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심령과 기질을 가지도록 돕고

그것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들과 다르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온유, 평온함, 용서, 자비의 심령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질과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뼈이며 진정 그리스도와 한 영이라면 말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이 영혼에 찍는 그리스도의 표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찍은 그리스도의 도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마 11:28-29).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 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영을 그들의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 4:6).  그리스도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매우 충분하고 분명하고 많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이며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심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내재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자신의 원수들이 가장 맹렬하고 터무니없고 사악하게 역사할 때,

그 사람이 이 모든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어린 양의 겸손과 평온과 양선

그리고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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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졸업할 때쯤 어느 날 저녁 9시경에 다급한 목소리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이 학교 기숙사로 걸려왔는데 빨리 교회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기도를 많이 하는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기에 다른 두 명의 학생과 함께 교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자 집사님이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었는데 얼마 전에 교회에서 보았던 집사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고 사무실에는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나이 드신 여자 전도사님과 귀신들린 집사님의 남편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많은 시간을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고 너무 놀라 가슴이 뛰었고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낼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무릎을 끊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담임목사님께서 “김전도사! 눈을 감지 말고 기도해! 지금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삐쭉’ 솟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득이나 겁이 나는데 ‘귀신들’이란 말에 더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일곱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하고 귀신과의 영적싸움을 저녁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치렀고 결국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떠나가고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당시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회 안에서 벌어진 축귀사역은 경험이 없는 나에게 있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을 흉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는데 있어 방언기도가 강력한 도구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은사를 사모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주시면 받고 안 주셔도 할 수 없고’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교회에서 방언기도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방언에 대해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고 졸업식 하는 날 합심기도를 할 때 혀가 자연스럽게 말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방언)이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방언을 받자마자 마음속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고 이때로부터 시작한 방언기도는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의심이 들기도 해서 방언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는데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고 잘 극복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눅 1:35)과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벧전 2:24),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행 2:24), 승천해서(행 1:9), 하나님의 보좌 우편(행 7:55)에 계신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0:9-10).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지 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이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나 아예 처음부터 방언이 없다는 은사부정론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헛소리 같이 들릴 것이고 마귀에 주술에 걸린 것이 확실하고 백 퍼센트 가짜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 어떤 목사가 방언을 하는 사람은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로 만든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사실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에 대해 귀신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잘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 단어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시적(diachronic)해석/역사 비평적 방법론(historical critical method)까지 동원하고, 심지어 방언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순환논법(循環論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은사를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사족(蛇足)을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현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헬라 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지금 원어를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헬라 교부들이 보기에는 초보수준에 불과할 것이고, 그래도 신학자/목사들 중에 “내가 얼마나 헬라어를 많이 아는데”라고 교만을 떠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고전 8:1),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과신하면서 다른 형제의 신학/신앙을 단죄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지 못한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7:1-5).

 

그리고 간혹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 중에 방언의 은사에 대해 풍자적으로 묘사해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 방언을 폄하하는데 이런 말은 은사를 허락해주신 성령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일일뿐 아니라(마 12:31-32), 그분을 근심시키는 행위(엡 4:30)로 듣는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29).  사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인데(딤전 4:12), 만약 겉과 속에 다른 바리새인같이 행동을 한다면(마 23:27), 하나님 앞에서 외식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약 1:22).  물론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칭 신학자/목사가 있기는 하지만(딤전 4:2), 이런 사람은 사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고(행 9장), 무엇보다도 방언을 하지 않거나 혹은 해본 적이 없다면 방언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혹시 누군가 물어보면 그냥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 줄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잠 13:3, 마 12:36-37).  아무튼 방언은 논쟁이 심한 은사이긴 하지만 이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소중한 은사이고, 만약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놀라운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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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당신에게 계시하심을 통한 경험으로만 가능합니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고 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내가 영원한 자요,

미래에도 나는 그대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그 후 40년 동안 여호와 혹은 야훼,

스스로 계신 자로서의 위대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을 경험적으로 알도록

자신을 계시하시는 일을 주도하셨습니다.

종종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새로운 이름을 붙이거나

색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성경의 인물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건 뒤에

하나님에게 새로운 이름이나 칭호를 붙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아말렉 족속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가까운 산꼭대기에서 이 싸움을 지켜보면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이겼고

그가 손을 내리면 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말렉 족속을 물리치셨고

모세는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고 이름하셨습니다.

깃발이란 보통 군대 앞에서

그 군대가 누구를 대표하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들의 깃발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좀 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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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10절에 기록된 ‘영들 분별함’이란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사도 요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할 것을 말했고(요일 4:1), 사도 바울 역시 이 은사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이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갔음을 알았습니다(고전 12:2).  성경에 의하면 이 영들 분별함은 벙어리 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영(막 9:25), 질병을 가져다주는 불구의 영(눅 13:11), 사술에 매여 점을 치게 하는 영(행 16:16), 믿음을 파선시키는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미혹의 영(요일 4:3-6), 불결하고 가증한 더러운 영(계 18:2), 그리고 거짓말 하는 영(왕상 22:22)과 귀신의 영(계 16:14), 등등 여러 종류의 악령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 가운데 악의 영들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엡 6:12), 사실 무당이나 강신술을 접한 불신자들도 악령의 존재에 대해 믿고 있는데, 만약 그리스도인들 중에 악한 영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2:13-15).  그러나 어떤 현상이나 행동을 보고 그냥 분별력 없이 진단에 의해 좋은 추측을 만들 수는 있지만, 만일 신자에게 있어 성령 하나님께서 그런 면에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축귀사역을 해오던 Francis MacNutt 박사는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 중의 하나인 영들 분별할 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분별력은 어떤 경우에 악한 영이 있는지를 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며, 이 은사는 누군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그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인지, 자연적이고 인간적이며 심리적인 현상인지, 사람의 눈을 속이는 악령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Deliverance from Evil Spirits』에서 이런 주의를 줍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와 같이 영들 분별함도 시험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악한 영이 나타나는 것을 분별한다고 내게 말하는 모든 사람을 믿을 필요는 없다. 어떤 이는 예언, 치유, 혹은 영분별의 강한 은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편견과 자기 욕심, 그리고 종교적 배경의 요소로 인해 은사를 오염되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분별의 은사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들(약 1:17), 특히 영들 분별함에 있어 사역자는 자신의 마음과 욕망으로 인해 그분이 주신 것을 잘못 판단하거나(행 10:10-17), 자신의 생각이 혼합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역자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의 말을 무조건 믿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능력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요일 4:6),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빌 1:10),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14절에서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지만(고전 1:18), 성령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총의 선물(약 1:17)을 깨달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며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고전 2:15).  사도 요한 역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갖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요일 2:20, 2:27), 이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 자의 영혼에 비춰주시고 거짓 교사와 이단적인 교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말하는데(고전 2:10-13),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분별의 능력(요 14:17)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귀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롬 8:32).  반면 악령들의 정체를 분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여되는 일반적인 분별의 능력과(고전 12:3)는 구분되는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로서 Calvin과 Peter Wagner가 말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고전 12:29-30),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의 기능은 악령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요일 4:1), 어떤 사람의 영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 감추어진 거짓과 불순한 동기를 판단할 수도 있는데(요 4:2-6), 이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분별의 능력에 관하여 흥미로운 묘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 그분을 믿었지만(요 11:45),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을 주거나 몸을 맡기지 않으셨는데(요 2:23-24),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얼굴과 겉으로 드러난 행동 뒤에 감추어진 영혼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요 1:48, 5:42).  이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표면적인 현상 내부의 근원적인 실체를 파악하는데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이 엘루마라는 마술사와 대결하는 이야기는 영들 분별함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좋은 실례로 유대인 거짓 마술사 엘루마는 바울과 바나바가 총독 서기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훼방하려고 할 때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 마술사의 영을 분별하였습니다(행 13:4-12).  따라서 이 은사는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한 사실들과 아울러 악의 존재로 인한 영적이고 감정적인 불편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신령한 사역자인 것처럼 사람을 볼 때마다 “귀신이 곁에 붙어있다”, “좋지 못한 기운이 감싸고 있다”, 더 심하면 “뱀이 온 몸을 징징 감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불안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영분별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점치는 귀신에게 조종을 받거나 아니면 너무 쓸데없는 이상한 집회만 쫓아다녀 영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은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은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덕을 세우지 않거나(고전 14:3), 사랑에 기초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체험 중 일부는 잘못된 것에서 올 수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하고 경험 많은 사역자라면 자신이 체험한 것 중에 절반은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신자는 영적분별력을 계발할 수는 있지만 이 능력은 성령의 은사로서(고전 12:10), 모든 신자가 다 행하는 것이 아니고(고전 12:29),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자세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혜안(慧眼)을 지닌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판단의 유혹을 받기 쉬우므로 자만심과 교만한 태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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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아야 하는 제자훈련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 가는 길을 방황하지 않고 제대로 가기 위해 작은 약도라도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1. 두 가지 관점

제자훈련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이라는 관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이미 그분의 제자이지만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이 밖으로 드러날 때 보이는 모습 중 하나가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다’입니다.  이처럼 제자훈련에 임할 때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부터 시작된 겸손과 훈련에 대한 열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한 훈련’이라는 관점입니다.  훈련생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 자칫 ‘이제 막 시작인데 좀 실수해도… 뭐’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처럼 여기고 제자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로부터 시작된 미성숙함입니다.  제자훈련생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는 신앙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리더로서의 첫걸음을 내어딛는 사람들입니다.  비유하자면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사관학교에 입학한 셈입니다.


2.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세우셨는가?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세우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훈련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점검할 수 있고 또한 앞으로 제자로서 우리 삶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를 삼으신 목적이 아주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3:15).

 

3.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의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분명 주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우선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의 만남만을 가지고는 마음까지 나누는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 햇살이 가득한 넓은 창 옆 작은 탁자에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저녁노을 빛이 스며드는 응접실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4.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예수 제자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행하셨던 일들을 이제는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악한 세력을 몰아내는 일도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항구에 매어두기 위해 배를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첨단의 장비를 갖추고 있고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항구에만 정박해 있는 배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메시지가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외쳐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속에 악의 세력을 제압할 권세가 넘쳐난다고 할지라도 표현되지 않고 발휘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4. 당신은 제자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에, 제자를 위한 훈련에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의 데이트에 초대 받았습니다.  분명 이 데이트는 예수님과의 매우 개인적이고 은밀한 만남이지만 세상 모두를 위한 만남이고 훈련입니다.  훈련에 임하는 우리 자신을 고성능 충전지에 비유해 보았으면 합니다.  각자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은 충전이 덜 되어 힘이 부족할지 모릅니다.  우선 충분히 힘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 속에 충전된 에너지를 그냥 품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의미 없는 곳에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 사용하고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능하고 강한 군사가 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강한 군사가 되기 위해,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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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0년 후반에 홍콩에서 재키를 만났다.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씀을 들었는데 쉼 없이 방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다소 불편했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마침 홍콩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그녀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재키는 자신이 홍콩 거리에서 헤로인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그녀의 전도법이었다.  그리고 헤로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  홍콩 시가 재키가 선교사역을 할 수 있도록 넓은 땅을 주었다. 그들은 길거리의 마약중독자들을 성공적으로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재키라는 것을 인정했다.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중 소수의 사람들이 옛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고 헤로인 중독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었다.  그들은 건강을 회복하여 직업을 갖고 선한 일을 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약 중독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 놀라운 재키의 사역은 방언을 통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비판했던 것을 보호해야하는 이유였다.  방언은 이상한 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간증은 1956년 2월 운전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하게 즉홍적으로 방언이 터지는 일을 체험한 R. T. Kendall 목사의 고백입니다.

 

Gordon Fee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영적싸움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에 더 온전하게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유 20절), 사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에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하는 기도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고전 14:15).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말’,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 유익한 것은 먼저 고넬료 가정처럼 이전에 알지 못했던 깊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행 10:46), 또한 로마서 8장26절의 말씀에서 방언기도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방언기도는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해 주시고(롬 8:27), 영적전쟁에 있어 성령께서 방언기도를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는데(엡 6:18), 무엇보다도 이 은사의 또 다른 가치를 찾는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귀중한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4).  물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은사의 목적(고전 12:7)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고전 14:12, 26), 어떤 은사도 개인의 건덕을 위해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명백하게 말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을 세우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숙지해야 할 것은 모든 은사는 어떤 식으로든 은사의 사용자에게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고전 12:7), 이것이 자기 교화(敎化)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하는 것(딤후 3:14)은 이단적 교리들을 잘 대처하고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딤후 2:15),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 3:17).  즉,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가 더 성숙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더 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벧후 1:5-7).  만약 이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행 17:11).  다시 말해 기독교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동들(전도, 기도, 봉사, 선교, 예배, 찬양, 성경공부, 등등)은 자기 교화의 효과적인 수단이고 더 나아가 방언기도를 통한 자기 교화도 마귀의 주술에 걸려 헛소리 하거나 잘못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동의 유익이라는 사실은 각각의 은사 현상이 다른 이차적인 효과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방언의 사용을 장려했던 것입니다(고전 14:5).

 

그리고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4장4절에서 사용된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NLT에서는 ‘strengthened’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고, BBE에서는 'may do good', GWT에서는 ‘grow', 그 외에 수많은 번역본에서는 ‘build up’이라는 단어보다는 ‘edifie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원어에서는 ‘덕’이라는 말이 없지만, 이 헬라어 동사로 쓰인 ‘오이코도메오’는 근본적으로 ‘짓다’ 혹은 ‘세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번역하면 “방언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헬라어 단어를 ‘교화(敎化)하다’ 혹은 ‘강화(强化)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신앙성장에 유익을 위해 영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사고 능력이 아닌 영의 교화로 영적으로 강하고 믿음이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유다서 20절의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방언)를 통해 개인의 삶에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 중에 유익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약 1:17), 한 마디로 개인의 영적성장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집을 짓듯이 자신을 건축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워진다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가 간접적으로라도 필연적으로 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4:12-14).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 ‘모퉁이의 머릿돌’(눅 20:17)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의 의미는 돌 하나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엡 2:2-22), 예수님이 사용하신 은유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킵니다(시 118:22).  마찬가지로 은사는 각 사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진 선물이지만(약 1:17), 문제는 은사 받은 사람이 자신이 먼저 바로 세워지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엡 4:12-16).  얼마 전 어느 여성이 전쟁이 난다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맞지 않았고 오히려 격려를 받고 위로받은 것이 아니라(고전 14:3), 미혹의 영에게 충동질을 받아 사람들을 이리저리 방황을 시켰습니다.  왜 이런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분별력 없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9).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은사가 성령의 의해 계발되고 성숙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이 여성은 처음 받은 은사가 받는 순간 완벽하게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한 문제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은사를 남용한 것입니다.  사실 성숙하고 노련한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수 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처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여성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인지, 귀신의 속삭임인지, 성령의 내적인 감동인지 분별없이 받아들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은사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 사람(목사를 포함해서)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딤전 3:6).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아마 덕을 세우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분쟁만 일으키지 않아도 다행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눅 22:32), 사실 믿음이 없는 그가 갈대처럼 흔들릴 때 다른 형제들을 세워주지 못했고 심지어 칼을 들고 설치거나(막 14:47), 입으로 저주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마 26:69-75).  쉽게 말해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기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교인의 한 부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련을 겪은 후에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한 것처럼(실제로 베드로전서는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권면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음) 은사 받은 사람 역시 먼저 자신을 세우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언기도를 충실하게 했던 사람은 그 신앙의 년도에 따라 교회 안에 덕을 많이 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적게 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은사는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딤후 1:6), 은사 받은 사람의 실수를 가지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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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교지도자이자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개혁자,

Zinzendorf는 교회 연합운동을 시도하였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세웠으며 수많은 찬송을 작사하였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빛나는 업적은

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독일 드레스덴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경건주의자인 할머니와 숙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영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상황은 할레대학에 입학한 후 루터교 경건주의 A. H. Francke로부터

영적감화를 받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수학하는 동안 그는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을 조직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1719년 유럽 여행 도중 한 미술품 전시회에서 본 예수 수난화에 큰 감동을 받고,

자신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필생의 사역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게 된다.

Domenico Fetti가 그린 그 그림에는

“내가 너를 위하여 이 일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각명(刻銘)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세주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1722년 Zinzendorf는 그의 영지로 피난 온 기독교 피난자들을 보호하면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한 자신의 맹세를 지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Herrnhut(주님의 보호처)라 불렸던 그의 영지에는

어느덧 종교적 피난자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1727년 이 공동체의 놀라운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일이 계기로 Zinzendorf와 공동체 사람들은 선교와 헌신에의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루 24시간 꼬박 드리는 기도가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이후로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 세계 곳곳으로 파송되는 결과를 낳았다.

1760년 Zinzendorf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3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다.

한 명의 기도의 사람이 일으킨 기도 운동은 자발적 선교 운동으로 이어졌고,

비록 강 같은 순교의 피가 흐르기는 했어도

많은 일꾼들이 세계 각처에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기도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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