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갖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외에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지닌 존재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가 너무도 많이 있고, 특히 영적으로 우둔한 사람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는 더욱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존재한다는 신비도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므로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나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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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3박4일 동안 연합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수련회 이틀째 되는 날 오락시간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편을 가르고 밀가루 속에 있는 사탕을 집어 먹는 게임을 하다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혼자 수양관 이층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는 당시 고등부 선생 한분이 허겁지겁 상기된 얼굴로 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전도사님, 큰일 났습니다! 한 아이가 쓰러져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전도사님이 가보셔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는데 쓰러진 학생 곁에는 언니만 울면서 남아 있고 선생님 몇 분은 어찌할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루는 가운데 그 많던 학생들은 무서워서 도망갔거나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쓰러진 여자 학생의 얼굴을 보니까 두 손을 꽉 움켜잡은 상태에서 입에 거품을 흘리고 눈은 뒤로 젖어져 흰자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입고 입던 바지는 소변으로 인해 다 젖었고 얼굴은 예전 얼굴이 아닌 완전히 뒤틀린 상태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퍼런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실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은 신학교 졸업반 때 한두 번 가진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축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학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학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전 “만약 이 학생에게 들어간 귀신이 나한데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면서 그 짧은 순간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있는 선생님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전도사님 빨리 기도하세요.”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고, 솔직히 “기도하고 싶으면 먼저 손을 얹고 기도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선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얼떨결에 손을 학생 머리 위에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은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쓰러진 학생 입에서 이물질이 나오고 큰 숨을 한 번 내어 쉬더니 눈이 뒤집혀진 얼굴이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서 몸을 떠는 현상이 멈춘 것입니다.  사실 이 학생의 부모님들은 믿음이 좋고 충성스러운 일군이기에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분들이시고 귀신에게 억압을 받았던 학생 역시 매주일 주일학교에서 예배드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최종 판단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겠지만(벧전 1:17), 이들 가족과 3년 이상 같이 신앙생활을 해왔었기에 이들이 믿음의 가정인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하나님의 자녀도 귀신이 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Thomas B. White가 말했듯이 악에 대한 승리는 우리가 회심할 때(골 2;15), 이미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셨고(롬 8:37-39),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며(고후 5:1-5), 하나님의 자녀는 John Calvin이 말한 것처럼 “신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둔다.”라는 말과 같이 고난 속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롬 8:18-39).  그러나 악에 대한 경험적인 승리는 믿음의 실천을 통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주의 백성들이 쟁취해 나가야만 하기 때문에(엡 6:10-13), 우리는 누군가 회심하면 마귀가 그에 대한 음흉한 계획을 다 포기해 버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존재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롬 7:17-24)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악과 씨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벧전 5:8-9),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과 죄의 결과를 치유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죄지은 과거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요일 1:7), 여전히 강박적인 행태와 정서적인 손상, 그리고 법적인 복권 등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는 용서받았지만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약 4:7).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마귀의 영향력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문제로(롬 7:17), 이 죄는 하나님 자녀의 삶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귀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행 5:1-11).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한 의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견책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를 대적하셨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똑같이 말씀하셨는데(막 8:33), 이것은 주님을 구하려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의도는 좋았고 진실했지만 그 순간 그는 사단에게 틈을 주고 도구로 이용을 당하다가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진심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지만(마 16:16), 사단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에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마 26:69-75).  여기서도 궁금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굴복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 자신의 생각과 말 가운데서(마 26:33-35), 사단에게 틈을 보였기 때문이고(눅 22:24-34),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죄는 마귀로 하여금 신자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엡 4:26).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귀신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요일 5:18).  사실 사람들이 혼동하거나 문제가 되는 용어는 악한 영에게 ‘들렸다’라는 말과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라는 말인데, 실제로 영어번역본들 가운데는 ‘귀신들림’(have demon)을 ‘귀신에게 사로잡힘’(demon possessed)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막 9:17, 눅 4:33), 이것은 원본에 대한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어에는 그런 의미를 반영하거나 표현을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 성경은 귀신 ‘들리다’라든지(마 11:18, 요 7:20, 8:48-49, 10:20), 아니면 마귀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심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눅 8:27), 마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소유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A. A Hodge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들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고통을 주고 괴롭히며 시험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얼마든지 ‘억압’과 ‘괴로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막 5:1-20),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용어의 문제는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자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완전히 눌려버린 뜻을 지니고 있기에,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귀신들린’ 상태를 나타내는 헬라어를 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로잡힘’이 아닌 ‘귀신들리다’가 되지만(마 4:24, 막 1:32, 눅 8:36, 요 10:21), 보통 사용하기 적합한 용어는 ‘귀신에게 시달리다’ 혹은 Francis MacMutt 박사가 말한 것처럼 ‘마귀화 되었다’로 이는 어떤 형태로든 악령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가운데 고통과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Mark I. Bubeck는 ‘귀신들림’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말이 신자에게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한마디로 귀신들린 사람은 그 속박으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당하거나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이 한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마귀에게 정복당했다는 의미로서 그에게 옳은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라면 그 대답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힌다는 개념은 성서적인 것도 아닐뿐더러(요일 4:4),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바 된 이후로는 죄가 다스리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6:1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여러 가지 차원의 마귀의 공격과 영향력 아래 놓일 수 있고(눅 4:2, 고후 12:7, 엡 6:12, 약 4:7), 만약 마귀에게 죄의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결코 사로잡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귀신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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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이셨고(요일 5:20), 동시에 항상 인간이셨습니다(히 2:14).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을 나타내어 이적을 행하실 때도 사람이셨고(마 12:13), 인간으로서 슬퍼하고 아파하며 고난당하실 때도 역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히 5:7-10).  이처럼 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이셨고(요 20:28), 항상 인간이란 사실은(눅 2:5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체 안에 하나로 연합하여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딛 2:13, 갈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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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정통신학

은사중지론 2016. 11. 19. 11:48

가끔 글을 읽다 보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들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마 7:1-5)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정이나 자신만의 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이런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방언을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고, 보태어 Calvin의 『제네바교회 교리문답』과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방언기도론’을 제시합니다.  솔직히 말해 성경에서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혹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라는 교단과 교파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일절 찾아볼 수 없고, 고린도교회의 분쟁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런 독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고 말하면서 다음 구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불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2).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교단’과 ‘교파’, 그리고 ‘신학’과 ‘교리’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활짝 열려있으면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더 심하면 이단/사이비에 빠진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신랄하게 공격을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보다는(딤후 3:15-17),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신학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이러한 잘못되고 편협한 신학들, 즉 자신만의 신학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마 23:2-3)들 그리고 율법사들은 당대의 최고의 석학(눅 11:46, 52)들이며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스라엘 선생들이었습니다(요 3:10).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탁월한 신학자들이며 목사들이지만 문제는 병든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같지 않은 메마르고 병든 설교로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마 23:13).  이들의 이런 잘못된 가르침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통이지만 완벽히 쓸모없는 죽은 정통신학’으로 인해 참된 진리의 말씀(딤후 4:3)을 가르치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섭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다시 말해 후메내오와 빌레도(딤전 1:19-20)처럼 잘못 가르쳐서 많은 영혼들을 그릇된 길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딤후 2:16-18).



우리는 죽은 정통신학이 필요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눅 4:22)로 삼십 년이란 세월(눅 3:23)을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일한 경험이 전부였고(막 6:3), 그분에게 있어 어떤 신학적 체계는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예수님은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진정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요 10:4).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고전 1:26)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주로 학문이 없고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행 4:13).  그렇다고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처럼 무교회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치리할 때 자신이 소속된 교단 총회나 노회가 없으면 잘못된 것을 가르쳐도 누구의 간섭이 없기 때문에 교주 아니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빠질 가능성 많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에 소속되거나 신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더라도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할례를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하면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행 15:5), 사도들과 장로들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온 이 문제를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이 일을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통해 해결했기 때문입니다(행 15:6-21).



그리고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여러 종류의 이단(막 13:6)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딤전 6:3),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유일한 신학인 것처럼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사도들을 통해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날 때(행 5:12), 공회에서 특출한 인물이었던 율법 교사였고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인 히브리 학자 가마리엘(행 5:34)은 오늘날로 말하면 ‘바리새파 교단’에서 ‘바리새주의 신학’을 한 사람이고, 반면에 사도들은 어느 특정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신학교에 가본적이 없는(행 4:13), 한 마디로 신학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사도들과 맞지 않자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행 5:17), 제자들을 공회에 세워 종교재판을 하고(행 4:1-3, 5-6),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습니다(행 5:40).  이것을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배운 신학만이 정통적이고 성경에 가장 근접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무지막지하게 상대방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이단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교법사 가마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한 마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학공부를 많이 해서, 혹은 교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처럼 죽은 것은 아닐 것이고(행 7:54-60),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순교한 것입니다(히 11:35-38).  그런데 문제는 신학자/목사들이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데(마 10:16), 분쟁을 일으키는 귀신들에게 충동질 당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무조건 자신의 신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책잡으려고 하거나(막 12:13),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눅 11:53-54),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갈 5:19-21).  솔직히 말해 이런 일들을 일삼는 사람들,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언제나 똑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들추어내는 사람은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거룩하고 하나님께 쓰일 준비를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찮은 일, 즉 구원에 절대적이지 않은 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것은(딤전 6:3-4),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망상이나 착각에 빠질 수 있겠지만(갈 1:13-14), 성경은 시기와 다툼과 논쟁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께로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약 3:13-18).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신학에 대해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을 주장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제의 신학도 존중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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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

다시 말해 온갖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은

한 주간 가운데 겨우 이틀뿐이다.


그 이틀 중에서 하루는 ‘어제’다.

비록 실수와 근심, 통증과 고통, 과실과 실책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어제는 영원히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에 있는 돈 전부를 주고도 어제를 다시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하루는 ‘내일’이다.

비록 수많은 역경과 짐 덩어리가 기다릴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희망찬 약속과 성취가 있다.

그러나 내일도 또한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내일의 태양은 휘황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떠오르든,

구름이 가려서 떠오르든 반드시 떠오른다.

그렇지만 내일이 오기 전에

우리는 내일에 관해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일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단 하루가 남는다.

그것은 바로 ‘오늘’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오늘의 싸움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오늘의 싸움에서 어떠한 경우에는 쓰러지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장엄한 영원의 시간에

우리가 갖는 모든 마음의 짐을 갖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제라는 시간이나 내일이란 시간에 모든 걱정과 근심을 두어

오늘이란 시간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는 단지 오늘만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오늘’이라는 현실에만 충실하자.


-윌리엄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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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베들레헴에서 인간 마리아를 통하여(마 1:18-25), 인간으로 태어나셨던 그리스도(눅 2:7)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사 9:6), 완전한 사람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골 1;15).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서 신성(神性)과 인간으로서 인성(人性), 즉 양성(兩性)을 지닌 존재(요 1:1, 롬 9:5, 행 13:23, 요일 4:2)는 오직 우리가 구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행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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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훈련의 목표를 분명하게 세우셨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훈련의 목표를 세워보십시오.


제자훈련의 훈련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결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에 대해서 아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가려면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교제하고 관계를 맺는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떤 친밀감이 나눠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자신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묵상하기를 중단해도 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연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그 분에 대해서 더욱 깊이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민감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친밀해지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영적 민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이 지금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내적질문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민감함은 아니지만 민감함은 항상 이런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자산이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해 펼쳐놓으십시오.  그분의 음성과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이시고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의 전인격, 전존재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고 확신하는 바를 피하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분께 순종하십시오.  순종을 부담이나 의무로 여기지 마십시오.  순종은 부담이나 희생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요 축복의 열쇠입니다.  순종하십시오.  그 순종은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교제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계획보다 더 완벽하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사랑과 약속 안에 거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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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죄의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고(롬 5:8, 벧전 3:8),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갈 3:13, 벧후 2:1).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게 되었고(히 9:15),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 안에서 면하게 된 것입니다(롬 8:1).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율법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죄인 된 사람을 구하려고 율법 아래 나신 후 행위로 율법을 완수하심으로써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갈 4:4-5, 롬 10:4), 율법에 대하여 어떤 죄도 없이 죽으심으로 과거의 우리 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을 완수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롬 13:8-10).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롬 6:6-7, 7:4).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구속력을 갖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 7:6, 8:2).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분리되었으나(사 59: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엡 2:16),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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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큰 일』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전체 기독교의 핵심이요 총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구원과 축복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의 신앙으로서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권4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순한 교리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훈련생의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2권4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마무리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래는 2권4과 참고도서인 루이스 벌코프의 책『기독교 신학개론』의 2장 신론 중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이다.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삼위(3인격)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라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러한 자기 구별은 삼위가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 본질이 삼위로 분할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는 각자가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 위들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위가 다른 위에 종속되지 않지만 존재의 질서로 보아 성부가 제1위요, 성자가 제2위요, 성령이 제3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순서는 창조와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보여 지고 있으며 이들 삼위는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구약에서는 하나님에게는 1위 이상의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으며(창 1:26; 11:7),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인격(위)으로 묘사되었으며(창 16:7~13; 18:1~21; 19:1~22),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 48:16; 63:10).  이 외에도 삼위가 다소 명백히 지시된 곳도 약간 있다.  신약에서는 삼위가 명백히 언급된 구절들이 많다.   예수님의 세례에서(눅 3:21,22), 예수님의 고별강화에서(요 14~16장), 예수님의 대 명령에서(마 28:19), 사도의 축복에서(고후 13:13), 또한 그 외 구절에서(눅 1:35; 고전 12:4~6; 벧전 1:2)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적용된 성부라는 이름은 ① 모든 창조물의 근원으로서 ② 이스라엘 선민의 아버지로서 ③ 하나님의 영적 자녀인 신자들의 아버지로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층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명칭은 삼위일체의 제2위와 관련하여 제1위에게 적용되었다.  구속사역의 계획, 창조와 섭리의 사역, 구원설계에서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사역, 이 모든 일들은 물론 다른 두 위도 여기에 참여하지만 그러나 특수적으로 성부의 일로 돌려진다.  삼위일체의 제2위는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어진다.  성자의 인격적 특성은 그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생하셨다는 것이다.  성자의 발생 교리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의 제1위와 제2위가 부자관계를 가지신다는 성경적 묘사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명확히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명칭을 성자에게도 적용되었고 성자에게도 하나님의 속성들이 있음이 발견되며 하나님의 사역들이 성자에 의해서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존영도 그에게 돌려졌다.  성자의 사역은 성자는 모든 창조와 구속의 중보적 원인이 되셨으며 특히 구속사역은 성자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령의 인격만큼 많은 사람에게 의심 받은 신성은 없으나 성경은 성령을 분명한 한 인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애정, 의지와 같은 인격적 특성들이 그에게 주어졌으며 발언, 탐구, 증거, 명령, 계시, 노력, 조정과 같은 인격적 행동을 하신다.  성령과 다른 위와의 관계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셨다.  때문에 성령은 다른 위와 더불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명칭들을 그에 붙였으며 하나님의 완전성들이 그에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사역들이 그에 의하여 시행되었고 하나님의 존영도 그에게 허락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중 특히 성령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역은 창조와 구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케 하는 것이다.  자연의 영역에서 성령은 생명을 발생하여 창조사역에 완성을 가져오신다.  성령은 특수한 임무를 위해 인간을 영감하고 인간에게 재능을 부여하시며 구속의 영역에서 구속 사업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에게 권능을 주신다.  성령은 성경을 영감하시며 교회를 형성 확장하시며 교회 안에 계셔서 새 생명의 원리로 내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를 가르치시며 보호하시고 모든 진리 안에서 교회를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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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사상과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예수님의 삶은 실패로 끝났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눅 24:26-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준 것이었습니다(요 10:18).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고(요 19:30),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한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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