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셨던 성자 그리스도께서(요 1:1),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마 1:18), 인간의 몸을 입고(빌 2:7), 이 세상에 오신 놀라운 탄생의 사건도(눅 1:26-38),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반면 그리스도의 부활(마 12:40)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8:1-20, 막 16:1-20, 눅 24:1-53, 요 20:1-29).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진(행 2장)후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도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행 2:23-24, 3:14-15, 4:33, 10:39-41, 13:30, 17:2-3).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각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과 그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롬 1:4, 4:25, 6:9, 10:9, 고전 15:4, 엡 1:20, 살전 4:14, 딤후 2:8, 벧전 1:3,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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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당신과의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십니다.

그 사랑의 관계를 사실적이며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어떤 일보다도,

당신의 전 존재를 받쳐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당신을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고 경험하는데 관련된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어떤 사명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사랑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기 전에

당신이 관계로의 초청에 응하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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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사역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직접 부활하신 분은 물론 성자 그리스도셨지만(요 2:19), 여기에는 성부와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하셨습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였고(시 16:10),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롬 6:4). 그리고 성자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취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노라고 증거 했고(요 10:17-18),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했습니다(요 11:25).  그러므로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의 뜻과 능력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었습니다(롬 1:4).  그리스도의 출생(마 1:20)에서부터 부활(롬 8:11)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라도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벧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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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넘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악의 권세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수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악의 희생물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확인하고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우리는 영들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금도 성령님과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천상의 권세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악의 권세들과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가공할 힘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귀는 스스로를 ‘빛의 천사’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고후 11:14)

마귀는 그 정도로 교활하며 교묘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교(邪敎)의 가르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단들은 항상 언제라도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런 악의 권세들에게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성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점성술과 강신술,

여러 다양한 사교와 거짓 가르침과

마귀의 교리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관심이 부흥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저들의 표적들이 됩니다.

그들의 외관은 너무 그럴듯하고 너무나 가식적이며,

마치 우리의 친구들인 것처럼 나타나서,

우리의 영혼들과 기독교인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한몫 해주려는 듯이 보입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아야만 한다는

긴박성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모른다면

마귀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면서

여러분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디모데후서 2장26절에서 ‘마귀의 올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희생물 또는 포로가 되어 끔찍한 결과들로 인도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알아야 하며,

이것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전능한 권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전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때에만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에베소서 6:10-13)


로이드 존스 『귀신들림, 점술, 강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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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 역시 살과 뼈를 가지고 음식을 먹는 등 육신을 지니신 인간이었습니다(눅 24:39-43). 즉 부활 이전과 같은 몸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 이전의 육의 몸과 질적으로 다른 신령한 몸이었습니다(고전 15:44).  부활 이전의 육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은 닫힌 공간에도 들어가고 홀연히 사라지는 등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눅 24:31, 36, 요 20:1-3, 19, 21:7).  또한 부활 이전의 육의 몸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고전 15:50),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은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않으셨습니다(막 16:19).  이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몸이 그 이전의 몸보다 신령하며 영광스러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끝내시고 다시 하나님으로 높아지는 한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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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H. Kraft는 기적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다.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치유, 귀신축출, 천사의 보호,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을 통한 계시와 인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 죄인을 용서하는 일,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거나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는 것, 세상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것 등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세상의 관점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적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실재에 있어서는 서양적인 시계관이 그렇게 하듯이 우주를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영적인 특면을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것과 같은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적의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사물을 보고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기준에 따라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저서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나오는 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고 계신 어떤 신비한 영역에서의 비정상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해 놀라운 기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의 선봉에 서있는 John MacArthur는 『Charismatic Chaos』에서 “성경 속에서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다음 세대들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는다. 혹은 성경은 신자들이 성령의 어떤 기적적인 표현들을 구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다시 인용하면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성경에 의하면 은사들은 교회를 강화시키고(고전 14:4),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고(고전 12:7),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MacArthur는 다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이 신자들의 강화를 위해 주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가? 아니다. 사실상은 진실은 정반대의 것이다.”  사실 MacArthur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가 교회를 강화하는 목적에 대해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솔직히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관련된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7절과 14장3-5절에 관하여는 결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인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읽거나 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은사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거나(엡 4:13), 진보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는 진리의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표적과 놀라운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고(막 16:14-20),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역하면 안 된다는 명확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요 14:12), 그분이 하신 일들이 바리새인처럼 눈에 아무리 낯설게 보일지라도(마 12:22-24), 그 일을 우리가 마땅히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행 5:12)과 예수님의 제자들(행 6:8, 8:6)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하는데 있어 능력 나타남과 기적적인 은사가 필요했고(행 8:12-13), 교회의 탄생, 즉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는데 필수적이라면(막 16:17-20), 오늘날처럼 죄악이 넘쳐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하고 악한 세대(마 17:17)에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엡 4:13),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더욱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14:11),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행 9:36-42).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을 했고(행 9:29),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행 17:1-4).  구약성경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을 전도할 때(행 17:16-18), 바울은 어김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지만(행 18:19), 반면에 이방인을 다룰 때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롬 15:18), 말씀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Palmer Robertson은 William Carey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람 마음 가운데 확신하는데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때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인데(행 8:4-8), 그 사례들을 찾아본다면 먼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일어날 때(행 14장)와 귀신들린 여종 사건(행 16장),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들 앞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희한한 능을 행할 때였습니다(행 19장).  이렇듯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에게는 다른 권위와 증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24-25).


D. A. Carson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라고 상기시켰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만 한정되어 있다거나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또 다른 이유로 은사가 기록되지 않은 목회 서신이나 바울의 후기 서신을 내세우면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할 것과 신약성경의 기록의 모든 배경은 사도행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교리를 서신서 위에만 세워서는 안 되고 서신서들은 반드시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타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눅 17;17), 분명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고전 15:1-4),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고전 12:3).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더 확실하게 증거 하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반드시 필요하고(막 16:20), 이렇게 교회 속에 나타난 은사들은 결코 진리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복음의 능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고전 2:4).  그 이유는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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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희망은 있어도 

실제 사업이나 일에 손을 뻗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실패 공포증에 걸려있다.


왜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하면

그 일을 달성하기까지의 곤란이나 난관을 미리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실패 공포증이나 난관 기피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왜 가능한 적극적인 면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어려운 점만 생각하는 거요.”


어떠한 일이든지 난관이 없는 것은 없다.

그러나 돌파할 수 없는 난관도 없다.

난관 앞에 걸음을 멈추지 말라.

어려운 점만을 헤아리고 있어서는

개인이나 사회나 아무런 발전도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은 흔히 이렇게 반문한다.

“그 곤란한 경우를 무슨 재주로 극복할 것입니까”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기 일쑤다.

“신념으로서 극복할 수 있소”


곤란을 돌파하는 데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 바로 무기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재주나 수단을 찾는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재주와 수단이

바로 신념이라는 것을 모른다.

신념이 강하면 어떤 일이든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노만 빈센트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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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예언을 증거로 들 수 있는데, 그리스도가 오시기 천 년 전에 다윗은 이미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시 16:10).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라고 설명하였고(행 2:31, 13:35), 예수님 역시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난 것’을 미리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6:21, 20:17-19, 막 8:31, 눅 9:22).  또한 복음서의 기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들 수 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요 20;19)은 물론 수백 명의 사람에게도 나타나 보이셨습니다(고전 15:6).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다 순교한 증인들을 그 증거로 들 수 있는데,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다 도망치던 제자들(마 26:56)이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들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록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역사상 분명히 있었던 일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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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바로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우리의 죄성을 정확히 파악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권5과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는 훈련생들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5-6장)은 2권5과를 공부하는 훈련생들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며,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신가는 물론 우리가 누구인가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죄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주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죄의 보편성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며, 그 성격은 어떠한가?  성경에서는 죄를 설명하는데 몇 가지 단어들을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그릇된 행위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느냐 아니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소극적 의미의 그릇된 행위는 결함이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그것은 과실, 실수 또는 실책이다.  달리 설명하면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표적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결국 죄란 선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악함, 성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적극적인 죄는 위반을 말한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선 것이며 불법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의를 어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류의 단어들은 죄와 관련해서 어떤 도덕적인 기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준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법을 어긴 것이다.  우리의 실패의식은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위 뒤에 있는 생각 즉 그 동기에 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 모든 인간이 여기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높고 의로운 하나님의 율법만큼 우리의 죄 많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죄의 또 다른 측면은 죄의 결과이다.  죄의 결과 중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일 것이다.  인간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에 대한 주된 주장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켰다고 말한다.  죄는 필연적으로 분리를 가져오는데 이 분리란 ‘사망’ 즉 영적사망이요, 유일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생긴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성경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그 분이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굶주림이 있다.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신문에서 자극적인 뉴스를 요구하고 영화에서 도가 지나친 사랑과 범죄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 수영장과 술집들, 자동차 경주와 오토바이 경주, 마약과 성과 폭력의 난무?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족을 찾고 있다는 증거이다.


죄가 가져온 또 다른 결과는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포로가 되게 한다.  죄는 단순히 잘못된 외적 행동이나 습관이 아니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내적 부패이다.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것은 죄가 인간성의 내적 타락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악의 오염이다.  결국 죄는 인간성에 뿌리 깊게 내재하게 되고, 우리의 자아를 통제하게 된다.  또 다른 죄의 무서운 결과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다.  죄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과의 가르침과는 달리 죄는 우리 자신을 첫째에 두고, 이웃을 둘째에, 그리고 하나님은 뒤 구석 어디에 두게 만든다. 이러한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적응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자기희생의 자세로 바뀔 수만 있다면, 우리의 갈등(부딪힘)은 끝이 날 것이다.  이 자기 희생을 성경에서는‘사랑’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며 이 목적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시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믿음은 필요에서 생긴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자신의 병의 중함을 깨닫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치료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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