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와 사역에 대해 알지 못했을 당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신령(?)한 예언자가 어떤 사람을 놓고 예언을 하면서 그 사람이 병으로 일찍 죽을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인지라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가 정확하게 예언을 한다고 믿었고 혹시 의심을 하고 판단하면 성령을 대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덫에 걸리기 쉬운데, 이것은 사단이 성도들을 흔히 미혹케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 잘못된 예언을 들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딤후 4:6), 그 죽음을 알리신 하나님의 음성이 오히려 그를 기쁘게 했고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절망과 두려움을 주지만(렘 1:1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에게는 힘을 주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딤후 1:7).  그러므로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약 3:17, 빌 4:6-7, 요 16:33).

 

 

먼저, 우리는 예언적 계시를 받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유익함을 온전히 받기 위해 따라야 할 단계가 있는데, 이 예언이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통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이것이 정말 주님의 음성인지 시험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1).  다시 말해 예언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상상일 수도 있고(겔 13:17), 어떤 예언은 사단이 속이려고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렘 23:13),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고전 14:29, 살전 5:20-21).  이 문제를 놓고 Lloyd Jones『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판적인 능력을 행사할 것과 예언을 분별하고 시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언을 멸시함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모든 예언을 다 믿어서는 안 되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Wayne A. Grudem은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예언은 비록 하나님의 계시로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선포되어… 예언자가 틀린 수도 있고, 해석을 잘못할 수도 있으며, 아무 때나 도전받고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마디로 Graham Cooke이 말한 것처럼 “분변하지 않고 예언을 허용하는 것은 신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잘못된 예언은 성령의 은사에 관련된 주제에 많은 해악을 끼쳐왔기 때문에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는 R. T. Kendall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예언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어떻게 내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 아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들은 음성을 시험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중 하나는 먼저 성경으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들은 말씀이 성경과 모순이 된다면 하나님은 성경에 하신 말씀과 배치되는 예언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예언자가 정확한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벗어나서 하면 듣지 말아야 합니다(신 13장).  두 번째는 믿음이 일어나는지를 통해 시험하는 것인데,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언적인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일어나고 소망이 생깁니다(롬 10:17).  다시 말해 그 예언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솟아나게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대상 17장).  세 번째로 확인을 통해 받은 예언을 시험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딱 한번만 주시지 않고(욘 1:2, 2:1), 보통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해서 주시는데(창 41:32), 예를 들어 성경을 읽을 때 받은 말씀을 확신시켜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닫는 것이 있고, 또 꿈과 환상을 볼 수 있으며(행 2:17-18), 개인적으로 주신 말씀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됨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행 21:1-14).  마지막으로 경건한 지도자를 통해 시험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른 사역자의 증거, 즉 바른 예언자가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예언자는 미가야처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대하 18장).

 

 

물론, 이 네 가지 시험을 다 거쳤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언과 예언을 해석하는 능력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체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벧후 1:20).  사실 성숙하고 바른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져야 하고 아무리 노련한 예언사역자라도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고전 13:9), 스스로 전문가인양 행동하려는 교만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오늘날 주의 자녀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행 2:17-18), 무엇보다도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예언하는 사람은 항상 지도자의 권위 아래 이루어져야 함을 꼭 기억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역대상 25장2절에 보면 사람들이 아삽의 지휘 아래 예언을 하고 아삽은 왕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위계질서를 세우셨기 때문에(롬 13:1), 예언은 지도자(목회자)의 권위 아래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4:32-33, 40).  그리고 신약의 예언은 반드시 분별을 받아야 하며(고전 14:29), 물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이 없는 목회자는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이제 예언을 배워 나가는 사람은 경험 많은 사역자나 출석하는 지역 교회 목사에게 순복하여 성경으로 검증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예언의 은사는 예리하게 되어 많은 사람에게 크게 도움을 줄 것이고(고전 14:3), 진리의 말씀 위에서 바르게만 증거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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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Hyde

기도의 사람 2016. 4. 28. 14:31

기도로 인도 북부지역에서 기독교 부흥의 기적을 일으켰던 John Hyde는

미국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다.

1892년 졸업과 동시에 인도에 파송된 그는

더디기만 한 기도의 길을 몇 년이나 인내하며 걸었고,

1094년 뜻이 맞는 이들과 기도 연합회를 설립한 이래

체계적인 기도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그가 세운 기도실은 한 번도 비워진 적이 없었다.

Hyde와 그의 동역자들이 밤낮을 가라지 않고

기도하는 일이 꾸준히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간절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고,

인도인들 가운데 성령이 임하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남으로

참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기도하는 Hyde는 이후로도 뼈와 몸이 녹는 기도를 올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한 집회에서는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는 단 몇 마디의 문구로 청중들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도록 인도하기로 했다.

부흥의 염원하는 그의 뜨거운 중보기도가 일으킨 불길은

계속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때로는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해 기도회를 해산시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905년 펀자브 주 시알코트에서 일어난 부흥의 해일은

1910년까지 이어지며 기적과 결실들을 이끌어 냈다.

Hyde는 보통 기도할 때 얼굴을 땅에 대고 했다.

그의 기도 방식은 소박하게 간구의 말을 읊조리고는

가만히 기다리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간구가 자기 존재에 자체에 속속들이 스며들 때까지

하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분명히 응답하실 거라고 확신할 때까지

그는 간구하고 기다리기를 거듭하였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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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리스도인들조차 인간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생활을 변명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율법을 범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난 것입니다(롬 6:18, 2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이미 지은 죄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도 않습니다(롬 6:2, 14).  하나님의 자녀가 율법을 범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에게 신(神)을 주어 율례를 행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겔 36:27).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따라 살 때 육체의 욕심을 이기고 빛의 자녀로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엡 5:8-9).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로마서 8장4절 말씀처럼 주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성령을 따라 능히 율법(도덕법)을 지킬 수 있고(롬 13:8-10), 그 율법은 사랑을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집니다(마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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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이혼에 대한 의식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비록 성경은 허락하지만 이혼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고 또한 모든 이혼이 죄악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이혼이 죄에서 비롯된 것만은 사실이기에 이 고통스러운 이혼은 사라지지 않는 현실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슬픈 증거이기도 합니다(마 19:8).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 Gordon J. Wenham은 “우리는 쓰고 버리는 결혼 문화 속에 살고 있는데 이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혼은 개인과 가정에 정서적인 폐해와 영적인 피해를 상당히 끼치고 있기 때문에 부부가 갈라서는 것은 인간관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며(눅 16:18), 무엇보다도 이혼을 부정적으로 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 19:6)고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이혼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혼은 언약에 위배되는 것이고(막 10:9), 무죄한 배우자에게 있어서는 고통과 상처를 줄 뿐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들 그리고 이웃과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혼을 반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의 고통을 겪는 사람을 불리하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먼저 믿는 자들 사이에 합법적인 이혼을 할 수 있는 경우에 한쪽 배우자가 저지른 부정, 즉 ‘음행’이 있을 경우에 이혼이 허용될 수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마 5:32), 만일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또한 상대 배우자도 그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두 사람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음행 죄를 지은 배우자가 회개했다면 상대 배우자는 그를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눅 17:3).  따라서 음행 죄를 지은 배우자와의 이혼은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제안을 두어야 하는데, 만약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반복적으로 계속 음행 죄를 짓는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징계를 내려야만 하고(마 18:15-17), 상대 배우자는 이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부부 중 한 사람만 믿는 경우 불신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은 ‘갈리게 하라’고 말하는데(고전 7:15), 여기서 갈리게 하라는 말은 명령형으로 이혼을 해야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면 믿는 배우자가 그것을 억지로 붙들거나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15).  그러나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끝까지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고전 7:12-13), 그 이유는 믿는 자와의 연합을 통해 믿지 않는 자가 주님을 알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14).

 

 

이렇게 배우자의 음행 문제와 불신 배우자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경우에 이혼할 수 있다고 한다면 또 다른 예외는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신체적/언어적 폭력, 정신적인 학대, 술/마약/도박 중독, 약물 남용, 자녀 학대, 무관심(부부관계)과 무책임한 행동 등등, 가정에 행복과 사랑이 넘치기 보다는 계속해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관계 속에서 끝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거나 이런 것들이 이혼 사유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은 없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이런 잘못된 행동은 결혼 언약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훗날 심판대 앞에서 가정폭력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도록 저지른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지도 모릅니다(고후 5:10).  물론 부부가 가정이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어진 신뢰와 마음의 상처가 회복하기 힘든 상태이거나 미움과 증오로 인해 자포자기에 빠지는 가운데 유일한 해결책이 서로의 행복을 위해 갈라서는 것이 결혼을 지속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혼하는 것이 비록 악이긴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큰 고통보다는 서로 갈라서는 것이 작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은 이런 경우에도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큰 고통이고 이혼하는 것이 작은 고통이 된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 중에 헬라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리 또한 명확한 성경의 사례를 넘어선 이혼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룰 때 신중해야 하겠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믿는 자의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용하신 것이고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원래 의도하셨던 것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고(창 2:24), 바울도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0-11)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고, 만약 아내가 주의 명령을 어기고 남편과 이혼을 한다면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다시 그 남편과 합하든지 하라’(고전 7:11)는 말씀처럼 아내는 전남편과 화해하고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이것은 불순종한 것으로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던져 넣어(신 24:4),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짓는 것입니다(마 5:32).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음행을 이혼의 정당한 근거로 삼으셨고(마 19:6), 바울도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말했지만(고전 7:15), 이것 외에 다른 이유, 즉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혼을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욕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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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당신이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관심 밖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그분의 임재로 채우시면,

당신이 할 일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할 때에도

그분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당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당신의 길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지도입니다.

그분의 지도를 하루하루 따라가면

당신은 항상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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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3:20).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것이고(마 5:13-16), 또한 자신의 영적순결을 유지하면서 믿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롬 15:2).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천국백성답게 살아야 하는데(벧전 2:9-10),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음행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주의 전을 더럽히는 것이고 창기의 지체를 만드는 행위로(고전 6:15, 19),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마 5:27-32).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롬 13:8-10).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불신자보다 모든 면에서 의롭게 살도록 노력해야만 하고(마 5:20),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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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문제가 아닌 사역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거의 2주가 되어갈 무렵, 아침예배를 드리고 숙소로 돌아와 힘이 없어 드러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위와 식도 부분이 아프고 따끔거리며 통증이 오면서 운동할 때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증상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혹시 금식을 잘못해서 위나 식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반면에 이것이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께서(출 15:26), 이런 방식으로 만지시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순간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기도원에서 위장병을 치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질적인 질병을 일방적인 은혜로 말끔하고 깨끗하게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위궤양과 만성위염으로 인해 거의 25년 이상 위장약을 복용했지만 약을 먹을 때만 효과가 조금 나타나는 것 같았고 먹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똑같은 증상이 계속 일어났는데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증상이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라기 2장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육체의 질병을 말끔하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치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치실 때 항상 즉각적으로 고치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막 1:42),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고전 12:9)란 항상 즉각적이지만은 않고 때로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먼저 성경에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다고 하신 말씀은(막 16:18), 병자가 금방 나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병의 힘이 끊어지고 급속한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받고 곧 바로 고침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마 8:3, 눅 5:13), 믿음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에 즉각적으로 회복되지 않아도 병세가 더 호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약 5:16).  예를 들어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일부분만 고치셨을 때 그 소경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무로 보인다고 말했는데(막 8:24),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 단번에 완전하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눅 5:17), 아마도 제자들에게 생생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믿음이 없는 소경에게 완전한 치유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점진적으로 고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안수하실 때 그 소경이 온전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막 8:25-26).

 

 

또 한 가지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치유가 항상 영구적이라고 믿는 것인데, 오늘날 병 고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나서 다시 재발된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행해지는 치유사역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완벽하게 고치셨다고 말하면서 병이 재발되거나 부분적으로만 고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치유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유가 항상 영구적이지만은 않다고 가르치고 있고, 언제든지 밑에 깔려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육체의 질병은 다시 재발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우리는 그 해답을 요한복음 5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요 5:14),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만약 다시 죄를 지으면 깨끗하게 고침 받은 질병이라도 얼마든지 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45절에서도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더 많은 귀신들이 찾아오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적도 있는데, 이것은 치유가 영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줄 뿐 아니라 죄 짓는 것에 노출이 되면 그만큼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병원치료에 관한 것으로 신자들 중에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병원이나 의사에게 가는 것을 꺼리고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문제는 끝까지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사이비 치유사역자를 만나 병이 더 악화되어 열 두해 혈루증에 걸린 여자처럼 위험한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막 5:25-27).  사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인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셨고(눅 5:31),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말하는 치유란 병원치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눅 10:34)이나 의술(사 1:6)을 사용하여 치료를 하시기에 의학적인 방법으로 고치는 것도 그분이 사용하시는 다양한 방법 중에 하나이라는 것입니다(사 38:21).  그러므로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방법이 안수기도인가(막 5:23), 아니면 명령/선포/대적기도인가(눅 4:39), 혹은 단순한 기도인가(마 8:16), 라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병자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또는 아버지께서 병자를 향하신 뜻인 무엇인지에 따라 치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고(사55:8-9), 만약 누군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개인의 권능으로 치유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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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느냐는 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네 가지 중요한 요소를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경험한 것이 한 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대개는 그 개인에게 독특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 이것이 내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구나.

나의 선조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의 떨기나무 경험을 가졌고

이번 것은 내 떨기나무 경험이구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독특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들은 사람은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았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죠.

모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간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이가

그들 조상 하나님이 자신이셨음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말씀하셨을 때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았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토록 많은 핑계를 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수께끼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메시지를 명확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가 그분과의 만남이다.

모세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요?

“불붙은 떨기나무와의 아주 좋은 만남이었어.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나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에게 진리를 보여주시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성경, 기도, 환경,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면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 14).

 

빌립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것과 동일하게

제자들도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지나 사도행전 그리고 현재로 넘어가면

우리는 종종 우리 마음의 모든 고정관념을 바꾸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그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기를

멈추신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성령님과의 만남이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부터 현재까지 

하나님은 성령으로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든지

자신이 선택하신 방법으로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당신에게 해주시며,

무슨 일이 닥칠 것인지 알려주시고,

예수님을 증거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정말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까?

그렇지요!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고 계신지를 가르쳐 주실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려움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심장부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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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제2위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사람들에게 율법의 제정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율법 가운데서도 으뜸 되는 것으로 보았고(마 5:17), 율법을 백성들에게 선포한 모세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였지만 그는 율법의 제정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자에 불과했습니다(출 20:1-23:23).  따라서 율법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는 율법의 전달자인 모세의 권위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에(행 6:14), 예수님은 당시 율법 교사들처럼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을 인용치 않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 28, 32)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당시 율법 교사들과 같이 기존의 행위 중심의 율법 해석을 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마음의 동기를 강조하셨는데(마 5:21-48), 그것은 실로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율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살인행위만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욕하는 것만으로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마 5:21-22).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 해석자들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른 율법 제정자로서의 권위를 가진 것이었고 백성들도 그의 권세 있는 가르침에 실로 놀라움에 금치 못했습니다(마 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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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Jones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하여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사역하면서 자신이 세 그룹의 사람들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부류는 참된 기독교 체험과는 격리된 성경적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기쁨이 결여된 칼빈주의적 경건주의자들이며, 세 번째 부류는 은사 운동에만 관심을 가지는 감정주의 복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 건강을 성경적 이해의 빛에 비추어 첫 번째 그룹을 죽은 정통으로, 두 번째 그룹을 영적인 벌레들에게 먹혀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세 번째 그룹을 암적인 광신주의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데, 먼저 성경적 정통주의자들의 특징은 무슨 말만 하면 항상 성경책을 들이대며 성경만이 최고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신격화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부류인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들도 무슨 이야기만 하면 무조건 Calvin을 내세워 말을 하는데, 마치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Calvin이 한 말에 맞춥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신비주의적이며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현대교회 안에서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이고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부류이기도 합니다.

 

먼저 성령의 은사에 냉담한 사람들인 John Walvoord 그의 동료인 Merill Unger는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사라졌다고 강조하는데,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게 된 이유는 B. B. Warfield가 저술한『Miracles Yesterday and Today』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책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카리스마적 은사의 타당성을 반대하는 가장 유력한 책으로 Warfield는 은사의 기능은 사도시대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 사도들이 죽을 때 그 은사들도 필연적으로 그들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합니다.  이들처럼 여전히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먼저 Robert L. Reymond는 『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성령의 은사지속설은 계시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고린도전서 14장을 개괄적으로 주석하면서 “계시가 사도시대 말기에 중지되었다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 / i, vi), 이런 의미의 선지자들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예언은사를 추구하려는 바울의 권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예언과 방언과 지식 등 계시은사들은 계시과정의 종결과 함께 끝났고, 기적의 관계를 거론하면서 능력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랬듯이(요 5:36, 10:38, 행 2:22), ‘사도적 메시지의 확증’ 즉,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었던 특수표징들은 사도들이 지나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중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Richard Gaffin 역시 『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근거하여 “교회는 사도들과 신약적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 예언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비계속적인 기능으로 사도직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사라진 것이다. …만약 예언이 계속된다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계시의 언약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베드로전서 4장10-11절 말씀을 근거하여 성령의 은사들은 말씀은사와 행위은사로 나누고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은사는 교회창설적 성경을 띤 것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Gaffin은 이런 원리 하에서 신유와 기타 관련된 은사들에 관해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은사들은 ‘사도적 표징들’이므로 사도 이후 교회의 생활에서는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영국 복음주의교회의 회복운동을 주도한 Lloyd Jones의 사역에 동참했던 적이 있는 Peter Masters도 『The Healing Epidemic』에서 “카리스마적인 혼란의 시대인 요즘에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했고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렇게 예언, 방언, 신유, 기적 등의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은사들은 교회 창설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성경계시의 종료 면에서 중지된 은사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엡 2:20, 3:5, 고전 13:8-12, 14:20-25, 29-30절 등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Michael Green은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이런 태도(은사중지론)는 성령의 강력한 삶에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단순한 도피주의이며 성령은 바람과 불의 영으로 남아 계시고 교회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분을 어떠한 교회적 밀실(박스)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며 신유, 예언, 축사 및 방언이 마지막 사도들과 함께 죽어버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Wayne Grudeme 고린도전서 13장8-12절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영적인 은사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말했고, Gordon Fee 역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John Stott는 『One People』에서 은사목록 중에 사도직과 예언과 기적을 제외시켰고, John MacArthur는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에서 기적과 방언과 신유와 방언통역 같은 은사를 일시적 은사로, David Hocking은 『Spirit Gift』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말하며, John Walvoord는 『The Holy Sprit』에서 Merill Unger는 『The Baptism and Gifts of the Holy Sprit』에서 모든 은사의 기능이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반대 입장을 취하는 Michael Griffiths 외에 많은 은사지속론자들은 오늘날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주장은 자유주의에 가까운 바람직하지 못한 입장이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여전히 동등하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합니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입장을 중간에 바꾼 사람들도 있는데 Earl Radmacher은 오순절 계통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오순절 교회를 떠나자 교회 안에서의 방언사용을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반대하며 비판했고, 반면에 장로교 학자인 Rodman Williams는 처음에 기적적인 은사가 사라졌다는 Warfield의 견해를 따랐으나 이제는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고 확신하면서 『The Era of the Spirit』에서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약성경을 잘못 읽어온 데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 제자훈련 세미나로 한국에서 잘 알려진 Bill Hull은 성령의 은사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Talbot School of Theology에 들어가서부터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굳게 믿었지만 현재 성령의 은사들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성령에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이렇게 상기시킵니다.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중단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만약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략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 설교자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교리에서 이 논쟁만큼 교회의 분열과 알력을 야기 시킨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양쪽 진영에서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목사들이 성경을 기초로 해서 저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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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자기 개방이 훈련의 성과를 좌우한다는 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타인의 오픈에 어떤 태도로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훈련의 과정이 서로에게 유익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 자기 개방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자기 개방이 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현명하게 타인의 개방을 받아주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가 타인의 개방을 현명하게 받아주는 자세일까요?

 

1. 비밀은 절대로 지키십시오.

대부분 문제가 되는 경우는 훈련생들을 믿고 말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돌아다닐 때입니다.  남에게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아픈 상처나 문제를 들었을 때, 그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상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남의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있습니다.  아니면 주의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제3자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이건 절대 비밀인데......” 혹은 “어디 가서는 이런 얘기하지 마세요. 집사님이니까 이야기하는데”라면서 시작되는 대화가 이런 종류입니다.  자신은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실상은 제3자에게 남의 비밀을 퍼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어디에 가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요?  조금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태도는 쉽게 고칠 수 있습니다.  소그룹에서 나온 이야기는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비밀이 유지되지 않으면 자기 개방은 물 건너가고 맙니다.

 

2. 오픈한 내용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자기 개방을 현명하게 받아주는 또 한 가지 자세는 개방하는 그 내용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떠했든지 문제 삼지 마십시오.  남이 알면 어려운 문제를 용기 있게 이야기한 사람은 더 이상 그 문제로 계속 판단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습관은 주로 자기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에게서 발견됩니다.  평소에 자신의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신념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제자훈련은 남을 판단하기 위해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허물을 잘 덮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오픈한 내용이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눈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다른 사람들도 각자가 가진 눈으로 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3. 다른 사람의 오픈을 타산지석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고, 누구에게나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오픈한 것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젠가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오픈한 내용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경험한 것을 토대로“나는 어떤가?” 또 “나의 가족은 어떤가?”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항상 “나라면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결코 자만하거나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당신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리고 문제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결단은 무엇인지를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십시오.

 

내가 오픈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잘 받아주고 그것을 절대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오픈하더라도 나를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만나면 그와 어떠한 일이든지 함께 하고 싶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에게 “오픈해줘서 고맙다”며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앞으로 내가 그 사람을 더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길은 다른 사람의 오픈에 현명하게 반응하는 훈련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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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마 5:17)고 말씀하셨듯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기한 것이라면 예수님 이후 시대에 출생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율법 없이(롬7:7)는 인간을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4:15).  또한 인간이 정죄 받은 죄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도 율법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은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위로 율법을 완수하신 것(마 5:17)과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롬 3:31), 그리고 예수님이 율법의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을 의미합니다(롬 10:4).  사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의롭게 살면서 생명을 얻고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지만 백성들은 율법을 어김으로써 율법 아래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 외에 의롭게 되는 다른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행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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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채플의 교인들은 나의 아내 루이스가 겪은 심각한 기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3년간 지속되었다.  한번은 루이스가 기침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런던에 있는 성토마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 전문의는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않으면 망막이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끔찍한 날들이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데 아내의 병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의 기도로 치유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와 그의 아내가 친절하게도 루이스를 기도해 주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채플로 찾아왔다.  당시 루이스는 기침 때문에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요.”  그녀는 간신히 교회에 도착했다.  대대적인 광고나 예배도 없었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라는 강조하는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부부는 아내에게 대략 5분 정도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아내는 즉시 나았다.  이것은 1994년 12월의 일이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의 치유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했던 기침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이 간증은 R. T. Kendall 목사의 진솔한 고백으로 당시 루이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통해 치유기도를 받던 날은 거의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물론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무척 거스리거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은사 중지론자들은 이런 은사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강변하는데, 이들의 말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정경의 마지막 말씀을 기록할 때까지 복음의 진리와 함께 하며 그 진리가 이미 입증됐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런 은사들을 나타낼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성경 기자도 기록된 성경이 표적과 기사 등의 실체를 대신하거나 어떤 의미에서 대체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과거에는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데 필수적이었다면(롬 15:18), 지금 불신 세상에서는 더더욱 필요할 것이고(막 16:20),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도 사역을 입증하고 확증하기 위해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는데(요 14:11), 만일 이것이 주님에게 필수적이었다면 지금처럼 타락하고 패역한 이 시대에는 얼마나 더 필수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은사를 배제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일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마 12:22-37), “은사들은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적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라는 D. A. Carson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답을 찾아야 하는데, 먼저 고린도전서 12장7절 말씀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각각의 은사는 교회를 강화시키고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고(고전 14:4), 이렇게 각 신자에게 성령이 나타나시는 방식,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산출하는 것이 그분 뜻대로 각 사람에 주시는 은사인데(고전 14:11), 이 은사의 주된 목적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이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써(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 나가는 공동의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엡 4:16),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엡 4:12), 결국 은사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개인을 세워주는 것도 은사의 목적으로 볼 수 있지만(고전 14:4),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말한 것처럼 은사의 다양성(고전 12:14)과 통일성(고전 12:20)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종속적인 목적이 있습니다(고전 12:4-6).  즉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중에 필요치 않은 은사는 하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인(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은사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른 은사들과 달리 가장 논쟁이 심한 은사가 방언인데, 궁금한 것은 이 은사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성령 하나님은 고린도교회 모임에서 방언이 사용되도록 통역의 은사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26).  또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사도 바울 자신은 은밀히 홀로 기도할 때 그 은사를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사실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고전 14:29), 확실한 것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기도로 보냈다는 것입니다(고전 14:18).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방언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5), 무엇보다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영적생활과 믿음을 강화시키는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더 정확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말한 것은 그 은사가 개인적인 강화뿐만 아니라 통역이 있을 때(고전 14:13), 교회에 유익이 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받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환언하면 방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격려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고(고전 14:3, 26), 이 은사들이 교회로부터 제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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