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스위스 신학자 Karl Barth가 한 말인데,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취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 또한 세상을 창조하시며(요 1:3), 유지하는 신성의 역사(골 11:16-17)에 활발하게 가담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창 1:26). 그러나 부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마 26:46)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12). 여기에 차이점이 있다면 죄로 인하여 그 형벌로서 주어진 사망의 권세 아래 사로 잡혔던 인간(히 2:14-15)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이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첫 단계로서(벧전 3:22), 승귀가 단순히 신성과 관계된 것만이 아니라 인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요 2:19),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도 장차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고(고전 15:21-2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과 구원, 그리고 소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인데(롬 8:11),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소망도 주지 못하는 헛된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고전 15:14).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사건은 신약의 핵심 메시지이며 기독교 복음의 절정이기에, 만약 예수님의 이야기가 십자가로만 끝났다면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놀라운 복음은 사기성 있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전 범위는 부활의 원리에 근거할 뿐 아니라(행 26:23), 예수님의 부활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고전 15:20), 부활을 빼버리면 기독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고전 15:15). 이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은 다양한 증거를 내세우는데, 먼저 Michael Ramsey는 부활이 없는 복음은 그저 복음의 마지막 장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음이 아니며, George Carey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교회도 필요 없을 것이고, Eugene Peterson 역시 『The Message』에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바울의 논지를 생생하게 풀어 “그리스도에게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이 연기와 허상이며,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너희가 하는 모든 것은 길을 잃고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 단지 몇 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받은 약간의 영감이 전부라면 우리는 매우 가련한 운명이다.”라고 했고, Gerald O' Collins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은 지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라고 강조하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즉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 지니는 장엄한 성질에 잠잠히 경의를 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신학자/목사들이 있듯이 부활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먼저 독일의 신학자 Rudolf Bultmann은 부활에 대해 시체가 소생하는 신화적 사건을 믿을 수 없고, Christopher Evans는 부활절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로서는 알 방도가 없으며,『Significance of the Message of the Resurrection for Faith in Jesus Christ』라는 논문을 써서 독일 루터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Willi Marxsen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성경 분문에 호소함으로써 역사성에 대한 의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에서 나온 주관적 환상이지 실제가 아니라고 강변했고, David Jenkins 역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지만 무덤에서 육체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살아나신 것이고 심지어 예수님의 몸의 부활했다는 교리를 ‘뼈로 하는 마술’이라고 망언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Gerd Ludemann는 독일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 신학자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베드로가 환상 가운데 주님을 본 결과 생겨나게 된 것이고 그 환상은 그 후 즉시 전염되어 다른 이들도 따르게 되었다고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사악한 궤변들이지만 심각한 것은 이들 모두가 개신교 신학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의 신학사상은 거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고전 1:23), 그가 처음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했고(고전 2:2),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갈 3:1). 그는 반복해서 십자가(고전 1:17-18, 갈 5:11, 6:12-14, 엡 2:16, 빌 2:8, 3:18, 골 1:20, 2:14)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고전 1:23, 2:2, 8, 고후 13:4, 갈 3:1),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못 박힘에 관한 것(롬 6:6, 갈 2:20)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가 그의 신앙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Richard N. longenecker가 말한 것처럼 바울의 설교의 초점이 그리스도 활동의 구속의 중요성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고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행 13:16-41). 바울이 이처럼 십자가를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고후 5:21)이 죄인들이 죽어야 하는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인데(롬 6:23, 고후 5:14), 사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속량하셨고(갈 3:13), 대속의 고난을 말하는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고전 1:18)과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벧전 2:24).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만을 증거 하지 않았고 복음에 대해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할 곳인 아덴에서 그는 ‘예수와 몸의 부활’을 강하게 전하였는데, 얼마나 부활을 강조했던지 아덴 사람들은 그가 ‘예수’라는 신과 ‘Anastasis’(부활을 뜻하는 헬라어)라는 두 신을 전파하는 것으로 혼동하기도 했습니다(행 17:18). 이것은 십자가의 신앙을 가진 바울마저도 부활의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는 사실과 함께 데살로니가후서 이외에 모든 서신에서도 부활의 사건에 대해 십자가 이상으로 증거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말하고(롬 8:11, 고전 15:15, 엡 1:20, 골 2:12), 그보다도 더 자주 그리스도가 살리심을 받았다고 증거하며(롬 6:4, 9, 고전 15:12-14), 드물게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롬 14:9, 살전 4:14). 이렇게 부활하여 승귀하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하는(골 3:1, 엡 1:20-21, 빌 2:9),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도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행 9:15), 그러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진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고전 15장). 즉 부활은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신앙의 핵심이기에(살전 4:13-14), 십자가와 부활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결정하고자 하는 태도로 이 둘을 나누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