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큰 재앙과 그 결과로 일어난 그의 백성들을 그 나라로부터 인도해 내심을 묘사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었던 표현이고(신 4:34, 6:22, 7:19, 23:9, 26:8, 34:11, 느 9:10, 시 135:9), 신약성경에서도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행 2:22)과 사도들(행 2:43, 14:3, 15:12, 롬 15:18-19:2, 고후 12:12), 그리고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의 사역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활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표적’과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고 경탄하게 만드는 ‘기사’는 기적을 행하기 위한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묘사하고 있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그저 한두 가지의 기적이나 치유가 일어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발생했던 장소, 예를 들면 사도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손으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행 5:12),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헬라파 유대인 빌립(행 6:5)이 많은 기적을 행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표적과 기사들은 복음의 선포와 관련하여 신앙부흥이 한창일 때 일어났는데(행 2:43, 5:12, 6:8, 14:3), 이 기적들이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제외한 표적과 기사를 행했던 사람들 중에 사도가 아닌 일반 평신도인 스데반과 빌립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반해 B. B. Warfield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은사들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논의를 널리 보급시켰는데 『Counterfeit Miracles』에서 “특별한 카리스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유가 아니라 소수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기록을 볼 때 매우 분명하다. …사실상 사도의 교회나 혹은 사도 시대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은사들은 분명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은사들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인정된 대리인들로서 사도들 자격 인정물 중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은사들의 기능은 그들을 사도의 교회에 분명히 한정시켰고, 사도들과 함께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쉽게 말하면 은사의 목적은 사도들을 믿을만한 교리 선생들로 확증하는 것이었고 사도들이 죽었을 때 그 은사들도 그들과 함께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표적과 기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행한 많은 기적들을 말하고 있는데(막 6:7, 행 5:12, 19:11-12), 솔직히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스데반과 빌립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행 6:5-6), 이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행 6:8, 8:5-8).  여기서 질문할 것은 Warfield와 그의 신학적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표적과 기사의 주요 목적이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이었다면, 왜 사도가 아닌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Warfield와 오늘날 그의 계승자들이 Jack Deere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도들이 안수했기 때문이고(행 6:6),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의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은 아직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표적과 기사들이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데반과 빌립이 기적들을 행해야 할 이유는 없을뿐더러, 만약 사도들 외에 어떤 사람이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도록 허락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도구로서의 표적과 기사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중단론을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목사/신학자들 가운데서 이 문제에 대해 거의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이 궤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행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은사들의 목적을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같은 부류인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인용한다면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은사들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교회생활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모순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두 제자와 달리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속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교회의 설립자입니다(엡 2:20).  그리고 대부분의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데(행 1:12-14), 여기서 궁금한 것은 “만약 소수의 사람만이 교회를 세우거나, 제자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도 끝났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은(마 28:18-20), 세상을 복음화하고 가르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4:47, 행 1:8).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눅 10:17-19), 만약 소수의 사람들만이 기적적인 은사를 받거나 이 은사가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본문구절은 상당한 모순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해 기적을 행하도록 의도하셨다면, 왜 사도가 아닌 칠십 인에게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었고 사도들과 친분을 쌓거나 사도들 집단의 공식적인 멤버도 아니지만 귀신을 내어 쫓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막 9:38-39).  이것은 기적이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다는 이론에 대한 중요한 예외가 되는데, 한 마디로 초자연적인 사역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스데반과 빌립이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다섯 사람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행 2:43), 다른 사도들 역시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5: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아나니아는 기적적인 사역을 한 비사도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비교적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율법을 헌신적으로 지키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행 22:12).  그가 사울에 대한 사역에서 그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고(행 9:10-18), 이외에도 사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은 아나니아의 손에 의해서인 것처럼(행 9:17), 사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열 두 사도가 아닌 평범한 사람인 아나니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이론들, 즉 사도들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기적들이 사도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신학적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이고, 더 나아가 사도행전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로지 사도들을 통해서만 주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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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활동을 하다 1869년 아프리카에서 소식이 끊긴

David Livingstone을 찾아내라는 밀명을 받고

아프리카 탐험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천신만고의 역정 끝에,

1871년 11월 식량과 약품이 모두 떨어진 채

앓고 있는 Livingstone과 극적으로 만났다.

이때 Stanley가 “Livingstone 박사님이지요?”라고

인사를 건넨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874년 Livingstone 구출을 위해 다시 한번 아프리카로 갔으나

이번에는 Livingstone의 죽음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탐험에서 그는 나일 강의 원천인 빅토리아 호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등 아프리카 탐험의 한 장을 새로 썼다.

그를 불굴의 탐험가로 만든 요인으로는

그의 타고난 담대함과 인내심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강하게 만들어 준

기도의 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새로운 도전과 위험과 앞에 설 때마다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기도는 나의 눈을 멀게 하거나

마음을 희미하게 하거나 귀를 막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일에서 즐거움과 자부심을 얻게 해주었고,

1,500마일의 숲 속을 거뜬히 지나갈 수 있도록 희망을 주었으며,

매일 매일의 위험을 극복할 의욕을 주었습니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일화 가운데는

우간다의 토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기적 같은 이야기가 있다.

탐사 여행 중에 만난 한 원시부족의 추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설명하고

깊은 인상을 심어 준 Stanley

더 나아가 그 지역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낼 결심을 하였고,

그 중요한 편지를 본국에 전달한 인물로 한 프랑스인을 선발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젊은이는 험난한 여정 중

무지몽매한 토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의 비참한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몇 달 뒤 영국 군인들에게 그의 유골과 함께

그가 신었던 부츠 안에 있던  Stanley의 편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한 용감한 탐험가의 기도와 이름 없는 청년의 희생은

이렇게 해서 위대한 기적 하나를 성취하였다.

이 편지에 감동받은 7명의 선교사가 Stanley가 있던 오지로 들어가서

그 일대의 원주민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계시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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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지 못한 헬라인(행 17:32)과 사두개인(마 22:23-28), 그리고 고린도 교회 안에 소수의 교인들처럼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데(고전 15:12), 이러한 사실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행 26:1-29).  즉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것을 증거 하였을 때(행 26:23), 베스도는 바울에게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비웃었습니다(행 26:24).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에게는 마치 미친 사람의 헛소리와 같이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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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질과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뼈이며,

진정 그리스도와 한 영이라면 말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혼에 찍는 그리스도의 표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찍은 그리스도의 도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마 11:28-29).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평온과 사랑과 기질로 옷 입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전가하신 의로 옷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롬 13:14).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스스로가 어린 양이며,

성도들 역시 어린 양이다.


이런 미덕들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의 본성이거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미덕들의 독특한 본성을 상징하시려고

비둘기를 택하셨다.

가장 적절한 상징은

사물의 독특한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영을

그들의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 4:6).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신비스러운 몸과 머리와 지체들에게는 한 영이 계신다(고전 6:17, 엡 4: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요 20:22).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것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그 옷깃까지 내림과 같다.

양자의 경우 모두 그것은 평화와 사랑의 영이다.


참된 성도를 구별하는 표지로서

신약성경이 가장 자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것은

사랑의 미덕과 성향이다.

이런 성향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고,

자신들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알게 해주는

특별히 뚜렷한 표지로서 종종 제시된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매우 충분하고

분명하게 많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이며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성경은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싸움을 즐기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까다롭고, 무정하며, 인색하고, 교만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수 있다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생각은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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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신령한 몸인 반면 소생한 자의 몸은 여전히 육의 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번 죽음을 경험한 후 다시 살아난 새로운 삶인 반면에 소생은 생명이 돌아와 단순히 이전의 생명을 이어가는 옛 삶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자는 한번 죽음으로써 죄의 형벌인 죽음에서 벗어났지만 소생한 자는 언제가 다시 죽어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계 20:12).  부활한 사람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시고(요 11:25), 소생한 사람은 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 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35), 야이로의 딸(막 5:35-43), 나사로(요 11:39-44), 과부의 아들(눅 7:12-15), 욥바의 다비다(행 9:36-40), 청년 유두고(행 20:9-12) 등 다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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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했을 당시 이미 고린도 교회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행 18:1-17), 교회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확실한 성경의 원칙에 입각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활용이었지만(고전 12:3-7), 정작 이들은 성령께서 교회를 연합하기 위해 주신 은사를 가지고(고전 1:6),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하는데(엡 2:22),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나누는 일에 사용했습니다(고전 1:13).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고전 12:7), 은사의 목적은 예배 안에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고전 14:26), 덕을 세우며 서로 격려하는 것인데(고전 14:3-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문제는 성령께서 허락해 주신 은사(고전 12:11)를 공동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지 않았고(고전 13:1-3), 오직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는 은사들에 대해서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구했으며(고전 12:29-31), 은사를 받은 교회 지도자들 역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듯 예배를 인도했을 뿐 로마 교회처럼 그 누구도 조용하게 섬기는 일은 원치 않았습니다(롬 12:7).  즉 이들은 은사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잘못 사용하여 교회 내에 갈등과 혼동 속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고(고전 3:3), 그 결과 감동적인 연설가인 아볼로파와 사람을 낚는 어부 출신인 베드로파, 그리고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파, 심지어 자신들만이 거룩하고 오직 예수만을 섬긴다는 그리스도파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10-13).


솔직히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싸움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교회 안에서 ‘은사주의파’, ‘개혁주의파’, ‘경건주의파’, ‘복음주의파’, ‘오순절주의파’, ‘의식주의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천년 전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교회연합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신 것이고(고전 12:7), 결코 교회를 나누기 위해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고전 12:12-2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알고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지적하고 있는데(고전 12:31), 먼저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은사들을 놓고 라이벌 의식이나 질투 혹은 교만 따위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그다음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14장은 사랑의 실행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은사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이런 의미에서 J. I. Packer“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그 어떤 은사들도 사랑에 기초하거나 사랑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추구하고 행사되지 않는다면 그 은사는 교회 안에서 소리만 요란할 뿐(고전 13: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은사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엡 3:14-19).


사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똑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엡 2:20-22)데는 은사들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성경을 읽고 권면하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하며(딤전 4:13-16),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동일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고전 12:18-21).  쉽게 말하면 교회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나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혹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명백한 사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12:27).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활용하라고 강권하고 있으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획을 올바르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에베소 신자들을 가르친 것처럼(엡 4:11-16),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은사 활용이 절대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14:39).  따라서 교회 안에 이기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 사람이 은사별로 섬기는 것이고(롬 12:4-8), 협력해야 할 메시지를 몸에 비유한 것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몸이 완전하게 서로 조화되고 각 지체가 그 기능대로 다른 지체를 도움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사랑으로 그 몸이 세워지는 것입니다(엡 4:16).  즉 은사의 일차적 목적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나가는 것처럼 자기 유익이 아닌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고전 12:7, 엡 4:7-12).


여기서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 29-30, 롬 12:6-8, 엡 4:11)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Yves Congar“성령론 없이는 기독론은 없고 기독론 없이는 성령론은 없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자가 성부의 뜻을 따라(요 7:16-18),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요 8:50), 초점을 두었던 것처럼 성령도 예수의 영으로(행 16:7), 성자의 말씀과 행위를 생각나게 하고(요 14:26), 성자의 영광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요 16:13-14).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를 통해 어떤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면 그 사건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내야 하고,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처럼(행 3:7),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행 3:12).  그러므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의 목적은 동일한 한 성령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고(고전 12:11),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고전 12:7), 성령의 은사로 인해 교회 안에 계층이 생기거나 분쟁이나 분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를 구실삼아 은사론 전체를 부정함으로 성령의 은사들의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적대시하거나 Lloyd Jones, R. T. Kendall, Wayne Grudem, D. A. Carson, Jack Deere, Vern Poythress, Gordon Fee, Sam Storms, Michael Green 등등 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염병처럼 멀리해야 할 마귀의 능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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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란 맞아도 좋고 맞지 않아도 재미있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위자인 카라얀의 말이다.


오케스트라일 경우,

다른 음과 맞지 않거나 시간을 맞추지 못해

화음이 안 되게 연주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성급하게 다른 음과 맞추게 하려고 한다면,

그는 유능한 지휘자가 아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연주한 음이 다른 음보다 뛰어나 있어

고쳐야 할 것은 오히려 다른 대부분의 연주자일 경우도 있다.

음이 맞지 않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는 결과를 가져올 경우까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음악인 모던 재즈가 그중에 하나다.


처음부터 모든 음이 완전히 맞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경계해야할 일이다.

한바탕 부딪혀 봐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연주가

그 문제에 주의하고 더욱 생각하게 되어

조금씩 발전해 갈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온전치 못한 이 세상에는

언제, 어디서나 불협화음이 있게 마련이며,

오히려 그것이 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음이 완전히 맞게 되면,

더 이상의 진보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수를 전혀 하지 않게 되면,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실수를 자극제로 삼아 자기 진보의 디딤돌로 만들어라.

사람은 실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


-리차드 W. 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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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죽었다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마 17:21, 막 8:31, 눅 9:22).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라고 간청하다가 책망을 들었고(마 16:22-24), 여러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물었습니다(막 9:10).  그들은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요 20:9).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었을 때 다시 살아난 것을 기대한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낙심하여 은신하고 있거나(요 20:19),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눅 24:13-24).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증거를 전해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막 16:1-13, 눅 24:21).  심지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유령으로 생각하고(눅 24:36-39),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막 16:14).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 이적이며 심히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본 후 비로소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였고(요 210:24-29), 오순절날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행 2: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확신 있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행 2:14-42, 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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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순절 신학을 대할 때는 이 신학만이 가장 최고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소 말씀에 깊이에 있어 어딘가 빈약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사에 있어서는 청승맞게 드려지는 장례식 같은 예배와 메마른 말씀을 전하는 죽은 정통 장로교 신학보다는 백번 천번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장로교에서 신(神)처럼 여기는 Calvin 신학을 대했을 때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 중 수업이 중단될 정도로 서너 번에 걸쳐 교수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 주제가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솔직한 고백은 그 당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 앞에서 교수와 맞장토론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논쟁을 벌인 이유는 장로교 사람들이 철저하게 Calvinism로 무장되어 있듯이 나 역시 이미 Pentecostalism으로 그들 못지않게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은사중지론적인 교리 속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오순절 신학이 점점 멀어지고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에 빠지면서 누군가 은사에 대해 물어보면 균형 잡힌 성경적인 대답을 주기보다는 AD 1세기 말에 모든 은사가 끝난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초자연적인 능력의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성경해석을 하는 은사폐지론자의 입장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Moody Bible Institute에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이며 존경받는 Gene A. Getz는 1972년에 설립한 Fellowship Bible Church의 담임목사로 이미 리더십에 관한 그의 탁월한 식견은 50여권이 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는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불릴 만큼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킨 경험 많은 전문가이자 탁월한 성경학자입니다.  처음 그는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이 은사 발견에 힘써야 한다고 강하게 가르쳤으나 그 입장을 바꾸어 성령의 은사 발견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의 견해를 주의 깊게 고찰할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뛰어난 성경학자이고 남들이 말하는 성공한 목회자이며 교회 설립자였기에 그의 견해를 반박하기란 그다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회원리를 설명할 때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보다는 ‘몸의 성숙’ 즉 지도자로서의 성품과 믿음, 그리고 소망과 사랑을 강조하면서(딤전 3:1-13, 딛 1:5-9), 성령의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는 이론에 대한 반대 이유로 ‘혼돈’, ‘합리화’, ‘착각’, 이 세 가지가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Building Up One Another』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영적은사를 발견하도록 노력하라는 권면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제자 삼는데 특별한 사명감을 품고 30년이 넘도록 목회를 하면서 제자훈련에 관한 획기적인 책들을 여러 권 저술하고, 본인 스스로가 전통적 은사중단주의 학교인 Talbot School of Theology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Bill Hull 목사는『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이런 고백합니다.  “성령의 은사들, 즉 방언, 신유, 기적, 그리고 예언과 같은 것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만약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략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실 Bill Hull 목사는 대학교 시절부터 오순절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지만 Talbot School of Theology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의 신앙관이 변한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고린도전서 12-14장을 주해하는 강의시간을 통해 수년 간 배워왔던 은사중단주의자들이 말이 설득력이 없어 보였던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솔직한 고백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 우리가 사역에 허락된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회를 놓치는 비극을 초래할 것임을 나는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영적인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나의 지난 목회 기간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성경을 통해 이런 은사의 역할을 배우면서 다시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대부분이 은사중단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가 아니라 개교회의 전통과 문화와 제도 그리고 신학자나 목사로부터 신학적 교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은사는 사도시대인 초대교회 때만 필요했던 것으로 성경이 완성된 지금 우리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문화와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솔직히 모든 은사중지론자가 사도들이 죽은 뒤에 기적적인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신학자나 목사의 가르침, 즉 ‘은사중지론적인 교리’라는 떼어내기 힘든 고리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하심과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여정에 있어서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거나 걸림돌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J. I. Packer“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의 희생자들이며 동시에 수혜자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 각자가 면밀한 성경공부를 통해 믿음에 도달하거나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에 의해 전수되어 온 은사중지론적인 교리들,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 가르침에 혜택과 영향을 받아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직접 연구하고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행 17:11), 오히려 균형 잡히지 못한 선생들의 가르침에 더 의존적인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딤후 4:3-4).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적인 은사들을 믿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처럼(요 3:1-10), 그들 자신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거나 체험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5:37).  다시 말해 율법주의자들이 결혼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처럼(딤전 4:1-3), 신자들은 성경에서 은사가 소멸되었다고 가르치는 거짓선생들, 즉 영적으로 무지하고(요 3:9), 성경을 곡해하며(마 15:9), 죽은 정통을 가르치는 자들을 통해(막 7:1-6), 은사를 믿지 않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이 이러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대적해 온 것은 불신자가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이고, 이런 교회들이 관료적 지도력의 부상으로 인해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거부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신 것입니다(엡 4:30).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말씀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신 것을 아셨고(마 10:1, 막 16:15-20),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는데, 주님은 사역을 하실 때 영적인 것을 만족시키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육적인 면을 동시에 만져주셨고(마 4:23-24),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말한 것처럼(살전 1:5),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도 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귀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항복하는 것도 기적이지만 더 큰 기적이 있다면 말씀 선포로 인해 불신자가 거듭나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엡 2:1-6).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어느 한 사람이 악한 영에서 놓여남을 받거나(눅 4:18-19), 아니면 앉은뱅이가 걷고 뛰듯이(마 11:5), 혹은 눈을 떠 보게 된다면(눅 7:22), 이 구원받는 과정에 있어 이러한 기적들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행 8:4-13), 복음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막 16:20).  그리고 이런 기적을 경험할 때 잡다한 신학적 논쟁이 끝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을 때(행 3:1-10),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신학자와 목사가 다 모여 있었지만(행 4:1-6),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행 4:14), 만약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고 걷는다면 거기에 무슨 ‘쓰레기 같이 오염된 교리’나 이단처럼 이것저것 마구 갖다 붙인 ‘엉터리 신학적 해석’이 필요 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성령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들은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축소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더 나아가 이런 가르침은 초자연적이며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길 바라는 성도들의 깊은 갈망을 둔화시키는데 일조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신학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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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인하여 하수들이 넘쳐흐르는 날에는 물은 많은데도 오히려 마실 물이 없습니다.  흙탕물과 구정물이 샘물(谷泉)을 덮쳐서 맑은 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도 지식의 홍수, 정보의 홍수, 미디어의 홍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맑은 생수가 솟아나는 샘터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홍수의 시대에 어떤 물이 맑은 샘물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혼탁한 때에 맑은 샘물을 찾는다면 바로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그리고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번 주에서는 맑은 샘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매일 읽어야 합니다.

신명기 17장19절에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있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매일 매일 읽기를 원하십니다.


2. 조직적으로 읽으십시오.

당신이 좋아하는 부분만을 읽지 마십시오.  성경은 모두 읽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시편, 잠언, 사복음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 하박국 선지자가 “제 글이 어땠나요?” 하고 묻는다면, 성경에 당신의 글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대답하면 그 선지자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성경은 전부 읽어야 합니다.  마치 편지를 마지막 부분부터 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야만 합니다.


3.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눈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마음은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런 경험들 을 많이 해 보셨을 겁니다.  해결법은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는 마음이 도망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줄을 치면서 읽으십시오.

약속의 말씀은 파란색으로, 예수님의 말씀 혹은 그 분에 관한 것은 빨간 색으로, 성령님에 관한 것은 초록색으로 칠하면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 읽는 기쁨이 더 해지실 것입니다.


5. 계획을 세우고 읽으십시오.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경 읽는 습관을 가지는 것 역시 신앙생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훌륭합니다.  습관은 계획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훈련 교재 안에 있는 성경 읽기 표를 이용하신다면 성경 읽는 습관을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다른 계획으로는 하루에 15분간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입니다.  통계상으로 하루에 15분간 성경을 읽으면 1년에 성경 일독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능한 배우일수록 시나리오를 자주 읽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연출자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리고 연극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자주 읽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성경을 꾸준히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시는 가를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훈련기간 동안 하나님이 왜 나를 훈련 받게 하시는가 그리고 훈련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하여 성경 읽기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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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죽기 이전부터 이를 증거 하였고(마 16:21, 17:22-23), 자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선한 일을 행한 자면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면 사망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했습니다(요 5:28-29).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던 마르다에게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고(요 11:25), 그리스도는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마 22:23-32).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은 물론 장차 모든 자들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이를 증거 하였습니다(막 8:31, 눅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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