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진리의 성령 2017. 3. 30. 12:15

신앙생활에는 ‘자연인’과 ‘강퍅한 육적인 신자’ 그리고 ‘영적인 성도’가 있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고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심령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말씀을 계속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성령께서 자유롭게 빚어 성숙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경건한 품성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더 이상 회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Bob Mumford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고 마귀는 나쁜 것이다.”라고만 외친다고 합니다.  수많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한 결 같이 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주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합니다. 그분만 받아들이면 당신은 건강하고 부자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하십니다. 교회생활 충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자가 회개하는 심령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이 첫 번째 단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수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자원을 놓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발점은 항상 회개입니다.  세례요한이 처음 와서 무엇을 외쳤습니까?(마 3:2).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시면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마 4:17).  베드로가 오순절날 한 첫 설교가 무엇입니까?(행 2:38).  사도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외친 복음의 설교가 무엇입니까?(행 17:30).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첫 번째 필요 사항은 회개라고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회개입니다.  하지만 회개에는 더 많은 뜻이 있습니다.  정의를 내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개란 우리가 옛 생활에서 추구하던 모든 것에서부터 돌이키고 예수님을 삶의 모든 근원으로 삼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우리 삶에서 근원으로 붙잡았던 그 어떤 것이든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죄, 우상숭배, 물질, 전통, 자기선행, 자녀, 학력, 경력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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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고전 15:14).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롬 10:9).  또한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해결하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것을 의미하는데(눅 10:18),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 권세의 어둠속에 가려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 가운데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17).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고전 15:19).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삶의 기반도 무너질 것입니다.  만일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면(고전 15:32),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거나(마 5:11), 윤리나 도덕을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엡 4:25-29).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최대 피해자인 동시에 사기꾼이 될 것입니다(고전 15:15).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거짓말에 속아 인생을 낭비한 피해자인 동시에 거짓말을 유포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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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예언

예언사역자 2017. 3. 25. 12:03

로마서 11장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선물을 거두시거나 부르심을 물리치지는 않지만, 이 주어진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와 같이 은사를 받더라도(눅 9:1), 결국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행 1:18, 25), 은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사무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었는데(삼상 16:1), 그 이유는 그가 계속 왕위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고(삼상 18:6), 여전히 영예와 명성을 누렸기 때문에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삼상 16:14).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길을 가던 중에도 예언을 했는데(삼상 19:22-24), 분명 그는 다윗에 대한 미움과 질투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삼상 18:29), 그가 가진 은사는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삶속에서 위선자의 모습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있어 얼마든지 은사가 발휘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R. T. Kendall은 성공회 목사소름끼치는 무서운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0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빈 공간’(God-shaped vacuum) 존재한다고 믿었던 뛰어난 과학자이며 기독교인 Blaise Pascal“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악을 행할 때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악을 행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사울 왕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에 들려는 태도는(삼상 15:24), 말씀(마 23:2)과 기도사역뿐만 아니라(마 6:5), 예언사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에스겔서에 보면 허탄한 묵시(거짓된 환상)아첨하는 복술(잘못된 예언)이 병행하여 등장하는데(겔 12:24), 당시 이스라엘의 거짓선지자들은 영적분별력이 없는 백성들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속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렘 28장),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예언은 그분의 약속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렘 14:13).  그러면서 이들은 백성들에게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예언을 남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예언을 했고(렘 14:14), 그분의 임박한 진노 대신에 평화만을 선포했지만(렘 23:16-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낸 참선지자들의 경고가 결국 입증될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이 이스라엘에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예언사역자가 구약의 거짓선지자처럼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려 한다면, 그는 결국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은 거짓된 예언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겔 13:2).


사실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잘못된 욕망을 가진 예언사역자가 사람들의 죄를 못 본체 하고 헛된 위로를 주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애 2:14, 슥 10:2), 여기서 가장 좋지 못한 경우를 찾아본다면 아마 거짓선지자들의 대표격인 시드기야처럼 사탄의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될 때입니다(왕상 22:5-28).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악령의 도구로 사용되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마 23:15), 더 심각한 것은 예언하는 사람 중에 한 결 같이 본인 스스로는 시드기야처럼 정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왕상 22:11).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벨릭스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죄를 지적하는 말씀(행 24:25)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거짓예언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예언자에게 진리를 말하지 말고 자신들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라고 압력을 행사할 때(사 30:10), 특히 거짓예언자는 영적분별력을 상실한 자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거짓된 예언을 할 수 있고(렘 23:16), 그것을 듣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거짓예언자가 쏟아내는 허황되고 황당한 잘못된 예언을 받아들입니다(렘 5:31).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지 않은 거짓예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고(렘 28:15), 그것을 듣는 사람들 역시 망령되고 쓸데없는 무익한 예언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딤후 4:4).


이렇게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꾸며낸 거짓된 예언은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나오는데(고전 14:29),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이지만(행 17:1-2),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많은 잘못된 예언들을 통해 적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임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살후 2:1-2).  사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 주의 날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살전 4-5장), 거짓교사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낸 거짓예언에 심히 흔들리고 있었는데(살전 2:2-3), 바울은 이러한 교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예언)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확고한 진리위에 견고히 서서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말 것을 명령하면서(살전 2:2), 주의 날이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현상을 인용하여 강조합니다(살후 2:3).  하나는 ‘배도하는 일’(마 24:11, 딤전 4:1), 즉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악의 세력의 출현과 다른 하나는 역사 속에서 사단의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요일 2:18),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누구인지 해석하기는 힘들지만 그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거짓된 가르침(예언)과 예언의 은사가 남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이런 문제를 알고 첫 번째 편지를 통해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살전 5:20-21).


이렇듯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짓예언자는 내면은 발람의 DNA를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마 7:15), 성경에 나와 있는 고린도전서 14장3절 말씀을 악용하여 축복을 구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6)라고 하신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본다면 이스라엘 왕 아합 당시의 왕실 선지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의 귀에 즐거운 거짓예언을 일삼은 대가로 부를 누리며 칭찬을 들었습니다(왕상 18:19).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사람을 칭찬하거나 아첨하기 쉽지만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갈 1:10).  솔직하게 말해 거짓예언자(마 24:24)나 삯군목사(요 10:12)는 항상 그들의 간사한 행위를 인하여 칭찬을 받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사실이지만(겔 34:1-3), 하나님이 보낸 진정한 사역자는 그분의 공의를 선포함으로써 핍박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마 5:11-12, 요 15:18-20).  따라서 누군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그들의 마음에 들려는 욕망이 있다면 그는 돈에 눈먼 발람처럼 거짓예언자일 가능성이 많고(벧후 2:15), 더 나아가 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약 3:1).  아마도 그는 가룟유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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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력들

즉 눈물, 경련, 신음, 고함소리, 육체적 고뇌,

또는 기력의 소진 같은 것으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체에 나타난 그런 영향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무데에서도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외적 양상을 보고서

그 사람들이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성경에는 그런 신체상의 영향들을 배제하라는

영분별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문제에 대해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잡음이 많이 들린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난 어떤 역사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창세 이후로 어떤 일에서건

대대수의 사람들이 크게 감동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란이나 소동이 없었던 적이 있을까요?

인간의 본성상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주의자들이 받은 인상들이

그들의 신체에 영향을 크게 미치곤 했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대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몸을 떨곤 했다고 해서

바울이 된 사울과 빌립보의 간수가 떨었던 것이

양심에 죄를 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크건 작건 신체에 미치는 영향들을 반대하는

모든 반박은 너무 경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거도, 기준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시기심 때문에 참 성령을 소요한 설교자들을

마치 거짓 영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성을 잃고 미쳐 버린

교만하고 가식적인 위장꾼들이며,

평화의 파괴자들로

감옥이나 족쇄에 갇혀 마땅한 자들인 것처럼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은

부흥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마음에

소중한 어떤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며,

또 부흥이 자신들로 하여금 잘난 체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에게서 정욕의 대상들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라사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들 지역에 오셔서

그분의 영광스런 능력과 은혜를 발하심으로

군대 귀신을 물리치시고

오랫동안 군대 귀신의 포로가 되었던

가련한 사람을 구원하셨을 때

모두 경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자신들의 돼지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모든 무리가 와서

그리스도께 자신들의 지경에서 떠나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자신들의 더러운 돼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자기 동네에 군대 귀신이 들어 있는 돼지 떼를 가지는 것이

그것들 없이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흥의 흠집들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목사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집행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크게 받게 될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 일을 그리스도께 맡겨 두어야 합니다.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자요

원수 갚는 것은 그에게 속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아 휘두르는

주제넘은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부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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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자연과학의 법칙과 인간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사실 죽어서 매장된 사람이 무덤 속에서 썩지 않고(행 2:31),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현재 인간 지식이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고전 15:1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탄의 속임수 때문입니다(요 8:44).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탄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눅 10:18)에 사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딤후 2:18). 즉 사탄은 한계를 갖는 자연 법칙이나 인간 이성에 호소하여 너무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정되면 기독교 신앙은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8:11-15).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고(행 17:32), 단지 신화나 전설 정도로 여기는 것은 미혹하는 자인 사탄의 꾀임에 빠진 것으로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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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으리라는 예감이 든 적이 있다.  우리는 따로따로 미국에서 남아메리카에 있는 볼리비아로 가야 했다.  아내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친 뒤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볼리비아로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며, 나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몇 나라,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그 외 나라들에 들러 학생 사역을 격려하고 볼리비아에서 아내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그 예감은 고통스럽도록 분명하게 다가왔다.  왜 되돌아가서 아내에게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이 예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가?  나는 예감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식의 말씀’ 이라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터였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비참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물론 나는 기도했다.  믿음으로 그것을 물리치려 했다.  그토록 강력한 예감이 있는데?  내 입은 바짝 말랐다.  하나님은 까마득히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나를 신뢰할 수가 없느냐?”  나는 깜짝 놀랐다.  “예, 주님을 믿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내게로 되 돌려보내 주시겠다고 약속만 하신다면.”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네게 되 돌려보내주지 않는다면 이제 나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오! 하나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너는 그들을 삶에서 뿐 아니라 죽음에서도 내게 맡길 수 없단 말이냐?”  나는 그분 앞에서 울며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예, 그들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에서나 생명에서나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자 떨림이 가라앉았다.  믿음으로 나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나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아내 역시 어떤 예감을 느꼈고 여행을 갑자기 중단하여 그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전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 간증은 의료선교사와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정신과 의사 John White 박사의 저서 『The Cost of Commitment』에서 나온 내용인데, 이 간증을 다시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White 박사에게 아내와 아들이 비행기를 타서는 안 된다는 예감(지식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는 아내에게 그 말을 미처 전달하지 못했고 그들이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분명히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비행기는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 그의 아내에게도 지식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 비극이 일어나기 직전 착륙한 공항에 내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는데(고전 12:7), 여기서 ‘나타남’이란 말은 각 신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산출하는 것으로, Tom Smail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성령은 신령화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몸(body)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이 거기서 하시는 일은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께서는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8-10)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어 알려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모든 신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되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성령의 은사라는 차원에서 볼 때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없습니다(고전 12:11).  그리고 은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행 1:6-8), 복음을 전하며(롬 15:18-19),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막 16:20), 건축자에게 주신 연장(도구)인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고, 이토록 소중한 성령의 나타나심인 은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은사는 개인의 만족이나 이기주의를 위한 것이 아닌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 신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기록된 말씀 밖에서 역사하지 않고(고전 4:6), 언제나 신자의 유익,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공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때문(엡 4:7)에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의 나타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인데(고전 12:8), Bruce B. BartonNeil Wilson은 이 은사에 대해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도 있고(고전 13:2, 8-12, 14:6), 또는 기독교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반면 이런 양면성을 가진 견해와 달리 주로 칼빈주의 신앙으로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은 Richard Pratt이 말한 것처럼 오직 한 가지만을 주장합니다.  “바울이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사실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 직접적인 계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을 것이다.”  즉 지식의 말씀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비밀스러운 것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John Archer“지식의 말씀은 구속계획에 실재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표현하는 교육의 은사”라고 말하면서 “이 은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라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은사는 진리의 말씀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진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은사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주시는 예언과 깊이 관련된 초자연적인 지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에 대해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롬 12:3), 사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지식에 대해 거부하겠지만, John Archer는 지식의 말씀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오감을 통해 사용된다고 말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복음전도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A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자가 지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붉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목신경이 손상되어 있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당신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사건처럼(눅 7:1-10), 시공간을 초월한 즉각적 계시, 즉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오늘날도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강하게 부인하는 부류는 “이런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향해 사탄에게 미혹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리감을 두고 신중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부류는 “사실 나도 그런 은사를 체험하고 싶은데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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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가능한 것’을 행한다면

거기에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는가?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고 하니까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이루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요술을 부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무능력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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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히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눅 24:36-41).  혹자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인 신앙인들의 생활 혁신을 가져왔는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이 사실임을 거듭 밝히고 있으며(행 1:3), 또한 이것이 장차 성도들의 육체 부활의 근거가 됨을 밝히고 있습니다(빌 3:21, 요일 3:2).  만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킨다면(딤후 2:18),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부활 후 보이신 증거와 일치하지 않습니다(요 20:27).  그리스도는 부활한 자신을 영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구운 생선을 먹어 보이면서 육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요 21:10-13).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빌 2:7),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확실히 보이심으로서(고전 15:5), 육체를 지닌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요 11:25-26), 장차 있을 육체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살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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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 목회인가, 자비량 목회인가?”라는 이슈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치열한 논쟁을 일으키는 문제 중에 하나인데, 이때 유급 목회보다는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8장2-3절로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9장12절에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당시 랍비들은 손일을 배우도록 요구되었고 실제로 젊은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직업 훈련을 받도록 촉구하였는데, 장막을 만드는 기술자인 바울에게 있어 이 기술은 확실한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가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린도에는 여러 종교를 전파하는 선동가(煽動家)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가르치는 선생은 자신의 학생들로부터 후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갈 6:6, 고전 9:4), 자신이 이 권리를 포기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교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고(고전 9:12), 값없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가 어떤 저의를 지니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고전 9:18).  쉽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침을 주는 그런 선생과는 다르다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이런 일로 장애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바울의 예를 들어가며, 자비량 사역은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을 하기 때문에 교회 부패에 천적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심각한 ‘돈’ 문제를 없으려면 오늘날에도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바울이 이사야 52장5절을 인용하여 로마서 2장24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불신자에게 모독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현대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성적인 문제와 명예욕)들 중에 하나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딤전 6:5), 교회재정에 대한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유급 담임목사는 로마에 의해 공인된 가톨릭 사제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비성경적인 제도일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철폐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거나, 오직 자비량 사역만이 오늘날 현대교회에 필요한 것이고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 혼자만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역자가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비량 사역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조금 특별하거나 성도들에게 짐 지우지 않는 스스로 돈에 깨끗한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바울의 자비량 사역이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목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역자들이 따라야 할 원형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지 요셉에게(마 13:55), 목수 일을 배워 평범한 노동자로서 충실했던 분이셨고(막 6:3), 죄를 인정할 필요가 없었지만(요 8:46, 고후 5:21, 히 4:15, 요일 3:5), 세례요한으로부터 회개를 위한 물세례를 요단강에서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막 1:9), 하나님께서 필수적으로 요구하신 일인 메시야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 4:1).  그리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마 4:13), 고향 나사렛을 떠나(막 1:9, 요 1:46),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온 마음을 쏟으셨습니다(마 4:17, 막 1:15).  한 마디로 목회이외에 다른 활동(목수 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히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목회사역을 말하면 어떠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고, 그러기 때문에 당나귀처럼 쓰임을 받았던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목회사역이 오늘날 모든 사역자에게 있어 유일한 모델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이들의 파트너인(눅 5:10),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직업은 ‘어부’였지만(막 1:16-20),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가족과 직업과 재산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를 위해 다른 직업을 일절 갖지 않는 가운데 순교할 때까지 목회에만 전념했습니다(마 4:18-22).  물론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주도해서 다른 여섯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적이 있었지만(요 21:3), 이것은 일곱 명의 제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마 28:7),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막 16:7), 그분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사실 돈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가룟유다 한 사람만 빼놓고(마 26:14-16, 요 12:6), 제자들 모두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는 가운데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목회에만 전념을 했습니다(막 10:28).  따라서 바울이 아덴에서의 선교사역 실패로 인해(행 17:34), 고린도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어 시작하게 된 자비량 사역을 오늘날 모든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처럼 돈 때문에 사역하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심과 소명 속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순회사역자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셨던 사역은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있어 성경적이기 때문에 유급목회만을 두고 삯군목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판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바울처럼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자비량(선교) 사역자도 필요하지만, 베드로나 안드레처럼 지역교회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역에 전념하는 유급목회자도 필요하기 때문에 자비량 사역만이 성경적이라고 못 박지 말아야 하고 교회에서 정해진 사례를 받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역자나 평신도는 자신이 갖지 않은 다른 은사를 갖고 있는 사역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충성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상급과 칭찬이 있겠지만(고전 4:2), 만약 자신이 하는 사역만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로마서 14장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른 사역자를 판단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약 4:11-12).  그러기 때문에 바울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면 바울같이, 베드로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면 베드로같이,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지(롬 12:3-6), 자비량 사역만이 성경적인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장황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어느 특정 구절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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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드러나고 열매를 맺힌다.

거룩한 감정들은 그 감정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성도에게 영향력과 효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로 기독교의 원리와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는 행위는

성도가 일생동안 실천하고 마땅히 행해야 한다.


믿음의 신실성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데 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요구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사악한 삶을 살면서도 또는 그들의 행위로는 전적인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도 신실함 마음이 있는 척하는 것은 극도로 터무니없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과 맞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죄의 길을 따라 살면서도 자신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자랑하거나 거룩한 삶과 실천이 없이도 죽은 뒤에 성도들과 같이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자신들의 심판자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실천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자기가 받은 은혜가 참된 은혜임을 보여 주는 최고의 증거라는 주장은 실천할 때 은혜가 온전해지고 완성된다는 성경 말씀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서 온전케 된다(요일 2:4-5).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할 때 사도가 특별히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인 행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만큼 참된 은혜의 표지로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는 감정적 미덕이나 성향은 없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랑은 행함으로 또는 사랑의 행위로 행사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믿음의 큰 증거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하여 느끼는 내면적인 감정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영혼이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 양심에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모든 표지 가운데서 가장 주된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해주는 또 다른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큰 증거라는 점이다.  이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고,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상태가 분명해질 것이다.  장차 하나님께서 영원한 보응을 위해 사람을 심판하실 때 사람의 영적상태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헤아려 보고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선포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판이 더 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의 양심과 세상에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래서 최후 대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이라고 불린다(롬 2:5).


거룩한 실천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는 근거가 된다거나

그것이 가치 있고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천이 믿음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로서

믿는 이의 신실함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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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요 10:17-18).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굴복하는 죽음의 권세(히 2:15)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롬 1:4).  둘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행 1-2장).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마 27:50), 제자들은 모두 그를 떠났고(막 14:50), 절망에 빠진 패잔병과도 같았습니다(요 20:19).  그러나 부활하신 주를 만난 후 그들의 신앙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으며 활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눅 24:36-53).  셋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롬 6:5, 9:8-11).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 모두로 하여금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였습니다(고전 15장).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며 자기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 11:25).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과 사단의 세력에 대한 승리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롬 4:25, 5:10, 계20: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도록 역사한 사단의 세력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창 3: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단은 패배하고 하나님 나라는 건설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믿음과 구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전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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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글에 가명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댓글을 남기면서 익명성 뒤에 숨으려하는 좋지 못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만 정상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언제나 가명보다는 실명을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댓글을 달 때 실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이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예의에 벗어난 댓글을 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에 쓰여진 댓글들을 간혹 읽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욕설을 무차별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신자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엡 4:18),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불신자 못지않게 비난이나 악성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사람은 ‘말기증상’은 아니지만 귀신들릴 수 있는 ‘초기증세’라고 볼 수 있는데, 성경은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 3:15)라는 말씀처럼, 만약 이런 행동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이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측면을 다루기 위해 마음의 치유와 귀신축출 사역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은 자신의 삶을 조금도 그의 수중에 넘겨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접근할 길이 없지만(벧전 5:8-9), 가령 마음속에 상대방에 대한 미움, 원한, 복수심, 두려움 등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사단에게 역사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엡 4:26-27).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믿었던 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은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눅 13:25-27).  마찬가지로 귀신들린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막 5:1-20), 그러한 사람에게 귀신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증세들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귀신에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귀신들린 것처럼 보이는 증세라고 해서 모두 귀신이 역사한 결과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귀신들림’인지 아니면 ‘정신병’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고(마 4:24, 막 1:34), 귀신들림이 영적인 현상이라면 정신질환은 육체적인 병이기에 귀신들림은 축귀사역을 통해 ‘영적치유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정신질환은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아이처럼 귀신들림과 신경학적 증상인 뇌전증(epilepsy)이 결합하여 발생할 수도 있지만(마 17:14-18), 이런 경우에는 영적치료와 의학적 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하고, 단지 문제가 되는 행동이나 증세만 보고 그 원인이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진단에 의해 좋은 추측을 만들 수는 있지만 영분별의 은사(고전 12:10)를 받지 않는 이상 성령께서 이런 면에 도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Frank Hammond는 『Pigs in the Parlor』에서 축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일곱 가지 징조들에 대해 이렇게 제시합니다.  ① 감정적인 문제들 (증오, 분노, 공포, 거절, 질투, 우울증, 걱정. 열등감, 불안감), ② 정신적인 문제들 (정신지체, 우유부단, 타협, 혼란, 의심, 기억상실증), ③ 언어상의 문제들 (거짓말, 저주, 신성모독, 비평, 조롱, 악담, 험담, 비방), 성적인 문제들 (정욕, 변태, 동성애, 자위행위, 호색, 간음, 근친상간, 매춘, 흥분제 사용, 공상적인 성경험), 중독증 (마약,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약물, 음식), 육체적인 질병들 (귀신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니지만 귀신에게 억압과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던 여자 / 눅 13:10-17), 종교적 오류 (거짓종교/집단들, 기독교 이단들, 신비주의와 강신술, 거짓교리, 사이비). 반면에 Thomas White는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 위에 열거된 것들 외에 두 가지를 더 추가시켰는데 하나는 생리학적 요인(간질, 편두통, 건망증, 노쇠현상, 조울증, 스트레스, 피로증후군, 월경전 증후군)과 상황적 요인(결혼생활의 파탄, 가족 간의 불화, 재정적인 압박, 가족의 질환, 계절적인 스트레스, 불순한 일기, 우울한 사회분위기) 등을 제시하면서 귀신의 역사로 인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심리적, 정서적, 생리학적 요인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나타남에 의해 직면되어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증세들(심하게 귀신들림)을 열거해 본다면 Francis MacNutt가 말한 것처럼 ‘신체적인 뒤틀림’‘목소리의 바꿈’ 그리고 ‘얼굴의 표정’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체적 뒤틀림의 현상에 대해 찾아보면 마가복음 1장26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체적인 경련 즉 돌발적인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인정하며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혹은 기도모임에서 평상시 그런 일이 전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귀신에게 억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래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누가복음 8장28절에 보면 거라사의 광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상시 음성하고는 전혀 다른 매우 부자연스러운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귀신들린 여성에게 축귀사역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말을 하거나 혹은 비열하고 무례한 음색으로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귀신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것의 가장 흔한 외부적인 표시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인데, 만약 상담을 받던 사람이 대화중 더 이상 상대방의 눈을 보려하지 않고 눈이 위로 말려 올라가 섬뜩한 느낌의 흰 자만을 보일 때, 이것은 축귀사역자에게 도움 받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징후로 보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인 예로 마귀의 출현에 대한 또 다른 징후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치유사역자인 Francis MacNutt 박사는 『Deliverance from Evil Spirits』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더러운(좋지) 않은 냄새와 무엇보다도 싸늘한 냉기이다. 성령 하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종종 뜨거운 열기를 경험한다. 그러나 악한 영이 나타나면 방안에 차가운 냉기가 돈다.”  이외에도 귀신들린 사람의 증세는 엄청난 완력을 보여주기도 하고(눅 8:29, 행 19:16),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막 5:6-7, 행 16:16-18), 말을 하되 ‘나’ 대신 ‘우리’ 라는 복수로 말을 사용하는데(마 8:29), 자신을 일인칭으로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을 이인칭, 그리고 자기가 내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삼인칭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눅 8:27-28).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징후들이 나타날 때 그것이 마귀의 행동 결과인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합심 기도할 필요가 있고(약 5:14), 아니면 더 숙련되고 경험이 많은 축귀사역자에게 보내야 할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악한 영의 출현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법이 있다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처럼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서이지만(고전 12:10), 문제는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논쟁이 심한 틈을 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대부분의 교회가 마귀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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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성

연구자료 2017. 3. 2. 12:14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된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시온산성’에 붙인 명칭이 바로 이 ‘다윗 성’이다(대상 11:5, 삼하 5:6-9).  이 성은 본래 이스라엘 족장시대 때부터 있었는데(창 14:18), 동쪽의 기드론 시내와 서쪽의 두로베온 계곡의 능선, 그리고 북쪽의 힌놈 골짜기에까지 닿아 있는 큰 성읍이었다.  훗날 다윗은 이곳에 왕궁(대상 15:1)을 건축하였으며 솔로몬은 ‘밀로’를 재건하였는데, 밀로는 방축(防築)이자 거대한 보루(堡壘)로서 옛 부터 있던 가나안의 능선을 보강한 것이다(왕상 9:15).  이처럼 왕궁을 건축한 다윗은 또한 이곳에 장막을 치고 레위인들을 오벧에돔의 집에 보내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와 장막 안에 두었다(대상 11:1-25). 여호와의 언약궤는 B. C. 959년까지 이곳에 안치(安置)되었으나 솔로몬이 모리아 산 북쪽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후에 궤를 그곳으로 옮겨갔다(왕상 8:1, 대하 5:2).  한편 성경에 의하면 다윗 성에는 장지(葬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다윗(왕상 2:10), 및 솔로몬(왕상 11:43)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유다 왕들(대하 12:16, 16:14, 24:25)과 제사장 여호야다 같은 사람들(대하 24:15-16)이 이곳에 묻혔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같은 자취를 볼 수 있는데, 다윗 성 남단부에 일부 남아 있는 반원통 모양의 지하 납골당이 바로 그곳이다.  B. C. 702년경 앗수르의 침략이 있기 전 히스기야 왕은 다윗 성을 중건하고 실로암 못을 파기도 하였으나(대하 3장), 결국 이 성은 B. C. 586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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