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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21 십자가의 죽음

오늘날 교회에는 나무나 철로 잘 다듬어진 십자가를 강단에 장식해 놓고, 비그리스도인들 조차 십자가를 목에 걸거나 옷깃에 장식품으로 달기도 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혹은 너무나 익숙하게 십자가를 그저 하나의 ‘액세서리’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도가 지나쳐 이것을 우상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십자가를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고통스럽고 잔인한 고문의 도구였는지 잘 알고 있었고, 유대역사가 Flavius Josephe에 의하면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십자가의 형벌을 받지 않았고 다만 노예들이나 이방 민족이 죄를 범했을 때만 사용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Max Lucado는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에서 이렇게 적어내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에게 고통뿐 아니라 수치를 주려는 것이다. 대개 노예, 살인범, 암살범 등 죄질이 가장 나쁜 사람들만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사형수는 어깨에 형틀을 메고 도시의 거리를 누벼야 했다. 목에는 죄명이 적힌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처형장에 도착하면 벌거벗은 몸으로 조롱을 당했다.”라고 말하면서 이 형벌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인지 Marcus Tullius Cicero의 말을 인용합니다.  “로마 시민의 몸은 물론 생각과 눈과 귀에 십자가라는 이름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한 마디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는 말씀처럼 저주받은 자만이 죽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갈 3:13).

 

 

Mona Hooker는 『Not Ashamed of the Gospel』에서 “우리가 기독교 이야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가 사람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처벌 형태였던 사회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한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라는 복음이 매우 불합리한 것임을, 실로 완전히 정신 나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지적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어떠한 인간도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갈 4:4-6).  N. T. Wright도 “누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상기시켰는데, 사실 바울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갈 3:13).  무엇보다도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근절시키거나 유대를 진압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 억압의 도구였고(고전 1:23), 이들의 기준에 의하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한다면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하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고전 1:18).  Bruce Winter의 말을 인용한다면 자신을 소름끼치는 죽음에서 구해낼 충분한 능력과 지혜를 갖지 못한 목수출신 예수(막 6:3)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쉽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눅 23:35).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 다르게 ‘십자가의 진리’가 멸망당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고전 1:18), 그분의 지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에(고전 1:24), 이것은 타락한 인간들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롬 1:16).  사실 인간의 모든 종교와 사상 체계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데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고’(고전 1:21), 이렇게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고전 1:25).  환언하면 사도 바울의 말은 하나님이 어리석다거나 약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눈에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타나는 반응도 제각기이었는데(막 16:16),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불신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조롱했지만(마 27:39-42), 한 로마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마 27:54), 어떤 사람에게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제공하지만(요 3:15), 동시에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요 3:18), 십자가가 그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 관계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양극단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고전 1:18).

 

 

Gorden Fee는 고린도전서 1장을 주해하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전혀 그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 말의 의미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의 자리에 서있지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요 3:18).  사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려면 십자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요 14:6), 문제는 인간의 교만함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고안해 내며 끊임없이 십자가를 교묘하게 회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고(롬 5:8), 예수님의 주권적 권세는 이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심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셨습니다(마 26:39).  다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빌 2:8)은 주권적인 왕으로서 스스로의 재량권을 행사하신 것이지(요 10:17), 죄가 있어 죽으신 것이 아니며(요일 3:5),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였습니다(롬 3:23).  따라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불명예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마 27:46),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위대한 구속사역이고(갈 6:14), 이 십자가를 통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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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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