없는 동물과 다르게(유 1:10),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피조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창 4:6-9).  개혁주의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책임을 선악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 아담에게 돌리는데(롬 5:12), 이 문제에 대하여 탁월한 조직신학자 William G. T. Shedd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는 무한한 의지(하나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유한한 의지(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죄는 불안전한 것인데 완전한데서는 불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한 시험의 도구 이전에, 선악과가 죄의 근원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남용에 있는 것으로 죄의 책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시 51:5).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창 1:26-28), 결코 인간을 무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고(마 6:27), 비록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피조물이고(욥 10:9),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고(창 2:15-17), 이것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창 3:17).  따라서 선악과는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고(욥 4:17-21), 피조물인 인간이 넘어가서는 안 될 한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있어야할 이상적인 관계, 즉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신 27:26).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고 그분만이 주권적 입장과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딤전 1:17).  이렇게 본다면 선악과는 결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거나 덫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질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선악과는 피조물인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참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표지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신 28장).


이 선악과에 대해 Chares Hodge는 “행위 언약의 조건은 단순히 아담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는 말씀처럼(레 18:5),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될 것이지만(롬 10:5, 갈 3:12), 만약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롬 6:23).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을 기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고 무엇보다도 아담이 도덕적 인격자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에 대한 자의적 순종을 발휘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사 1:19-20).  Calvin 역시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그에게 주어진 도덕적 자유를 주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라고 한 사실을 볼 때(호 6: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세운 언약의 상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3:11).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오고 또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롬 5:15), 금단의 열매, 선악과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명백한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것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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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냈습니까?.

모세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쓰시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셔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던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1-15절을 읽어보십시오.

모세가 자기 민족을 위한다고 스스로의 방법을 주장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수천 명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손으로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그 대가로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간 목자 생활을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셨을 때

몇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까?

단 한 명도 없었지요.

구출하시는 과정에서 오히려 애굽인들로 하여금 금, 은, 의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

애굽은 빼앗김을 당했고,

군대는 파멸 당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방법이 언제나

최상의 방법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종 교회에서 실수와 실패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겨우 계획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시도록 하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맛보겠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60년에 걸쳐서 할까 말까한 일을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6개월도 안 걸려 끝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에 맞춰 변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을 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혹은 우리를 통해 하기 원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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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은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빈 무덤을 ‘기절설’과 ‘도적설’ 그리고 ‘환상설’과 ‘착각설’, 심지어 ‘강령설’, ‘사기설’, ‘신화설’로 설명합니다.  먼저 기절설이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의식을 되찾고 제 발로 걸어 나가 무덤이 비게 된 것이고, 도적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 후 그 스승이 부활하였다고 거짓말을 퍼뜨려다는 것이며, 환상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갈망하던 제자들이 환상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착각설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은 제자들이 다른 빈 무덤으로 착각하여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고, 강령설은 죽은 예수님의 영혼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사기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다고 증거한 목격자들이 실상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고, 신화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고대 근동의 이교 신화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부활에 대한 반론들은 전혀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못이 박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죽으셨고,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은신해 해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이 몸으로 부활한 것을 직접 제자들을 찾아 증명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dy 20:19-23).  거짓인 줄 아는 자가 그것을 위하여 생명을 버린 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고, 그 어떠한 고대의 종교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반대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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