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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1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

예언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참으로 유익한 은사이긴 하지만(고전 14:3), 잘못 사용되면 주관론에 빠지기 쉬운 은사이기도 합니다.  2세기 말에 Montanism이 일어나면서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측면에 있어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Montanism은 지하 운동으로서 특히 기성교회에서 만연해 가는 형식주의와 세속성에 대해 저항하며 존속하였지만 문제는 이것이 너무 지나쳐 성경의 교훈보다 더 나아가게 되는 잘못된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또한 Edward Irving은 탁월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며 유능한 설교자이었으나 그가 1820년에 런던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 Robert Baxter는 영적인 사람으로 한동안 Irving Movement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이었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어느 날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아내와 자식과 직업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음성(계시)을 듣고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을 당시 그가 고백하기를 주님의 사랑이 과거보다 뜨거웠고 행복이 더 컸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는 것을 보고 결국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 후회를 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속죄 등을 다 고백했지만 자기 속에 있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그로부터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 중에 마치 자신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권위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자신을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을 특별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비록 크게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 혹은 모든 생각을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가정 하에 행동하거나 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연약함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나 마귀의 탓으로 돌릴 뿐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조금도 참작하지 않는 믿음 같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매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시므로 자신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문제점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경험을 초월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능가할 정도로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중단 없이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한 것처럼(시 13:1),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기간을 참고 견디어내야 했으며(시 28:1, 39:12, 83:1, 89:46, 109:1), 무엇보다도 구약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요구를 받는 대로 예언을 수시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군대장관들과 백성들은 자기들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바벨론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난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알아봐 달라고 예레미야에게 부탁했지만 기도한지 열흘 후에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42:1-7).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 역시 오늘날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원할 때마다 받으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종종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다고 했고(고후 4:8),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9).  이것은 사도들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분명한 지시를 받고 싶지만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든지 듣는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만이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에게 있어 또 다른 문제점은 자신의 주장과 실제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예언사역 안에서 진정한 열매를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마 7:15-20), 오히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분쟁과 혼란을 야기 시키고 최악의 경우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나누었다는 의심쩍은 대화들을 교묘히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만약 자신의 신뢰성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상실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의 예언사역을 인정해 줄 사람들이 있는 다른 교회로 옮겨갑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열린 교회의 지도자(목사)로부터 권면과 조언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상처와 거부감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영적교만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통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겠지만(고전 10:24, 1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그 귀중한 예언사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그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고, 더 심하면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는 가운데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만이 항상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일단 그를 경계하는 가운데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막무가내로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요일 4:1), 교회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정령주의와 체면술의 영향, 그리고 악령도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의지하거나 보도된 내용이 놀라움을 줄지라도 흔들리거나 주변사람들의 평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성령의 지시적인 인도함을 받아(행 8:26, 13:2), 성령께서 무슨 행동을 금지하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은 그것을 금지하셨습니다(행 16:6-7).  이것은 바울이 이성과 지성을 사용하고 행동했지만 그것이 성령의 뜻이 아니었기에 막으신 것이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되 진리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물리쳐야 하며(살전 5:21),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는 가운데(마 12:32),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겠지만(살전 5:19), 항상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움직이겠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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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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