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두 가지 신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곧 인간으로 낮아지신 비하(卑下)의 신분과 하나님으로 다시 높아진 승귀(昇貴)의 신분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삼위 하나님 가운데서 제2위 하나님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요 1:3), 우주를 통하시고(요 17:2), 율법을 제정하신 존귀하신 분이었습니다(마 5:21-48).  그러나 인간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으로서의 위엄을 잠시 보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낮추셨습니다(빌 2:6-8).  이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즉 비하(卑下)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심으로써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행 1:9), 다시 원래 상태로 높아지신 것을 그리스도의 승귀(昇貴)라고 합니다(히 1:8).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요 1:14), 즉 인간의 몸을 입으실 때 잠시 보류해 두었다가 다시 찾으신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 신분 회복을 의미합니다(요 6:62).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잠시 낮아지셨으나(요 3:13), 당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본래 신분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영원히 오르셨던 것입니다(히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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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시 사역

예언사역자 2017. 1. 28. 12:12

석가모니는 사람이 스스로 욕심을 없앨 수 있게 한다는 ‘팔정도’(Eightfold Path)라는 제도를 만들어 냈는데, 이 팔정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에 이르게 되고 죽음과 환생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허설(虛說)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지옥의 무저갱과 같아서 아무리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욕심을 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만 지나온 과거 역사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돈이 많아 삶의 행복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비참한 삶으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 근래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인간이 돈에 중독되거나 맛을 들리면 나라 전체도 말아먹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불신자라면 이해가 되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집사 직분을 받아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지옥에 갈 수는 있겠지만(눅 6:46-49), 가장 큰 원인을 찾아본다면 아마 가룟유다(마 26:15)나 바리새인(눅 16:14)처럼 돈에 환장하거나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에서 떠난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딤전 6:10).  이렇게 돈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한결 같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그분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막 7:6).


구약성경에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이며(신 23:4), 술사인 발람은(수 13:22), 히브리인이 아닌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을 부추겼던 사람인데(민 25:1-3), 돈을 지나치게 밝히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모압 왕 발락에게 자신의 예언을 팔아먹은 대표적인 파렴치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16).  사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 광야 사십년 간은 엄청난 훈련을 받는 기간이었지만(민 14:33),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일곱 족속보다(신 7:1), 더 무서운 적이 있었다면 그가 바로 술사 발람이었는데(수 13:22), 돈에 미친 이 사람이 얼마나 심한 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끼쳤는가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무서운 계책으로 인해(민 31:16), 싯딤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자들의 미인계에 속아 간음하다가 거의 멸망당할 뻔 했습니다(민 25:1).  결국 염병이 퍼져 하루아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고(민 25:9),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음행을 저지르기 위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를 창으로 찔러죽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민 25:7-9).  사실 발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영감을 받는 이방 선지자이지만 돈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해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유 11절).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역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이용하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언사역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금전적인 것이 개입되는 것인데, 가령 그것이 예언(고전 12:10), 치유(고전 12:9), 기름부음(고후 1:21)이든 간에 거기에는 항상 돈(회비)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산상수훈 ‘강해설교’를 하실 때(마 5-7장), 아니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기 위해 ‘치유집회’를 열었을 때(행 3:1-10), 더 나아가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그들이 방언을 받고 예언을 하는 ‘은사전이 집회’를 했지만(행 19:6), 이들이 돈을 받고 성령집회나 세미나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말씀 세미나’, 그리고 ‘제자훈련 세미나’나 ‘성령 컨퍼런스’와 같은 집회를 열 때 당연한 것처럼 회비를 받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합니다(고전 9:18, 고후 11:7).  무엇보다도 사역자들은 발람같이 돈에 미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교묘하게 이용하지 말아야 하고(벧후 2:15-16), 미가 선지자가 외치는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미 3:5).  이 말의 의미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도덕적, 정신적 향상보다는 한조각의 떡(물질)을 위해 백성들을 속여 번영과 구원을 예언하였고(렘 6:13), 자신들의 잇속만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헛된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렘 5:31).


사실 돈 때문에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예언사역자들만이 아니기에 미가는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친다.’라고 불평했는데(미 3:11), 이 말은 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할 재판관이 뇌물을 받아 판결을 하고(사 1:23, 미 7:3),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는 제사장은 돈을 위하여 설교를 하고(렘 5:31, 6:13), 백성들이 죄악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해야할 선지자들 역시 돈의 맛을 알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점쟁이가 점을 치듯이 거짓으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겔 22:25).  이것은 비단 구약시대의 사역자들만이 아니라 신약시대 교회사역자들 역시 이러한 유혹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교회 안에 돈 많은 부자들에게 편애를 행한 것인데(약 2:1-4),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Paul Cain은 이러한 것을 열왕기하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게하시 사역’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왕하20-27), 솔직히 이런 죄에 빠질 가능성이 가장 많은 사역자가 있다면 바로 치유나 예언을 행하는 사람들이고, 물론 목사나 신학자도 포함되어 있지만(약 3:1),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특히 예언과 치유사역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행하고서도 지옥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마 7:22),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마 24:24).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역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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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위대한 설교자 Spurgeon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악을 거부하고,

진리를 옹호하는 일에는 두려움을 몰랐다.

젊은 시절에 경험한 분명한 회심과

청교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성경해석 방법,

천부적인 유머감각과 맑은 목소리,

그리고 적절한 몸놀림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을 지닌

최고의 설교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또한 누구보다도 기도의 위력을 믿는 사람이었고,

그의 배후에는 항상 기도하는 지원부대가 있었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그야말로 기도가 영혼의 본능이었고

삶의 성취였다.

그의 기도문들은

그 유명한 설교 내용들보다

때로는 더욱 깊이 있고 아름다우며

세월의 벽을 뛰어 넘어

우리를 감격하게 하고 

‘박동수’(搏動數)를 높인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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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나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였고(요 2:22), 이러한 사실은 제자들의 풍부한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직접 보며 만지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고(요 20:28),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리스도 되심을 전파했습니다(행 2:14-36).  요한 역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했으며(요일 5:1), 야고보는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거 했습니다(약 2:1).  그뿐 아니라 제자들의 증거를 받은 많은 유대인들도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행 2:41, 4:4).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 것은 육신적인 친교나 인간의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믿음으로 되어집니다(고전 12:3).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성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기보다 오직 성령의 증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엡 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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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 한 사람 있었는데, 이분은 게이바를 운영하면서 40년간 동성애 세계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탈동생애 운동가이며 사역자의 길을 걸어가는 목사님으로 오래 전 이 분의 간증을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동성애자의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오랫동안 몸으로 직접 겪었던 사람이기에 이분만큼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훤히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고 성경을 기초로 해서 여러 서적들과 자료들을 참조한 적은 있었지만 이분처럼 그러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동성애자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가령 동성애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그들과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동성애자가 겪는 심적인 고통이나 질병에 대한 지식을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그 어두운 세계 속에 살면서 몸(?)으로 경험한 사람만큼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동성애자에 대해 무엇인가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동성애자의 세계 속에서 더러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동성애자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이나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의학적인 용어로 ‘공상허언증’에 걸린 사람이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을 좋아하는 마귀의 자식(요 8:44)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보면 야고보의 믿음은 변절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에도(행 12:2), 여전히 열 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 그를 대신할 자(사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반면에 가룟유다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배반했기 때문(요 18:3)에 그가 목매어 죽었을 때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행 1:15-20). 따라서 베드로는 사도로 선택받을 만한 사람의 자격을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라고 오순절 날 일백 이십 명 앞에서 제시합니다(행 1:21-22).  여기서 베드로는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증인의 자격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사람이어야 하는데(요일 1:1), 만일 체험해 본적이 없다면 그 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는 분야에 대해 논할 기회가 생긴다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고(잠 14:12), 하나님 앞에 위증죄를 범하지 않는 일이지만(시 24:3-4), 더 나아가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고 억측을 부리거나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쳤는데(행 7:55-58), 오늘날 누군가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분명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계시지 않고 앉아 계십니다. 앉아 계신단 말입니다! 당신은 그것도 모릅니까?”  사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6:64, 눅 22:69), 신약 저자들의 증언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막 16:19, 행 2:35, 7:55-56, 롬 8:34, 골 3:1, 히 10:12, 12:2), 여기서 하나님의 우편에서의 의미는 그분의 위엄과 영광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시 110:1, 빌 2:9-11, 히 1:3, 벧전 3:22), 더 나아가 시편 기자가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 되시나니’라고 말한 것처럼(시 121:5), 예수님은 돕는 자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말해줍니다(시 110:5).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성경에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설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를 이단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경구절 하나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이단사냥꾼이며, 오늘날 성도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죽은 정통신학,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쟁과 논쟁을 일삼는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메마른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체험을 성경말씀보다 위에 두지 말아야 하겠지만(고전 4:6),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체험을 다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지는 말아야 하는데(요일 4:1), ‘오직성경’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만의 성경이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은 어느 신학자의 말이나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신학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병든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Martin Luther가 중세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천명하기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주장했지만(롬 1:17), 문제는 이것이 너무나 지나쳐 그는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을 강조한 믿음’의 말씀을 지푸라기 서신으로 깎아내렸는데(약 2:14),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불에 타서 없어질 잡스럽고 쓸모없는 말씀이었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요 20:31, 딤후 3:15-17),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벧후 3:16), 삶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요 14:21).  따라서 성경말씀을 취사선택하거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바리새인처럼 어떤 특정 성경구절만을 가지고 인용하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이단들이 하는 짓이고(마 15:1-9), 정상적인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접촉점을 찾기 위해 늘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던 구세군 창시자인 William Booth는 제l회 졸업식 때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잃어버린 영혼을 얻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러분을 2년씩이나 이곳에 잡아두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옥에 5분만 갔다 온다면 지난 2년간 배운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는데,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난 미친개처럼 물고 뜯고 싸우는 사람들이(갈 5:15), 만약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한다면 분명 사울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며 기도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행 9:9).  사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행 23:8),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마 22:29), 솔직히 오늘날의 문제는 사두개인처럼 두 가지를 모르는 무지에 있다기보다는 한 가지 조잡한 신학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래 전 R. T. Kendall 목사는 균형 잡히지 않는 진리 때문에 생긴 불필요한 문제를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외면당한 적이 있었는데, Kendall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 말씀은 진리는 아는 것을 감사하지 않고 진리를 나누려고 애쓰는 이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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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당신은 소그룹원들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소그룹원들과의 사랑의 관계는 영적 성장의 기초가 됩니다.


제자훈련의 또 다른 성장영역은 바로 대인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성장하는 것이 제자훈련의 또 다른 목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데, 대인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건강한 성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훈련을 통해서 대인관계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1. 투명해지십시오.

대인관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이 나를 알고 내가 상대방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특별히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개방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내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섬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가짜의 나’가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 자신을 상대방에게 과감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개방하는 것과 개방하는 내용이 훈련생들 모두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벗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2. 민감해지십시오

투명해진다는 것은 내 자신을 상대방에게 열어놓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민감해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필요와 상대방 자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상대방과 친밀감 있는 관계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투명하지 않은 나 자신이 ‘가짜의 나’ 이듯이 상대방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나에게 허상의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절대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에게 민감해진다는 것은 상대방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수용하십시오.

수용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서로에게 굉장한 존재의 부담이 됩니다.  다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훈련을 통해서는 우리는 상대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의 장점과 단점, 상대방의 기질 심지어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위치 모두를 비판 없이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수용한다는 것은 사랑의 기초입니다.


4. 갈등을 피하지 마십시오.

어떤 관계이든지 자연스럽게 순탄하게 성장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갈등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입니다.  대부분의 대인관계는 갈등을 어떻게 성숙하고 건강하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그 성장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만 성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제자훈련 안에서 대인관계의 성장을 경험하고 싶다면 갈등을 피하지 마십시오.  갈등을 해결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듯 갈등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누구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성숙을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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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조차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동시에 하나님이란 사실을 처음부터 확실히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으나(마 11:2-5), 바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의아스러워했습니다(막 4:41).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을 지녔고(요 10:30), 하나님의 아들이며(마 11:27), 부활할 것을 직접 말씀하셨으나(마 17:22),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임을 믿지 못했습니다(요 20:9, 25).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모습을 지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빌 2:5-11)이 이성적 사고나 인간적 경험으로는 너무나 어렵고(고전 2:14), 오직 신앙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함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히 11:6).  따라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실로 성령의 감화로서만 가능한 일이며(고전 12:3),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진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롬 7: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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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분은 내 마음에 그날 밤 한 젊은이가 예배에 참석할 뗀데 그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께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남자들 중 절반의 이름이 John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이름은 John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은 바로 그날 아침에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성령께서 그녀에게 “네 아들 John에게 예배에 함께 가자고 말하라.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같이 가자고 간청했고, 그는 불신으로 가득 찬 채 “좋아요. 엄마 제가 가도록 하지요, 만일 하나님이 저의 이름을 부른다면 제 인생은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저녁예배 때 나는 성령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을 전하고 John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당연히 John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이었고 지식의 말씀이었다.  그는 그날 그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엄마의 편지를 파일에 보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Mighty Manifestation』에 나오는 복음전도자 Reinhard Bonnke의 간증인데, 사실 지식의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은사로 성경이외의 다른 초대기독교 문서에도 이 구절을 사용한 기록이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은사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지식의 말씀은 다른 은사와 달리 전후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하는데, 모든 성경주석가들은 위의 구절만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확실히 이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말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이 은사가 신자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줄 수 있는 능력, 즉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지식이라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교사들에게 있는 지식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은사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견해를 살펴본다면 Calvin은 골로새서 2장3절 말씀에 근거하여 지혜와 지식은 서로 관련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지식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해석했고, John Archer는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 실린 글을 인용하여 성령께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나 상황을 계시하시는 정신적 인상, 그림 혹은 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적인 유추나 설명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은사이고, Peter Wagner는 “지식의 말씀은 몸에 성장과 여러 가지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라고 하며, Bruce B. Barton은 “이것은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반면 Richard L. Pratt, Jr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말씀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일상적으로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 즉 배우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장시간에 걸친 집중력을 가지고 놀라운 양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고찰하여 거기서 얻어낸 진리를 교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모든 신자들이 다 같이 알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다는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자료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즉각적으로 주어진 초자연적인 지식, 즉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판단과 추론에 의해 도출된 자연적인 지식이 아닌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먼저 신구약 성경에서 그 실례를 찾아본다면 하나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하나님과 주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예물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어두는 파렴치한 죄를 지었을 때 엘리사가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되고(왕하 5:20-26),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이 내려졌는데(행 5:1-11),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때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은사는 배워서 얻어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조금 더 찾아본다면 먼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예수님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사람의 외모에 의해 판단하시지 않고(사 11:3),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여인의 영적인 갈증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과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요 4:10-26).  이런 초자연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전형적인 본보기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이미 그의 성품을 훤히 아셨던 것과(요 1:46-48), 처음 만난 삭개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일들을 통해(눅 19:1-10), 이 지식의 말씀이 현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므로 전지하셨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요 10:30),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눅 2:52).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는데(빌 2:6-11), 예를 들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할 때까지 기다리셨고(눅 5:17),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능력의 근원은 그의 신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존함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눅 4:14-21).  즉 인성의 한계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적능력을 빌어 사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마 12:28).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교회나 집회에서 종종 누군가가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물론 ‘분변하라’는 말씀(고전 14:29)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 그리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는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잊고 사는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성령의 음성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든 은사는 본래 교회의 유익과(고전 12: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엡 4:12), 사실 몸의 필요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아는 것도 지식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렇게 볼 경우 신비스러운 지식과 성경 계시와의 관계 면에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것은 ‘계시’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가 교회를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할 때에 신중해야하는 이유는 지나가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 있는 말씀처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Charles Spurgeon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과 반대로 나오는 계시가 없듯이 한 개인을 위한 지식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다.”  즉 성령의 은사가 교회의 각 지체에게 유익하고 조화롭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는 가운데 바르게, 그리고 분별하는 가운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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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뜻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를 원하셨으며

그 결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기 위하여

모세에게 자신의 거룩하심,

자비하심, 능력, 자신의 이름, 목적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많은 핑계를 대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실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심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사명을 이루기에 충분할 정도로

말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세 가지 경우 모두에서 모세는

자기의 능력을 의심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갈등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가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계시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조정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그의 직업과 처가를 버려두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삶을 조정한 후에야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자기 힘으로 혼자 해보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신 곳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크기에 해당하는 일을

당신의 삶을 통해 행하시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엄청나고 중요한 일에

자신이 쓰임 받았음을 깨닫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느꼈을 것입니다.

모세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쓰셔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순종의 단계가 올라감에 따라

모세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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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교회가 생겨났고(마 16:18), 이천년 험난한 역사 가운데서도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행 16:4-5, 마 28:18-20).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승천하신 후 제3위 하나님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고(요 16:7), 그러면 성령에 감동을 받아 말씀을 널리 전하는 이 땅에 존재하게 될 교회도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 교회가 유지/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했고(요 1:1, 14), 그분이 하나님이셨으므로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속한 구원받은 자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벧전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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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악의 유혹과 시험에 부딪치고 있으며(벧전 5:8), 때로는 마귀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기에(엡 6:10-18),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자녀들에게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악한 마귀의 흉계를 경계하고 대적하라고 말합니다(약 4:7).  이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에 대해 Louis Berkhof는 “어둠의 세력들인 타락한 천사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항하며 선택된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하고 그릇 인도하려고 하며 또한 죄인들을 자극하여 악을 행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관적인 편집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흘러야 하지만(고전 14:15), 문제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의 길을 가로 막고 있을 때 그 귀신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 현실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Lloyd Jones는 『귀신들림, 점술, 강신술』에서 “천사나 성령이나 심지어는 모든 영적인 영역까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더 심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인격과 영적인 영역을 믿으면서도 귀신들림을 정말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시달리거나 공격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경멸적인 어투로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사로잡히다’라는 말은 고통당하는 자를 귀신이 꼼짝달싹 못하게 완전히 차지해 버린다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막 5:2,16, 18), 이것은 불신자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귀신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어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로잡힘’이라는 말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괴로움’‘속박’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용어상의 문제로 발생하는 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C. Fred Dickason는 『Demon Possession and the Christian』에서 “‘다이모니조메노스’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마귀가 ‘들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마귀가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다양한 차원의 지배를 통해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로잡힘이라는 개념은 신약의 용어나 그 용례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건실한 이론을 제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혼동과 정서적인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말보다는 ‘귀신들리다’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 즉 귀신에게 억압과 속박을 받는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냐는 것입니다.  먼저 ‘들리다’(have)라는 말을 고려해 볼 때 이런 비유가 좋은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령 집에 달갑지 않는 방문객을 갑작스럽게 ‘맞아들일’ 경우가 있는데 만일 생쥐 한 마리가 집에 몰래 ‘들어와 있다’고 가정할 때 여기서 ‘들어와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더러운 쥐 한 마리가 집을 장악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짜증이 나는 귀찮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난 빨리 쥐덫을 놓아 제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도 달갑지 않는 불청객인 귀신들의 방문을 욥이 받은 것처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욥 1-2장).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는 자신이 사단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던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한 적이 있는데, 물론 베드로가 그 당시 사단의 도구로 이용당했다고 해서 귀신이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막 8:33),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단이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 것처럼(요 13:2, 행 1:25), 베드로를 청구하려고 애썼고(눅 22:31-32), 그가 선한 의도에서 예수님을 견책했던 그 순간까지도(마 16:22), 틈이 있던 베드로에게 사단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악령이 결코 한 사람 안에 함께 거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은 결코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마귀가 거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과 혼과 몸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 조금 더 살펴보면 먼저 ‘영’(spirit)을 뜻하는 신약적 단어는 pneuma(눅 8:55)로 육적인 것, 즉 혼과 대조해 볼 때 영은 거룩한 것들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부분인(고전 2:14), 반면에 ‘혼’(soul)을 뜻하는 단어는 psyche(살전 5:23)로 생명 그 자체, 즉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정의하고 있는데(히 4:12), 성경에서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은 허물과 죄악 가운데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2:1).  쉽게 말해 육체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엡 4:18).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데(롬 6:4),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영에 자신의 생명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요일 5:11-12).  이것으로 볼 때 죄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성령은 우리의 영속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고전 12:3), 이렇게 거듭난 자는 구원을 얻어 주의 자녀가 되었지만(요 3:6), 그와 동시에 일정 영역은 특정 죄에 의해 귀신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벧전 5:8).


예를 들어 바울은 신자의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 가르쳤는데(고전 3:16),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적으로 오염될 수 있는 성전의 ‘바깥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막 11:15-17), ‘인간의 혼’은 성결한 제사장이 접근할 수 있는 ‘성소’에 해당되고(히 9:6), ‘인간의 영’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성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히 9:7).  만약 제사장의 삶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경우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듯이(레 10:1-7), 사단도 전능하신 그분의 거룩함으로 충만한 지성소와 같은 인간의 영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민 18장).  같은 맥락에서 영원한 구속을 위해 성별된 영은(요 5:24), 여전히 타락의 가능성을 지닌 혼과 몸과 구별되지만(살전 5:23),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에 속박되거나 부분적으로 귀신들릴 가능성(억압이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Calvin 역시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에 대해서는 사단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영은 성령으로 점유될 수 있는 반면에 혼과 육(요일 2:16)은 아직 그분의 주권 하에 온전히 항복시키지 않았습니다(롬 7:19).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요 5:24, 골 1:13), 아직 혼과 육체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빌 2:12), 죄악 된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한 구석에 얼마든지 악한 영이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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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진리의 성령 2017. 1. 5. 10:32

성령님께서 믿는 모든 자안에 내주하셔서 경건한 성품을 지어내신다면 왜 수많은 신자들이 이런 경건한 성품을 드러내지 못할까요?  많은 신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 행동이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 온전한 변화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봐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왜 내주하시는 성령이 그런 부분을 변화시켜 주시지 않으실까요?  성령의 전(고전 6:19)인 우리가 아직도 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주사역이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신자에게 첫 편지를 보낼 때 육적인 신자들을 누르는 문제를 언급함과 동시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어떻게 운행하기를 원하시는가에 관해 상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는 신자들의 삶속에 성령께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것을 이루도록 성령께 자유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이들 속에 내주하셨으나 예수님의 품성을 그들 안에 이룰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3장을 통해 세 부류의 사람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자연인’입니다(고전 2:14).  자연인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없는 사람이기에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그저 글로만 보일 뿐 영적인 진리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그 삶은 어둠에 싸여 육적인 통제를 철저히 받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육체의 일들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갈 5:19-20).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러한 상태로 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음 두 번째 부류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고전 2:15-16).  이러한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께 그 삶을 순종하여 삶의 모든 부분을 주관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삶속에는 성령의 열매가 현저히 나타나며 이 사람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영적인 사람에게도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죄가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령께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행하므로 예수님의 의가 삶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적이고 강팍한 기독교인입니다(고전 3:1-3).  이런 사람 안에도 성장할 만큼 오랫동안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지만 성령을 거스리고 순복하지 못함으로 그 삶에 변화가 없이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갑니다.  한 마디로 성령께서 그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하도록 고집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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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동물의 피로써 백성들의 죄를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레 4:1-5, 히 9:7).  그러나 그것으로 지나온 모든 시간 동안 지은 죄가 완전히 사함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의 형벌이 잠시 동안 유예될 뿐이었습니다(히 9:10, 10:1-4).  또한 제사장들 역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라 이러한 제사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히 10:11).  따라서 이를 위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였습니다(히 8:3-6, 10:12).  따라서 속죄 제물 되신 그리스도는 자기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거룩하여 죄에서 떠나 있어야 하며 약점 투성이의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어야만 했습니다(히 7:26-28).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제사장이시며(히 4:14), 동시에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 거룩하게 될 것이며(히 10:10), 우리의 죄 사함이 온전하고도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히 10:14, 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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