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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18 초자연적인 지식

언젠가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으리라는 예감이 든 적이 있다.  우리는 따로따로 미국에서 남아메리카에 있는 볼리비아로 가야 했다.  아내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친 뒤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볼리비아로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며, 나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몇 나라,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그 외 나라들에 들러 학생 사역을 격려하고 볼리비아에서 아내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그 예감은 고통스럽도록 분명하게 다가왔다.  왜 되돌아가서 아내에게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이 예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가?  나는 예감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식의 말씀’ 이라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터였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비참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물론 나는 기도했다.  믿음으로 그것을 물리치려 했다.  그토록 강력한 예감이 있는데?  내 입은 바짝 말랐다.  하나님은 까마득히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나를 신뢰할 수가 없느냐?”  나는 깜짝 놀랐다.  “예, 주님을 믿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내게로 되 돌려보내 주시겠다고 약속만 하신다면.”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네게 되 돌려보내주지 않는다면 이제 나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오! 하나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너는 그들을 삶에서 뿐 아니라 죽음에서도 내게 맡길 수 없단 말이냐?”  나는 그분 앞에서 울며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예, 그들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에서나 생명에서나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자 떨림이 가라앉았다.  믿음으로 나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나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아내 역시 어떤 예감을 느꼈고 여행을 갑자기 중단하여 그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전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 간증은 의료선교사와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정신과 의사 John White 박사의 저서 『The Cost of Commitment』에서 나온 내용인데, 이 간증을 다시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White 박사에게 아내와 아들이 비행기를 타서는 안 된다는 예감(지식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는 아내에게 그 말을 미처 전달하지 못했고 그들이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분명히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 그의 아내에게도 지식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 비극이 일어나기 직전 착륙한 공항에 내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는데(고전 12:7), 여기서 ‘나타남’이란 말은 각 신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산출하는 것으로, Tom Smail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성령은 신령화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몸(body)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이 거기서 하시는 일은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께서는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8-10)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어 알려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모든 신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되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성령의 은사라는 차원에서 볼 때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없습니다(고전 12:11).  그리고 은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행 1:6-8), 복음을 전하며(롬 15:18-19),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막 16:20), 건축자에게 주신 연장(도구)인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고, 이토록 소중한 성령의 나타나심인 은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은사는 개인의 만족이나 이기주의를 위한 것이 아닌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 신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기록된 말씀 밖에서 역사하지 않고(고전 4:6), 언제나 신자의 유익,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공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때문(엡 4:7)에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의 나타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인데(고전 12:8), Bruce B. BartonNeil Wilson은 이 은사에 대해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도 있고(고전 13:2, 8-12, 14:6), 또는 기독교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반면 이런 양면성을 가진 견해와 달리 주로 칼빈주의 신앙으로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은 Richard Pratt이 말한 것처럼 오직 한 가지만을 주장합니다.  “바울이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사실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 직접적인 계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을 것이다.”  즉 지식의 말씀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비밀스러운 것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John Archer“지식의 말씀은 구속계획에 실재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표현하는 교육의 은사”라고 말하면서 “이 은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라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은사는 진리의 말씀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진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은사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주시는 예언과 깊이 관련된 초자연적인 지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에 대해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롬 12:3), 사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지식에 대해 거부하겠지만, John Archer는 지식의 말씀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오감을 통해 사용된다고 말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복음전도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A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자가 지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목신경이 손상되어 있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당신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사건처럼(눅 7:1-10), 시공간을 초월한 즉각적 계시, 즉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오늘날도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강하게 부인하는 부류는 “이런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향해 사탄에게 미혹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리감을 두고 신중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부류는 “사실 나도 그런 은사를 체험하고 싶은데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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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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