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v 성령

은사중지론 2016. 12. 31. 10:08

Lloyd Jones의 『성령세례』역자 서문에 보면 “초대교회가 기독론 논쟁시대라면 교부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시대라고 볼 수 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시대이고, 현대는 성령론 논쟁시대라고 할 만큼 성령론에 관한 논의가 국내외를 물론하고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 논쟁은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오순절파의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계속성과 오순절은 하나의 교회부흥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성령 편에 설 것이냐의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데, 사실 R. T. Kendall이 말한 것처럼 말씀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건전한 신학과 이신칭의와 강해설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개혁주의 교리들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우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함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성령 편에 선 사람들은 기도로 처소가 진동하고 표적과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은사들이 역사하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권능이 회복될 때까지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하나들면 San Fernando Valley 지역에 Grace Community Church이 있는데, 이 교회는 『무질서한 은사주의』의 저자 John MacArthur가 시무하는 교회로 그는 오늘날 교회 내에 어지럽게 퍼지고 있는 잘못된 은사운동에 대해 도가 지나칠 정도로 비판하며 이런 부류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반면에 바로 옆 동네 Church On the Way에서 사역하는 지금은 은퇴한 Jack Hayford는『영적 언어의 아름다움』의 저자로 매주일 오순절 초대교회처럼 축제가 가까운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있는데, 사실 양쪽교회 신자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사역자에게 나타나는데, John Stott는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두 부류의 견해 중 어느 견해가 옳은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과 어느 교단/교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지겠지만, 만약 성령의 은사에 대해 폐쇄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John Stott의 말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나 자신의 영적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영적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John Stott가 왜 이런 의미심장한 진솔한 고백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오늘날 은사운동을 두고 자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은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John MacArthur를 role model로 삼아서인지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없는 것처럼 독설을 퍼부어가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한 고린도교회를 두고 문제투성이 교회라고 운운하면서 마치 고린도교회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의 은사로 몹시 시끄러웠던 고린도교회가 이단이었냐는 것입니다(고전 6:20).  분명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시끄럽기 때문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의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말하면서 다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말고 “오직 말씀만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은사 문제로 질서가 없어 보이고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릇되고 허접한 신학을 가지고 영혼을 죽이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마 23:15), 어떤 한 가지 해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인데(막 7:1-8), 한 마디로 성령의 은사를 거론하면서 칼빈주의 신학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 이단이거나 가짜인 것처럼 비판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전서 13장12절을 인정한다면 오늘날 이들이 내놓는 해석이 하나님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가 인간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살아있는 교회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보인 것은(계 3:1),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그분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살전 5:19-20), 솔직히 우리는 고린도교회나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은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질서와 자유가 조화롭게 추구해야 하듯이 성령의 은사의 바른 이해와 체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려면 양쪽 진영의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주로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쪽이 은사중지론자들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두 진영이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교회에는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갈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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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문제의 모든 측면 중에서

오늘날 성령의 권위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관심은 우리 주님의 인격과 권위에 쏠려 있다.

물론 성경과 그 권위에도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성령과 그의 권위에 대해서는 얼마나 듣고 있는가?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어떤 국면도 이와 같이 비극적이리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잘못 이해되어 온 것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이 질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의 주된 근원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소홀히 취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체면과 위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위엄이란 말은 

내가 볼 때 19세기 중엽에 사용되기 시작한 치명적인 단어이다.

그 세대의 선조들은 큰 신앙적 각성과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였다.

그들 자신의 위엄 또는 지위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즈음에

이와 다른 사상이 들어와

사람들은 위엄을 갖춘 예배의식의 필요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사의 회심이나 성령충만함,

그리고 이에 따르는 영적 통찰력과 권위보다는

목사의 지적훈련이나 지식구비에 더 큰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이 행해진 것은

‘위엄을 갖춘’ 형식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한 결과 중 하나는

교회가 점점 형식과 의식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종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랑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중 교육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를 좀 더 유식한 목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

‘구식설교’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체면’이란 일반적인 범주에 드는 것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 밀접한 관계된 것으로서

또 다른 이유는 ‘열렬한 믿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지나친 행동이나 감정에 두려움을 품고 왔다.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매우 강조하는 여러 분파나 교단 이야기를 들을 때,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저들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절제할 줄을 모르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스스로 반대편 극단으로 이끌려 가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성령을 소멸하고 슬프게 하는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신이라는 비난이 복음주의자들에게 가해진 적이 있었다.

이러한 비난은 200년 전 조지 휘트필드, 존 웨슬리,

그리고 이들의 추종자들에게 가해졌고,

이들은 끊임없이 감독들과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해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때로는 거의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것이

마치 근본적으로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비난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 같다.

나는 결코 지나친 것이나 광신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험은

이러한 것들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로이드 존스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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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께서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슬픔(마 26:27)과 굶주림(눅 4:2)과 가난(눅 9:58)과 피로(요 4:6)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지막에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며 죽으셨을 때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인간 죄로 인하여 생겨난 모든 고난도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고난당하신 사실은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요 16:11),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히 2:18).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나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극복하여 영원히 고난이 없는(롬 8:17),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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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세상에서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구속하려고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하고 계신 일을 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어디서 일하시고 계신지를 보고

그분께 동참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고 계시는지를 주시하는

이 동일한 패턴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십시오.

자기의 영적 은사, 개인적인 욕망, 기술, 능력 혹은 자원의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사명에로의 초청에 

당신의 관심을 집중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사명에로의 초청을 이해하고 나면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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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롬 5:12), 그 죄된 본성이 유전되어 그 후손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롬 3:23).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을 사랑하사(요 3:16),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창 3:15).  그런데 문제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려면 그가 범한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야 할 죄인과 똑같은 성정(性情)을 지닌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범한 주체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죄의 형벌도 죄가 조금도 없는 사람만이 담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히 4: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빌 2:7).  또 다른 의미에서 성경은 피 속에 생명이 있고(레 17:11),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다고 말합니다(히 9:22).  이것은 속죄를 위해서는 피 흘림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피를 가진 사람이셔야만 했고 속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히 9:12).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갈 4:4), 또한 속죄의 피를 흘려 주셨는바(히 9:22), 우리는 완전한 인간되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의 공로로 구원을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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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에는 성경과 설교자, 전도 책자, 기도회

그리고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성경과 교회와 목사가 넘쳐난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죄악이 만연한가?

건축가들이 교회 건물을 짓지만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인쇄업자들이 성경을 인쇄하지만

그것을 읽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분이 구주라고 믿는 않는다.

그들은 어쩌다가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가를 부르지만

그것을 곧 잊어버린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올는지 심히 두렵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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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말하면 죄인으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눅 19:10).  먼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은(마 1:21), 인간의 완전한 대표가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롬 5:12-19).  그리고 인간이 되신 후 원래 가지고 계셨던 신성을 계속 지니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단 한 번의 효력 있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히 9:12),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이나 불완전한 동물 제물이 아니라(히 10:11), 온전히 거룩하고(히 7:26), 영원한 제사장이며(히 6:20), 완전한 제물이 필요하였기에(히 10:14),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역할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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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성신에 감동 된 자’(대상 12:18), ‘여호와의 신’, 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출 35:31, 삿 3:10)와 같은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는 성령께서 구약시대에도 활동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기에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다(창 41:1-39).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자신의 신을 그에게 부어 주시어 성막 건축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출 31:1-5).  이러한 성령은 사사(士師)나 선지자들에게도 임하셨는데, 옷니엘은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사사가 되었으며(삿 3:10),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찌는 것처럼 찢었다(삿 14:6).  그리고 엘리사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은 성령을 힘입어 권능을 행하거나 예언을 하였다(왕하 2:12-15, 겔 11:24).  한편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았던 역대 이스라엘의 선왕(善王)들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었다(삼상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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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스도께서 양성을 가졌다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의한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인 동시에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고 증거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한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너무나 명시적으로 확실하게 증거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양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신 신인(神人)이심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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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현대교회에서 과연 예언이 필요한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 먼저 성서적인 희랍 어원에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어휘들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두 개의 희랍어가 영어 단어로는 ‘말씀’(word)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하나는 ‘로고스’이고(마 8:16), 다른 하나는 ‘레마’(마 4:4)입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단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서로 다른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Bill Hamon 박사는 희랍어 학자들과 성서 신학자들 간에 이러한 단어들이 동의어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논의가 벌어졌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단어가 각자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말하면서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영원히 변하거나 폐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인(요 1:1, 14), 성경 전체를 의미하고(딤후 2:15), 반면에 ‘레마’를 사용할 때는 개별적으로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롬 10:17),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구체적인 말씀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엡 6:17).  즉 로고스(빌 2:16)는 우물 안에 물과 같고, 레마(엡 5:26)는 우물에서 길어낸 한 통에 담긴 물과 같기 때문에 W. E. Vine 박사가 말한 것처럼 로고스는 절대로 변하거나 폐하지 않지만(요 4:50), 레마는 항상 로고스에 의존하고 “말씀에서 나온 한 말씀”으로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가져다주는 개별적 성경구절이라는 것입니다(행 11:15).


오늘날 “신약의 예언은 설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사람들은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사역이다” 또는 “신약 선지자의 기능이 오늘날 설교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당시 성경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이 설교의 기능을 대신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구절인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여’라는 구절을 가지고(행 15:32),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믿음을 장려하고 격려하는 말씀이 설교라고 강조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Robertson and Plummer“예언은 반드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4장 3, 24, 30절 말씀을 제시하는데, 한 마디로 신약의 예언은 설교와 같은 것이지 별도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있을 때 유대로부터 한 선지자 아가보가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행 21:8-11), 이것도 설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앞으로 당할 일을 예언한 것이고, 바울도 성령을 통해 자신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을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행 20:22-23).


이 신약의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Dennis and Benett“설교는 미리 준비할 수 있고 영감 받은 지성과 훈련에 근거하지만 예언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출처는 영이지 지성이 아니라.”라고 말하며, Michael Haper도 예언과 설교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예언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심으로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말로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을 ‘계시’라고 말하는데(고전 14:30-31), 여기서 말하는 계시는 꼭 성경을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등한 말을 의미하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빌 3:15, 마 11:27),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단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생각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의식 속에 심어주신 생각을 가리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생각은 한 개인의 평소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말하는 사람의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도 포함되어 있기에 판단과 분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고전 14:29), 바울은 이러한 느낌이나 본능을 ‘계시’라고 칭하고(엡 1:17), 하나님께서 촉구하신 것을 교회의 회중에게 보고하는 행위를 ‘예언’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4:26).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행 11:28, 21:4, 10-11, 요 11:51),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예언이 없다고 보아야 하고, 반면에 예언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본문해석(설명)과 삶의 적용이 있다면 그것은 신약성서의 용어로 ‘성경의 가르침’ 혹은 ‘설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Grudem의 말을 인용한다면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행위나 교사가 하는 일 등에서 ‘가르치다’라는 동사가 묘사하는 어떤 활동도 신약에서는 계시에 근거해서 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가르침이란 단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행 15:35, 11:26, 롬 2:21, 15:4), 또는 사도들의 교훈의 반복내지는 설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롬 16:17, 딤후 2:2, 3:10), 우리는 이것을 ‘가르침/설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하여 준비에 의한 것이고, 예언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에 가르침과 예언은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신약의 예언(고전 13:9)은 권위에 있어 회중 설교보다 앞서지 않고, 더 나아가 교회에서의 회중 예언(고전 14:26)은 언제나 성경의 권위 있는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명령하였고(딤전 4:11, 6:2),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지 않고 자신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고 말했습니다(살후 2:15).


또한 디모데전서 5장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장로들 중에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예언하는 장로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었고, 또 이들이 예언하기를 잘하며 확실한 예언에 견고하게 선 자들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바울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딤전 3:2, 딛 1:9).  그리고 디모데는 지도자로서 자기 자신과 가르침을 잘 살피라는 권면을 바울에게서 받았지만(딤전 4:16), 예언을 삼가라는 권면을 받은 적은 없었고, 더 나아가 야고보는 예언하는 자들보다는 가르치는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했습니다(약 3:1).  쉽게 말하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설교 혹은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골 3:16, 히 5:12), Dennis and Benett가 말한 것처럼 “예언은 영감 받은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과 설교, 이 둘은 명백하게 구분이 되어 있고, 만일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 신약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가르침이지만(행 19:8-10, 딤후 2:2), 만일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눅 1:67).  물론 잘 준비된 설교에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성령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예언적 요소가 혼합된 설교/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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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들과 다른 감정들 사이의 차이점은 크고 뚜렷하게 구분해 주는

또 하나의 다른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들이 더 높이 고양되면 될수록

영적인 만족을 위한 영혼의 영적인 욕구와 갈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짓된 감정들은 그 자체로도 만족해한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본성이 어머니의 젖을 갈망하게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아이의 본성은 거룩하게 자라기를 갈망한다.  갓난아이의 건강 상태가 최상일 때 가장 강한 식욕이 생기는 것이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참된 그리스도인은 더 큰 영적 깨달음과 감정들을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더 성장하기 위해 은혜와 영적인 양식을 더욱 간절히 갈구하는 거지가 된다.


영적인 즐거움을 조금 경험한 사람은 어떤 다른 즐거움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즐거움에 온전히 만족하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된다.  영혼은 결코 물리거나 실증내지 않는다.  이런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같은 즐거움을 더 많이 갈구하게 된다.  영혼이 정적인 선을 경험하면 할수록 영혼은 영적인 선의 탁월하고 비할 데 없는 고상하고 만족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알게 되며, 영혼의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더 많은 영적인 선을 더 간절하게 갈구하고 갈망하게 된다.  따라서 영적인 감정들은 본질상 그 감정들이 크면 클수록 은혜와 거룩함을 더 많이 원하고 갈망하게 된다.


성도에게는 거룩하고자 하는 불타는 갈망이 있으며 이것은 생명력 있는 열기가 몸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도에게는 거룩을 더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더 거룩하게 열망하고 갈증을 느끼는데 이것은 호흡이 살아 있는 몸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거룩한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거룩 또는 성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고자 하는데 더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말씀으로 그들이 거룩하기 자라기 위해서이다.


위선자들은 깨달음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향력보다는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나타나는 것과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현재의 위로 때문에 깨달음을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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