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제2위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빌 2:6),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갈 4:4)하셨다고 명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증거 했는데(히 4:15), 여기서 죄 없다는 판단은 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율법이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롬 5:13).  이와 같은 성경구절들은 그리스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을 지켜야만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만일 율법을 범한다면 그 역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온전히 순종함으로 온전케 되셨고(히 5:8-9), 의로운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롬 5:18).  결국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의인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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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스위스 신학자 Karl Barth가 한 말인데,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취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 또한 세상을 창조하시며(요 1:3), 유지하는 신성의 역사(골 11:16-17)에 활발하게 가담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창 1:26).  그러나 부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마 26:46)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12).  여기에 차이점이 있다면 죄로 인하여 그 형벌로서 주어진 사망의 권세 아래 사로 잡혔던 인간(히 2:14-15)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이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첫 단계로서(벧전 3:22), 승귀가 단순히 신성과 관계된 것만이 아니라 인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요 2:19),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도 장차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고(고전 15:21-2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과 구원, 그리고 소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인데(롬 8:11),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소망도 주지 못하는 헛된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고전 15:14).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사건은 신약의 핵심 메시지이며 기독교 복음의 절정이기에, 만약 예수님의 이야기가 십자가로만 끝났다면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놀라운 복음은 사기성 있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전 범위는 부활의 원리에 근거할 뿐 아니라(행 26:23), 예수님의 부활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고전 15:20), 부활을 빼버리면 기독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고전 15:15).  이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은 다양한 증거를 내세우는데, 먼저 Michael Ramsey는 부활이 없는 복음은 그저 복음의 마지막 장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음이 아니며, George Carey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교회도 필요 없을 것이고, Eugene Peterson 역시 『The Message』에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바울의 논지를 생생하게 풀어 “그리스도에게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이 연기와 허상이며,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너희가 하는 모든 것은 길을 잃고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것이 단지 몇 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받은 약간의 영감이 전부라면 우리는 매우 가련한 운명이다.”라고 했고, Gerald O' Collins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은 지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라고 강조하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즉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 지니는 장엄한 성질에 잠잠히 경의를 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신학자/목사들이 있듯이 부활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먼저 독일의 신학자 Rudolf Bultmann은 부활에 대해 시체가 소생하는 신화적 사건을 믿을 수 없고, Christopher Evans는 부활절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로서는 알 방도가 없으며,『Significance of the Message of the Resurrection for Faith in Jesus Christ』라는 논문을 써서 독일 루터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Willi Marxsen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성경 분문에 호소함으로써 역사성에 대한 의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에서 나온 주관적 환상이지 실제가 아니라고 강변했고, David Jenkins 역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지만 무덤에서 육체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살아나신 것이고 심지어 예수님의 몸의 부활했다는 교리를 ‘뼈로 하는 마술’이라고 망언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Gerd Ludemann는 독일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 신학자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베드로가 환상 가운데 주님을 본 결과 생겨나게 된 것이고 그 환상은 그 후 즉시 전염되어 다른 이들도 따르게 되었다고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사악한 궤변들이지만 심각한 것은 이들 모두가 개신교 신학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의 신학사상은 거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고전 1:23), 그가 처음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했고(고전 2:2),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갈 3:1).  그는 반복해서 십자가(고전 1:17-18, 갈 5:11, 6:12-14, 엡 2:16, 빌 2:8, 3:18, 골 1:20, 2:14)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고전 1:23, 2:2, 8, 고후 13:4, 갈 3:1),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못 박힘에 관한 것(롬 6:6, 갈 2:20)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이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가 그의 신앙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Richard N. longenecker가 말한 것처럼 바울의 설교의 초점이 그리스도 활동의 구속의 중요성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고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행 13:16-41).  바울이 이처럼 십자가를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고후 5:21)이 죄인들이 죽어야 하는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인데(롬 6:23, 고후 5:14), 사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속량하셨고(갈 3:13), 대속의 고난을 말하는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고전 1:18)과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벧전 2:24).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만을 증거 하지 않았고 복음에 대해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할 곳인 아덴에서 그는 ‘예수와 몸의 부활’을 강하게 전하였는데, 얼마나 부활을 강조했던지 아덴 사람들은 그가 ‘예수’라는 신과 ‘Anastasis’(부활을 뜻하는 헬라어)라는 두 신을 전파하는 것으로 혼동하기도 했습니다(행 17:18).  이것은 십자가의 신앙을 가진 바울마저도 부활의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는 사실과 함께 데살로니가후서 이외에 모든 서신에서도 부활의 사건에 대해 십자가 이상으로 증거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말하고(롬 8:11, 고전 15:15, 엡 1:20, 골 2:12), 그보다도 더 자주 그리스도가 살리심을 받았다고 증거하며(롬 6:4, 9, 고전 15:12-14), 드물게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롬 14:9, 살전 4:14).  이렇게 부활하여 승귀하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하는(골 3:1, 엡 1:20-21, 빌 2:9),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도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행 9:15), 그러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진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고전 15장).  즉 부활은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신앙의 핵심이기에(살전 4:13-14), 십자가와 부활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결정하고자 하는 태도로 이 둘을 나누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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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당신이 하나님이 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한 가지를 믿으면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전지하십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과거, 현재, 미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분의 인도하심은 항상 옳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여러 가지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가장 좋은 것을 고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몇 가지를 보여주셔야

당신이 옳은 길을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맨 처음에 옳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즉,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적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분이 당신에게 행하실 힘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당신의 삶이 놓여져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많은 생각들을 다시 재배열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때로는 틀렸거나 미쳤거나 불가능한 것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당신에게 최선임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분이 하나님이시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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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에는 반드시 입법자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듯이 율법 역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대상인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하게 이르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갈 3:19)이라는 성경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것이 왜 죄이며(롬 3:20),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일깨워 죄의식을 갖게 하고(롬 7:7),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울이 율법을 몽학선생(蒙學先生), 즉 어린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고 한 것도 이 두 번째 율법 제정 목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갈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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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전쟁관

연구자료 2016. 3. 15. 14:26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전쟁은 성전(聖戰)의 성격을 지닌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참가하셔서 싸우시는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용사이신 여호와’(출 15:3)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숱하게 치루었던 전쟁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이방의 우상들을 섬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라는 특면과 함께 지나친 악을 자행하고 인간의 도리를 넘어선 오만을 가진 이방 국가들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성격을 지녔다(암 1:1-2:3).  성경에 기록된 전쟁은 영토 확장이라는 일반적인 전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종교적인 것이며 언약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언약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가르치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이다(출 19:5-6).  종교적인 전쟁을 치루는 이스라엘은 항상 승리를 여호와의 관계에서 파악했으며(삿 3:28, 삼상 7:8), 전쟁은 하나님과 상의한 후에 시작되었다.  이때의 신탁(神託) 도구로는 여호와의 궤(삿 20:27), 에봇(삼상 30:7-8), 우림(삼상 14:41:, 28:6), 그리고 꿈과 선지자 들이 사용되었다(삼상 28:6).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방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치루며 싸운 사실은 그 자체가 신앙의 실천적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쟁은 ‘여호와의 싸움’이었으며(삼상 18:17, 25:28), 여호와께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신 9:3, 20:4, 삿 4:14).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전쟁의 개념은 영적인 범위로 확대되고 재해석되었다(고전 14:8, 고후 10:3, 딤전 1:18-19).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죄와 악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엡 6:10-12).  이 싸움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영적인 무장을 하고 싸움에 임해야 한다(엡 6:10-17).  물론 여기서의 싸움은 성도들이 육신의 정욕과 악의 유혹, 죄와 싸워 나가는 하루하루의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싸움도 구약시대의 성전(聖戰)처럼 하나님께서 같이 하셔야만 승리할 수 있다.  결국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골 2:12-15), 성도들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힘을 빌면 이 영적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앙의 확신을 갖는 것이다(골 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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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혀는 말(horse)의 고삐나 재갈보다도 작고 배의 키보다는 훨씬 더 작아서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것을 조절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성경은 말의 파괴성에 대해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라고 표현합니다(약 3:1-6).  여기서 혀는 말(word)을 의미하고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며 이 소리를 언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을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불씨가 온 산을 태우고 큰 건물을 집어 삼켜 태우는 것 같이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하는 자신에게도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전 10:13).  야고보는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말하는데(약 4:11), 여기서 ‘비방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쁘게 말하다” 혹은 “다른 사람을 대적하여 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대방에게 불리하게 말을 하는 행위로 William Barclay에 의하면, 이 단어는 대화의 현장에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헐뜯는 행동”이나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가 없는 은밀한 곳에 모여서 혹은 인터넷 댓글을 통해 한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는 어떤 정보들을 주고받거나(잠 18:8), 그 사람에 대하여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판단을 하는 것인데, 이 판단은 대체로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인간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도덕적인 비난이나 비판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시 52:4).

 

사실 이러한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낫게 평가할 때 나타나는 좋지 못한 ‘갑질’의 행위로 상대방을 적수로 놓고 깎아내려 자신을 상대방보다 더 높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한 마디로 이런 행위는 “교만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은 사실을 말하느냐 거짓을 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해 인격적인 모독을 가하거나 깎아내리는 말을 할 때, 그것이 비방이 된다는 것입니다(딤전 5:13).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롬 3:8), 성경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하면서 그 말을 통해 그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도 있고 정죄함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마 12:36-37).  다시 말해 형제에 대해서 무심코 내뱉은 “터무니없는 말”이나 “함부로 지껄인 말”, 심지어 “무가치한 말”들까지도 심판 날에 문제가 될 만큼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 5:22).  로마서에서도 이 비방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롬 1:29-32)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겠지만(잠 21:23), 만약 혀를 잘못 놀리면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잠 18:21).

 

우리는 성경에서 이 비방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모세와 아론의 누이이며 여선지자(출 15:20)인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모세가 이방 사람인 구스 여자와 결혼을 했을 때(민 12:1), 시기심과 질투심을 가지고 모세를 향해 비방을 하자(민 12:2), 하나님은 이 문제를 판결하기 위해 회막 문에 나타나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진노하셨고 그녀는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민 12:9-10).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엘리사를 보고 조롱하던 사십 이명의 어린아이들이 졸지에 곰에 물려 죽은 사건으로(왕하 2:23-24), 분명 주님은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마 12:14),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대머리’라고 조롱하는 말 한마디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때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 4:30),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지름길은(잠 18:8), 상대방을 향해 신랄하게 비방/비판을 하는 것입니다(히 13:7).  그래서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하는 말이나 신앙이 자신과 맞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의 좋은 점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비방하지는 말아야 하고, 또한 그의 언행이나 행동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하더라도 마치 자신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속단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4:5).  그 이유는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에게(롬 3:9), 다른 죄인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롬 14:4).

 

사실 죄인이 죄인을 판단하거나 비방 혹은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고(마 7:1-5), 우리들 중에 누구를 비방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의인은 단 한사람도 없고(롬 14:10),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푸른 하늘도 더러워 보일 수 있는데(욥 15:15-16), 하물며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사는 죄인들이(전 9:3), 남을 판단한다면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렘 17:9).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상관없이 단 한시도 죄를 짓지 아니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로(요일 1:8), 그 누구도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깨끗하고 완벽한(왕상 8:46), 범죄치 않는 인간은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전 7:20).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생각하실 때 단지 부정적인 면을 꼬집어 내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생각하시는 것은 (민 23:21), 그분이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자비하시고(시 78:38), 인애하시며(호 12:6),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삼하 22:36).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보신다면 우리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이나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겨야 하고(엡 4:22), 무엇보다도 주님의 성품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마 11:29), 그를 도와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단 12:3).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어떠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소문이나 선입견 혹은 인간적인 감정을 앞세워 비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갈 6:1).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놓고 말을 할 때 가능한 그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이야기해야 하고, 만약 그 사람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 부득이하게 언급해야만 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지 말고(마 6:2),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 대해 보여주시는 만큼만 말해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마 18:15).  만약 그렇지 않고 계속 같은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비방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처럼 똑같은 죄를 짓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와는 다른 종류의 죄를 짓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한 죄에 대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2:1-3).  사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마 22:37-40), 같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최고의 법인 사랑을 저버리고(약 2:8), 율법을 비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입니다(약 4:11-12).  쉽게 말하면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재판장이 되어 하나님의 위상을 찬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자기 죄를 끝까지 회개하지 않거나 돌이키지 않는다면 분명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 사람에게 응하게 하실 것이고(딤전 5:24), 하나님께로 받은 놀라운 은혜와 상관없이 그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눅 6: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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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넓게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행위의 모든 법칙, 또는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가 하면(요 12:34), 좁게는 모세오경이나(마 5:17, 눅 16:16), 도덕생활에 기준이 되는 도덕적 율법(십계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출 20:3-17. 신 5:6-21).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이러한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정의하면 “모든 피조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의 표현으로(롬 7:7-9), 그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됩니다(신 1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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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

진리의 성령 2016. 3. 8. 15:35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소망이 없던 사람, 반항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 낙태를 경한 사람, 포르노에 빠진 사람, 도박으로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사람, 점치는 사술에 빠진 사람,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한 사람,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어느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인생을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사역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롬 8:9), 새 소망, 새 사랑, 새 평화, 새 기쁨, 새 방향을 주십니다.  이 사역은 성도들의 삶에서 다른 모든 것에 기본이 됩니다.  성령의 내주하시는 사역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 치심을 얻고 그에게 속해 내적인 확신을 얻게 됩니다(고후 1:22).  성령의 내주사역은 속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옛 습관을 버리게 되고 옛 속박을 끊어집니다.  다시 말해 새사람이 되어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고후 5:17).  한마디로 성령의 내주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사역이란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빚어내기 위해 성령께서 믿는 자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구약시대엔 성령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셨고 그분의 임재를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또 어떤 특정인에게 임하시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지만 내주하시면서 계속적으로 사시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직후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대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겔 36:27).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위해 성령을 그 마음속에 내주하시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은 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실 일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39절 하반 절에 보면 성령의 내주사역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시작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변화가 가져올 열매도 설명하셨는데,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로 인도되고 예수님의 관한 일이 계시된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5: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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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2과 ‘하나님은 누구신가?’ 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과 더불어 이러한 지식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이러한 속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와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점검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여러 속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빌 하이벨스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는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특히, 이 책은 조금은 딱딱해 질수 있는 교리적 주제에 대해 삶 속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풍부한 예화를 통해 쉽게 설명해 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훈련생들과 인도자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기독교의 힘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 즉 인품과 성품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나님의 첫 번째 성품은 전지성이다.  그분은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포괄적이고도 절대적으로 완벽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물들이 되어가는 이치와 방법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세부항목들까지도 세세히 알고 계신다.  특히 이러한 하나님의 전지성은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알기를 원하시며 실제 우리의 필요와 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낱낱이 헤아리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과 고통, 상처에 대해 결코 무심하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무소부재성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놀라운 진리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저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들과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맺으시며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할 때 우리는 위선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가장할 필요가 없으며 두려움을 일으키는 그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세 번째 속성은 전능함이다.  전능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감동적인 사실은 하나님은 기꺼이 그리고 몹시도 그의 능력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기도, 슬퍼하시기도, 분노하기도 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 자리한 그 감정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하게도, 마음을 아프게도, 화를 돋구게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함축된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표현 없이 사는 삶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성품에는 그의 표현력을 투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시기를 바라신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는 그분이 하시는 일의 중심이며,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피난처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믿는 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부었고 값진 피난의 순간들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피난처에 들어가는 다음 단계는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를 감싸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를 향하신 그의 행위, 그분이 제정하신 율법, 그리고 그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방관하지 않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우리를 마음대로 다루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통해 의의 혁명을 이루시기를 바라시며 이를 위해 우리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옳고 그름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불의의 본성적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일곱째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여기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성향을 말한다.  마땅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축복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며 하나님은 용서를 베푸시는 가운데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재적이어서 그 현장에는 반드시 변화가 따른다.

 

여덟째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하나의 이론이나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통해 확신한 사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들과 약속을 체결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의 불성실로 슬퍼하시고 우리의 성실함에 기뻐하신다.

 

아홉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결정들로 가득 차 있고 결정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바뀐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훌륭한 안내인과 표지판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아닌 더 성숙하고 현명해지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안내판은 성경과 성령의 증거, 현명한 사람들의 충고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열 번째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여 토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베푸시는 가운데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베푸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 변화는 우리가 먼저 그의 선하심에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리를 향한 그의 관대하심을 볼 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의 불변성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꺼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행동하시고 응답하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성품에 있어서만은 일관성을 유지하시는 분이다.  그의 권능, 임재, 지식, 약속, 은총, 관대하심 등 성품은 변함이 없으시다.  오늘날 모든 상황들은 신속히 변화하고, 전문가들은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란 변화에 대처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즉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바다에서 닻을 달아 내리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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