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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14 지식의 말씀

어느 날 오후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분은 내 마음에 그날 밤 한 젊은이가 예배에 참석할 뗀데 그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께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남자들 중 절반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이름은 John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은 바로 그날 아침에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성령께서 그녀에게 “네 아들 John에게 예배에 함께 가자고 말하라.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같이 가자고 간청했고, 그는 불신으로 가득 찬 채 “좋아요. 엄마 제가 가도록 하지요, 만일 하나님이 저의 이름을 부른다면 제 인생은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저녁예배 때 나는 성령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을 전하고 John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당연히 John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었고 지식의 말씀이었다.  그는 그날 그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엄마의 편지를 파일에 보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Mighty Manifestation』에 나오는 복음전도자 Reinhard Bonnke의 간증인데, 사실 지식의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은사로 성경이외의 다른 초대기독교 문서에도 이 구절을 사용한 기록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은사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지식의 말씀은 다른 은사와 달리 전후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하는데, 모든 성경주석가들은 위의 구절만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확실히 이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말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이 은사가 신자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줄 수 있는 능력, 즉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지식이라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교사들에게 있는 지식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은사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견해를 살펴본다면 Calvin은 골로새서 2장3절 말씀에 근거하여 지혜와 지식은 서로 관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지식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해석했고, John Archer는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 실린 글을 인용하여 성령께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나 상황을 계시하시는 정신적 인상, 그림 혹은 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사이고, Peter Wagner는 “지식의 말씀은 몸에 성장과 여러 가지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라고 하며, Bruce B. Barton은 “이것은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반면 Richard L. Pratt, Jr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말씀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일상적으로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 즉 배우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장시간에 걸친 집중력을 가지고 놀라운 양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낸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알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는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즉각적으로 주어진 초자연적인 지식, 즉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판단과 추론에 의해 도출된 자연적인 지식이 아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먼저 신구약 성경에서 그 실례를 찾아본다면 하나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하나님과 주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예물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어두는 파렴치한 죄를 지었을 때 엘리사가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되고(왕하 5:20-26),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이 내려졌는데(행 5:1-11),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때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은사는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조금 더 찾아본다면 먼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예수님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사람의 외모에 의해 판단하시지 않고(사 11:3),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여인의 영적인 갈증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과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요 4:10-26).  이런 초자연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전형적인 본보기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이미 그의 성품을 훤히 아셨던 것과(요 1:46-48), 처음 만난 삭개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일들을 통해(눅 19:1-10), 이 지식의 말씀이 현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므로 전지하셨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요 10:30),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눅 2:52).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는데(빌 2:6-11), 예를 들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할 때까지 기다리셨고(눅 5:17),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능력의 근원은 그의 신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존함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눅 4:14-21).  즉 인성의 한계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적능력을 빌어 사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마 12:28).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나 집회에서 종종 누군가가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물론 ‘분변하라’는 말씀(고전 14:29)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 그리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는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잊고 사는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성령의 음성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든 은사는 본래 교회의 유익과(고전 12: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엡 4:12), 사실 몸의 필요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아는 것도 지식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렇게 볼 경우 신비스러운 지식과 성경 계시와의 관계 면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것은 ‘계시’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가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신중해야하는 이유는 지나가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 있는 말씀처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Charles Spurgeon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과 반대로 나오는 계시가 없듯이 한 개인을 위한 지식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다.”  즉 성령의 은사가 교회의 각 지체에게 유익하고 조화롭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는 가운데 바르게, 그리고 분별하는 가운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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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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