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병자들을 치료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마 4:24), 어떨 때에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기도 하시고(요 9:6), 때로는 안수기도(눅 13:10-13)와 믿음의 고백(막 10:46-52)을 통해서, 혹은 순종함(눅 17:11-19)과 꾸짖거나(막 1:25), 손을 잡으시므로(마 8:15), 시공간을 초월해서(마 8:5-13),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육체의 질병 문제를 완벽하게 고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누가복음(눅 5:17)과 사도행전(행 10:38)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치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눅 4:18-19),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질병에 대한 인식을 영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치의 병에서 고침을 받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나오는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하신 말씀처럼(요 5:14), 죄 속에 계속 머물러 생활하거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계 2:21-23), 들릴라에게 머리를 밀린 삼손(삿 16:20)과 초심을 잃은 사울 왕 같이(삼상 16:17-26), 언제든지 성령의 은혜와 영광이 떠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4:21).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 중에 요한복음 10장28절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만약 그분께서 싫어하시는 죄 가운데 계속 머문다면(합 1:13), 성령의 임재와 능력은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시 5:4).


사실 주의 백성들이 출애굽기 20장1-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 그를 대신하여 다른 것들을 추구하거나 사랑할 때(민 25:1-3),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서 자비하신 임재와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렘 1:16).  이것은 한 개인이거나(왕상 16:30-31), 혹은 한 민족 전체가 될 수도 있는데(출 32장),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민 14장).  먼저 갈대아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전국토가 황폐하여짐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문인 시편 74편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배교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것들 중에 하나인데, 이 시편 한 구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거부하시고 그분의 능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부의 적들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애가의 성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9-11절).  그 당시 시편기자에 따르면 기적적인 표적들과 선지자 사역의 부재는 이스라엘 안에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 땅에 대한 심각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분의 기적적인 능력을 철회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며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시 77:7-14).  환언하면 시편기자는 그의 시대에 기적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태도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주의 백성들의 배교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종교적인 배교의 결과에 대한 최고의 예증을 사사기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고, 사실 사사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네 구절들로 된 사시적인(cyclical)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교 기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들에게서 떠나는 것을 경험하고, 둘째는 그로 인하여 이방인 압제자들에게 넘겨진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으며(삿 6:13), 셋째는 그들이 전심으로 회개하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를 보내주셨고(삿 13-16장), 넷째는 사사들(구원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부의 적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사사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과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가장 분명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배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배교는 자주 우상숭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대하 34:25), 반면에 사도 바울은 신약에 와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고 있는데(골 3:5), 사실 인간이 이러한 탐욕에 사로잡힌다는 자체가 바로 실제로 우상숭배의 한 형태이고, 만일 집착한다면 성령의 임재를 말살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잃게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말로 성령을 심히 거역하는 이유도 있겠지만(마 12:32), 무엇보다도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의 배교는 가령 어떤 신자가 부도덕하거나 음란한 것에 열중한다면 그는 도덕적인 배교를 하는 것으로 성경은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요일 1:6).  한 마디로 배교는 본질적으로 순결함의 상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죄 가운데 산다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리적으로도 배교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사탄에게 내어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신학자/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문제들로(딤전 1:19-20), 예수님의 신성(요 1:1)과 믿음만을 통한 칭의(롬 5:1)와 대리적 속죄(벧전 1:18), 동정녀 탄생(마 1:18)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행 1:3)과 육체적으로 다시 오심(딛 2:13), 그리고 천국(눅 23:43)과 지옥(막 9:48), 성경의 권위(딤후 3:14-17)와 성령의 은사(고전 12-14장) 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교회나 죽은 전통을 강조하는 교회들은 성령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교회들 가운데서 치유와 기적들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물론 성령의 능력은 아마도 이들이 배교하기 시작한 후 얼마동안은 개인이나 공동체 안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하나님의 인내가 다하는 그때가(창 7:1-5), 그분의 임재와 능력이 떠나는 때이고 심판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합니다(창 7:10-12).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요일 2:15),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성령의 임재는 떠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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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Slessor

기도의 사람 2016. 10. 27. 10:14

19세기, 여성에게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던 시대에 태어난 Slessor는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아프리카 개척선교사로 일생을 불사른 용감한 여인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궁핍한 가정에 출신인 그녀는

열한 살의 어린나이 때부터 일을 해야 했고,

열네 살부터는 매일 10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리는 생활을 13년이나 이어가야 했다.

그녀에게는 교회는 더러운 빈민가의 비참한 삶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어려서 이미 진실 된 회심을 경험했고,

20대 초반부터 퀸스트리트 선교회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선교의 열망을 키워가던 Mary

여성 선교사에게도 문이 열려 있는 칼라바르 선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 1875년 그 유명한 탐험가 Livingstone의 죽음을 계기로 선교사로 지원하고야 만다.

이내 Slessor는 나이지리아 칼바르트에 정착하여 언어를 배우며

선교사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내륙 오지로 들어가서 개척사역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곡절 끝에 3년이 지나서야 내륙에서 사역할 기회를 얻었다.

주술과 마술이 지배하는 어둠의 땅에서 그녀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동시에 토인들의 불합리한 풍습들을 뜯어 고치려고 애를 썼고,

불평등한 취급을 받던 여성들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열정가였던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듣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오지에 들어가도 염려할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그녀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었던 적대적인 토인지역에서 25년간이나 헌신한다.

그토록 용맹하고 열의에 차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공은 숨기려고만 하였던 그녀는

후배 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한 기반 작업에 충실히 임할 뿐,

어느 정도 개척 사업이 안정되면

다른 선교사에게 해당지역과 업무를 넘기는 일을 반복하였다.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믿는 믿음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굳센 여인 Slessor는 무교육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아프리카 선교 사역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녀의 처절했던 노력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주축 세력이 되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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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가족 중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하루아침에 잃었을 때 그 마음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들 중에 신앙의 회의를 느끼거나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악한 마음을 품고’(히 3:12),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슷하게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을 받은 사람들 중에 오랫동안 방언을 하다가 어느 신학자/목사가 쓴 빈약하고 허접한 글이나 책을 읽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언기도를 하루아침에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미혹의 영에게 속아 초대교회 때 끝난 방언을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 원망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것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마귀는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미혹하는데 있어(요 10:10), 간교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8:44),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날 은사에 대한 신학자/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겠지만(히 5:14), 만약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다면(엡 6:10-18),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좋은 은사들(약 1:17)을 초개와 같이 버리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귀신의 가르침이나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에게 충동질 당하게 된다면 아마 예수님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는 믿는 자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지만(고전 12:4-11), 경험으로 봤을 때 지성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이 거의 방언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지적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이런 지식인은 이성에 초점을 너무 맞추고 있어 자신의 혀를 성령에게 순복시키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방언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식과 통제력을 갖은 상태에서 방언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시작하고 원하는 때 끝낼 수도 있습니다(고전 14:27-32). 여기서 성령이 주시는 방언(고전 12:11)을 노래 부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은 늘 우리에게 있듯이 노래를 하고자 할 때에 노래할 수 있고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과 같이 방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고전 14:15).  물론 방언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사탄은 처음 몇 주 동안 거짓말로 “진짜가 아니야, 네가 가짜로 하는거야!”라고 의심을 심어줄 수 있지만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마 7:20).  다시 말해 얼마동안 방언기도를 드리고 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며 성령께 민감해지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픈 소원이 더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본인 자신이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주님과 긴밀한 소통을 하는 기도의 언어라고 볼 수 있고(유 20절), 이 은사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은 일반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에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영으로부터 오는데 이때에도 말하는 것이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고전 14:2), 만약 여기서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됩니다(고전 14:12-13).  이렇게 방언은 귀중한 은사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준다거나 억지로 따라서 할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은근히 강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성령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고전 12:11).


다른 하나는 방언의 은사가 신자의 영적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은사가 나타나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높일 때가 있는데 물론 은사는 귀한 선물이긴 하지만(엡 4:8), 베드로처럼 은사를 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행 3:12).  한 마디로 은사는 교회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고전 12:7), 영적수준을 재는 잣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한 것에 대해 무척 흥분하고 있을 때, 그들이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17-20). 무엇보다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은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할 때 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데, 사실 방언을 포함하여 모든 은사들의 경우 억지로 흉내 내도록 부담감을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역자 들 중에 은사 때문에 교만하게 행동하면서도 정작 본인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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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 반을 달라고 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한번 자기 소신껏

인생을 행복하고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말렸지만 고집이 얼마나 센지 말을 듣지 않고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먼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야무진 꿈을 가지고 집을 나왔지만

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타향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가지고 나온 돈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났습니다.

결국에는 남의 집 돼지 간에서 쥐엄 열매로 배울 채우는 신세까지 되었습니다.

그것도 못 먹을 때가 태반이었고,

가지고 나온 돈을 다 쓰고 나니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돼지들이 득실거리는 우리 안에 앉아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래 자신도 모르는 버릇이 하나가 생겼는데,

그것은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동구 밖을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었습니다.

행여 작은 아들이 돌아올까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밤낮없이 기다렸습니다.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멀리 동구 밖에서 돌아오는 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거가 먼데도 희미한 모습만 보아도 자기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분명히 둘째 아들이지만 거지도 그런 상거지는 없을 정도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아버지는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잘 왔다, 집으로 가자” 말하면서 목을 끌어안고 너무 기뻐했습니다.

아버지는 하인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과 신발,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열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밤이 되었는데 아홉 아들만 있고 한 아들이 안 보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을 끄고 주무시겠습니까?

부모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행여 불을 끈 것 때문에 그 한 아들이 집을 못 찾아올까 봐,

방에 불도 끄지 못하고

밤새도록 동네 어귀를 쳐다보며 가슴조리며

그 한 아들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찌들었을 때 그분 앞에 나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와서 솔직하게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진심으로 고백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조건 품어주시고 과거도 묻지 않으십니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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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는 각기 다른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로마 가톨릭에서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실 때 교회를 통해 세례를 받지 못한 구약시대 사람들의 영에게 구속의 복음을 전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낮추시고 지옥까지 내려갔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루터파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심 후 복음 전파가 아니라 스스로 이루신 승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지옥에 가셨으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지심의 첫 단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처럼 묘사된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먼저 에베소서 4장9절의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은 지옥에 내려간 것이 아닌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빌 2:7).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19절에 나오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심’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과거 구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써 지금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파했음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4장6절의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는 죽음 후에 복음 전파가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죽었으나 죽기 이전에 복음 전파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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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imber에 의하면 1982년 6월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세계복음화로잔위원회 후원으로 이루어진『전도와 사회적 책임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회의』에서 27개국으로부터 50여명의 지도자들이 Grand Rapids, Michigan에 모여 복음의 사회적 표적을 토론했는데 그들의 최종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표적은 귀신축출이다. 우리는 귀신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비신화하는 것을 반대한다. 정사와 권세가(엡 6:12), 비록 악마적 이념들이나 구조들을 언급하는듯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하게 귀신의 명령에 따르는 악한 개인적 지성이라고 믿는다. 귀신들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상황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해지는 능력대결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1989년 7월 Manila, Philippines에서 있었던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2차 로잔대회에서 영적인 전투분야를 담당하고 세미나를 인도했던 전문사역자인 Thomas B. White도 “구원받은 자들의 임무는 깨어 무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적의 술책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서와는 달리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는 현실만을 인정하려는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귀신들의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며, 특히 ‘신자의 귀신들림’에 대한 그와 같은 현실을 믿는 것은 고대문화와 성경이 가르친 진부한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체로 회의적인 견해를 취하며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을 ‘비신화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Rudolf Karl Bultmann은 마귀와 천사의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존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고대의 신화들이고, 신약성경의 메시지에서 그와 같은 모든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비신화화 시켜 현대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Kerygma and Myth』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힘과 법칙들이 발견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선한 영이건 악한 영이건 할 것 없이 도대체 영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 없다. 병과 그 치유는 모두가 자연적 인과율에 돌려야 하는 것이지 마귀의 장난 혹은 악한 귀신의 저주 때문에 생긴 결과는 아니다.”  지금 Bultmann이 제시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로 된 신약의 세계관을 신화라고 비판하고 과학과 인간 자율사상에 근거하여 신약을 재해석함으로써 사단이 없는 현대에서 인간 스스로 무엇이든지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낙관적 인간관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는 찾나니’라고 말하는데(벧전 5:8), 사실 귀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거짓을 무기로 사용하는 귀신에게 속은 것이고(요 8:44), 만약 우리의 오감을 가지고 그와 같은 관여를 느낄 수 없다면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병들었거나 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듯 Bultmann이 귀신이 없다고 선언한 반면에 또 다른 극단은 악한 사람의 죽은 영이 귀신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류와 아담 이전에 살았던 인류의 영 혹은 노아 홍수 이전 사람과 천사 사이에 태어난 존재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있고, 더 나아가 모든 질병과 사고와 고통이 귀신이 들어와서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는 귀신론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불신자의 사후가 귀신이라고 보고 귀신들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래 사람이 수명은 80-120년인데 불신자가 자신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죽을 경우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주로 가족에게 들어가 질병이나 사고를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는 것은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여 타락한 천사장의 부하들이고(사 14:12-15, 계 13:9), 질병의 원인도 육체적, 정신적, 영적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마 4:24, 요 9:3).  사실 귀신의 활동기간을 불신자가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다음부터 본래 인간의 수명인 80-120년까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고, 만약 사람의 수명이 본래 80-120년이라면 노아 홍수 이후에 셈의 후예 족보에 나오는 200년 이상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것입니다(창 11:10-26).  이렇게 양극단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귀신의 활동을 단순히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지만 사단은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계 20:10).


여기서 더 나아가 과연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고전 3:16),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고전 6:19-20, 행 20:28), 성령과 귀신이 결코 한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몸에 동시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구약신학자 Merrill F. Unger는 사울 왕이 귀신들린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사무엘상 10장6절에 의하면 사울 왕은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고(삼상 10:1),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지만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악한 영(악신)에게 괴로움을 당한 것을 제시하면서(삼상 16:14),『What Demon Can Do to Saints』에서 ”하나님의 영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시점에 그에게로 들어와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요 14:16). 반면에 마귀는 무단 침입자로 들어와 일순간에 쫓겨날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요일 3:8).  그러면서 Unger는 몇 가지 예를 들면서 마귀는 성령께 복종하는 신자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에 대하여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딤전 4:1).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는 귀신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귀신이 들릴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John Calvin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은(창 3:15),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단에게 정복되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상처는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Kurt E. Koch 박사는『Occult ABC』에서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써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귀신들린 자를 다루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고 부정하는 반면 귀신들린 자를 다수 카운슬링 해 본 경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귀신의 지배를 당하며 제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요약한다면 신약시대보다 현재 귀신들의 활동이 줄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고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요 8:44),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3), 그리고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룟유다(요 13:2), 심지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처럼(마 16;17), 만약 누구든지 마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다면(엡 4:26), 신자라도 얼마든지 귀신에게 억압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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