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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29 가짜 방언 v 진짜 방언
  2. 2015.08.22 결혼이란?
  3. 2015.08.19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4. 2015.08.12 부르심
  5. 2015.08.08 동성애자들의 인권
  6. 2015.08.05 경험
  7. 2015.08.01 성령의 바람

1994년 봄에 루이스가 몹시 아팠을 때, 나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었다.  절친한 친구의 아파트에 홀로 앉아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이후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줄곧 방언기도를 해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26-27절에서 언급한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이 방언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절과 완벽하게 연결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처럼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한 가지 아주 분명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간증은 『Holy Fire』에서 나오는 것으로 남침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R. T. Kendall의 고백인데, 그는 Lloyd Jones 목사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간 사역을 감당한 목사로 수 십 권의 책을 저술하고 성령의 역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강해설교와 거리에서 전도할 때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유명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역자입니다.  이 분은 2002년 은퇴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Kendall 목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마귀의 주술에 걸려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을 부정하는 Palmer Robertson는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을 대조하는 언급은 없다. 이는 신약의 방언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나누어 주는 다른 모든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 나타나는 절대 다수의 방언 현상은 신약의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 애초부터 분명해 진다. 사적인 방언은 신약의 방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신약의 방언은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28절의 말씀에 대해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는 자가 없는 이상 자신을 자제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자신 안에서 말한다”라고 모호하게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방언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소리를 냄으로 긴장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증언할지 모른다. 그가 사용한 기도언어는 그로 하여금 오늘날의 삶을 맞닥뜨려 헤쳐 나가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다.”  사실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Richard B. Gaffin 역시 방언기도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공식모임에 방언의 공용성(共用性)을 주로 다루었다. 동시에 방언이 사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구절들도 있다(4, 18, 19, 28절). 그렇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은 근거가 없다. 대개 위의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방언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용(私用)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용(共用)으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용방언은 통역을 요구하는 공용방언과는 별도로 첨가되는 별개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용방언은 방언의 은사의 보조적이거나 주변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Palmer Robertson처럼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립니다.  “방언은사는 원래 계시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은사를 받은 자는 방언을 개인경건을 위해 쓸 수 있는 혜택도 덧붙여 받는다.” Calvin도 『제네바 교리문답 247문』에서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기독교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솔직히 방언기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방언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John Stott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바울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단 한 번의 유일한 예외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울이 쓴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그 말 자체로 거의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이 한 가지 은사만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하여 공동의 유익이 아닌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Stott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무엇보다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편(엡 6:17)에 서 있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주장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들은 자신들도 성경을 기초로 해서 방언기도에 대해 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우리는 오직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잠시 동안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영적인 세계로 끌어올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한 언어입니다. 비록 그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고린도전서 14장4절 말씀처럼 자신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압니다. 이것이 2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이 은사를 소유했다면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도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바울 자신이 그런 기도를 매우 자주했으므로 이 은사를 소중하게 여겼던 고린도 회중에게 그들 중 누구보다 자신이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14, 15, 28절).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전 14:4, 5, 15, 17, 18절).  이들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Michael Green 역시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은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방언이 제거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방언이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별로 놀랄 말한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우는 방언과 교회를 세우는 예언을 세심하게 대조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다”라고 강조하고 있고(고전 14:7), Wayne A. Grudem도 방언기도에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4:5, 15, 18, 39절). 기도로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서의 방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옳다면 우리는 비록 방언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지라도 이 은사로 인하여 덕을 세우게 될 것을 기대함이 마땅하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진리의 성령 편(요 16:13)에 서 있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자신들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방언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예배가 예언처럼 교회의 덕(고전 14:4)을 세워준다는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의 기원을 찾는다면 창세기 4장부터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교회의 덕을 세워준다는 말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분쟁하는 고린도교회(고전 3:3)나 물고 뜨고 싸우는 갈라디아교회처럼(갈 5:15),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공동체에 덕을 세워주지 못한다면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을 하셨습니다(시 29:2, 요 4:24).  그 이유는 먼저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사 43:7)과 찬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21),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고(엡 1:17-19), 선포되어지는 말씀(살전 2:13)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자라날 뿐 아니라(롬 10:17), 그 예배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0:31).  한 마디로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출 20:24).  그렇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데(고전 14:4), 성령께서는 과연 필요하지 않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을까요?(고전 12:7).  확실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은사들은(고전 12:4), 교회뿐만 아니라(고전 14:26),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만(롬 15:18), 방언은 교회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귀중한 은사이기에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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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된 두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들이 Middle School 다닐 때부터 배우자를 놓고 기도를 시작했지만 나의 배우자를 위해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20대 중반부터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결혼기도를 하는 가운데 가족과 지인을 통해 여러 번 선을 보거나 소개를 받아 만난 적이 있지만 그 상대방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평생 동고동락할 확신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었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에 살면서 한국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열리는 국제 청장년 금식기도회(지금은 전국 청장년 금식 대성회)를 해마다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보호식 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마음과 선한 눈을 가진 지금의 아내를 만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후 세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고 주중 수요예배를 같이 드린 것이 전부였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전화와 편지를 통해 교제를 나누면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가운데 만난 지 사 개월 만에 양가 가족들이 모여 목사님의 주례를 통해 약혼식과 더불어 결혼식까지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20대 중반부터 시작한 결혼 기도가 30대 초반이 돼서야 응답되었지만 만약 결혼 기도를 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에 끌려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짝이 아닌 다른 짝을 만났다면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모든 인간 사회의 근본 요소로 만드셨고(창 2:18), 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교회, 학교, 직장이 있기 전에 만든 제도이기에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결혼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막 12:25), 성경에 결혼에 대한 분명한 뜻을 제시해 주셨습니다(마 19:4-6).  만일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세우신 뒤에 더 이상 결혼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규칙들을 마음대로 만들어 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지켜야 하며(창 2:20-24), 개인이나 국가조차도 어느 누가 결혼할 수 있고 어떤 근거 위에서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는 결혼에 대한 개인기록을 서류로 보관할 수는 있지만 결혼을 위한 어떤 규칙을 정할 권리나 권한은 없고 그 특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막 10:9).  사실 결혼은 가톨릭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출산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제도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출산을 결혼 안에서 그분의 의무로 수행해야 한다고 명령하시기는 했지만(창 1:28), 출산이 결혼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은 단순히 남녀 간의 관계 이상이기에 결혼을 동물 짝지기로 혼동하지 말아야 하고 인류의 번성은 결혼의 하부 목적이지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6), 이렇게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서로 다른 특징을 주셨는데 남자는 보통 공격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에 의존하고, 여자는 직관과 기본적 신뢰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모습이고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요점은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그분의 상의한 측면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나오는데(창 1:24-25),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 몸’이라는 단어로 이 말의 의미는 결혼은 지구상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결합, 즉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하나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막 10:8), 이 결혼을 통해 두 가지 끈으로 결합되는데 하나는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노라고 ‘언약’ 하는 것이고(창 2:24, 롬 7:2), 다른 하나는 영적결속을 이루는 ‘부부간의 성관계’입니다(히 13:4).  다시 말해 언약의 결속이 이루어지고 나서 두 사람의 몸과 혼과 영을 연합시키는 성적결속이 이루어져 그로써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5:31).  이 하나 됨에 대해 구약성서 신학자 Walter Brueggemann“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룬다”라고 주장했는데 쉽게 말하면 결혼의 원래 목적은 부부간의 하나 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울처럼 보여주는데 있고 이 하나 됨을 이해할 때만 결혼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Tim Alan Gradner 역시 『Sacred Sex』에서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은 최초의 커플(아담과 하와)이 서로 나누고 즐기며 그들의 하나 됨을 축하하도록 특별하고 비범한 선물인 성행위를 주셨다. 또한 성행위는 거룩하다. 성행위를 안 남성과 여성의 온전한 연합에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이 말을 통해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할 때면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볼 때(엡 5:22-33), 결혼의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세상에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엡 5:23), 그런 복종이 학대를 자초한다고 믿는 여자들을 위해 이 원리를 오용하는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명령하시면서(엡 5:25-26), 창세기의 말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환언하면 결혼은 두 가지 결속을 만들어 주는데 하나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 간의 헌신과 보살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조건 없는 사랑의 언약이 가져다 준 보호 아래서 성적 친밀감을 누림으로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부부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거룩한 행위라고 생각했고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평생을 사랑하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를 만나야 하는데(창 24:67), 만약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삶에 있어 영적인 싸움은 매우 치열하게 일어날 것이고(엡 6:12), 부부간의 극복하기 힘든 위기가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같이 살고는 있지만 신자 안에 거하는 영(고전 6:19)과 불신자 안에 거하는 영(엡 2:2)이 서로 달라서 마음과 생각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마 10:36).  물론 믿는 부부들도 살아가는데 있어 갈등과 어려운 위기가 닥치는 것은 사실이지만(롬 8:35), 이것은 얼마든지 두 사람이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고(요일 5:4), 말씀과 성령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롬 8: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반드시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창 24:3-4, 고전 7:39), 무엇보다도 기도 중에(창 24:63), 인내하며 기다리는 가운데(창 29:30),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배우자를 만나야 되고(창 24:42-44), 상대방의 동의(창 24:8)와 부모의 뜻을 존중하면서(창 28:1-2), 모든 것이 아름답고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롯 3:18).  그 이유는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제정하신 제도이고(창 2:18-25), 또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사 43:7, 고전 10:3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고(눅 11:28), 예수님도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에 대해 지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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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가요 신학자이며 강해 설교가로 유명한 워런 위어스비 박사의 저서인 이 책은 1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일 뿐만 아니라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있는 이들에게 권해 볼만한 책이다.  그리고 1권6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기도가 반드시 선하게 응답된다는 사실과 기도응답의 방해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나아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지체되는 기도응답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 『당신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는 성경에 나오는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예들을 통해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들이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단순히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기도가 아니라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의 기도 중에도 있었기에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참된 교훈은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원인들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도의 응답을 다루는 1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거나 혹은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거나 그분이 무능력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더 큰 축복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특별한 기도에 대해 그 응답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하신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당신의 뜻을 벗어나거나 당신의 성품과 모순된 것이라면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응답 받는 기도를 방해하는 장벽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네 가지 심각한 장벽들이 있는데 첫째는 알고 있는 죄이다.  이는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있는 고의적인 죄를 말한다.  둘째는 이기심으로 우리가 이기심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을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셋째는 가정불화로 베드로전서 3장7절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만일 서로 화목하지 않으면 그들의 기도가 막힐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기도생활의 장애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구하는 것이지 주님과 변론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 받지 못한 모세의 기도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허락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할 때 이미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모세가 이전에 지었던 죄의 결과로 하나님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분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기도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은 죄를 후회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적 성품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징계를 피할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용서해 주시지만 하나님의 통치하심 안에서 너는 네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서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 보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도록 내려진 징벌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고 대신 그가 길을 가는데 육신의 양식과 영적 용기를 주셨다. 엘리야가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과거, 즉 그가 걸어온 과정과 그의 안, 즉 그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이실 때 인간의 본성과 그 문제점을 헤아려 보신다.  그리고 우리가 구한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닐 때,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앞을 내다보시며 그분이 엘리야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미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걸어온 과거의 길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미래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구한 것보다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뜻이 나타나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광인을 고치신 사건에는 세 가지 기도가 나타난다.  첫째는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시지 말고 대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귀신들의 기도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역에서 떠나기를 간청했던 마을 사람들의 기도이고, 셋째는 귀신들로부터 놓여난 사람이 예수께 나와 그와 함께 가서 제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해달라고 간청한 기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첫 번째 귀신의 기도와 두 번째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셨지만 구원 받게 된 사람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귀신나간 사람은 그 결박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깊은 감사와 행복에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더욱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고 이것은 극히 당연한 기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정으로 돌아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다.  그런데 그는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즉시 자기 길로 가서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온 성읍에 두루 퍼뜨렸다.

 

주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거기에 따른 주님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때때로 주께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인 주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응답하시지 아니하시는지도 모른다.  그가 거절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이면에 숨겨진 목적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거절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탐욕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최고를 바라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것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발생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기심으로 때로는 탐욕으로 기도할 때는 들어 주시지 않으신다.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실망한다.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문제로 고심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도 경우에 따라서 이런 경험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안 돼!’ 라고 말씀하실 때는 대개 우리가 삶 속에 기도를 방해하는 어떤 문제들을 갖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더욱 큰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기도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을 때이다.

 

응답 받는 기도는 하나님께 있어서나 우리에게 있어서나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응답 받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첫째는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갖기 위해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규칙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구한 후에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무엇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주문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할 것을 이루는 데 도구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병 고침을 위해 드린 기도는 앞서 살펴본 기도와 달리 주께서 왜 거절하셨는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도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이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며 이는 어떤 특별한 목적 때문이다.  그 목적은 때로는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함이요, 때로는 온전케 하기 원하시기 때문이고, 때로는 보호해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축복이 멍에와 함께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상처 없이 전쟁터를 빠져 나오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려면 먼저 싸움터의 고통과 불안을 견뎌내야 한다.  셋째는 영적 축복이 육체적 축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보다는 그 가시를 사용하셔서 그의 내적 성품을 다듬어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다.

 

이 책 『당신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는 우리에게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 주는 좋은 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응답하시지 않지만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다듬어 가시고 축복해 가는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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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평신도 훈련/묵상 2015. 8. 12. 13:56

우리는 사역자를 말할 때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갖가지 자기의 영역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몇몇 영역들에 대한 재능,

즉, 그들이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혹은 육체적 일에 대한 재능을 주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명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부름 받은 길을 놓치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들 각각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재능의 종류와 그 크기를 알고 계신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아무데에나 던져 놓으시겠는가?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구할 때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는 올바른 적소에 놓이게 될 것이다.

 

-조셉 S. 엑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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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를 놓고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지는데 주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성애자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동성애자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존귀하며 이성애자나 동성애자 모두 주 안에서 하나이고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체는 동성애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 동성애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더 나아가 동성애는 기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치유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이 동성애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는 말일지는 모르지만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바로 가르쳐야 할 목사조차 동성애에 대해 죄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경해석을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인 말씀보다 더 높이는 것인데 이것은 목사의 양심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어느 목사는 동성애자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치유기도를 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 정말 일개 신학자나 목사의 말이 성경의 권위보다 높을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간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이고 이 결혼은 인간 사회의 근본요소이며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생물학적인 출산을 결혼 안에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부부간의 성적 친밀감을 통해 한 몸을 이루고 사랑하는 가운데 자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를 만드셨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주장인데 사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친히 동성애자(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를 만드셨다는 기록이 없을 뿐더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만약 남자와 남자끼리 혹은 여자와 여자끼리 만나 결혼해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 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한다면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들이 결혼해서 살면서 남자나 여자아이를 자녀로 입양을 할 때에 이렇게 입양된 아이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이들과 함께 살면서 심한 혼란을 겪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또 다시 이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알아야 하는데 치유와 축귀사역 그리고 동성애자를 놓고 수십 년간 사역을 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Francis MacNutt 박사에 의하면 동성애자 인구의 40%는 콘돔이 쾌감을 반감시킨다고 해서 콘돔 사용을 거부하는 가운데 성행위를 하기 때문에 각종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손상된 부위(직장의 대변이 찢어져 상처로 오염된 곳)를 고칠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있어 항문교접이 매우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행위로 오천 명의 동성애 남자들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한 결과 대다수가 이러한 성행위를 선호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항문교접이라는 말이 우리가 듣기에는 역겹고 불쾌하겠지만 이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이야기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수명이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 20-30년 정도가 짧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일부일처의 관계를 옹호하는데 R. A Kaslow 박사와 동성애 세계에서 오랫동안 빠져 있다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가는 몇몇 사람들의 또 다른 간증과 글에 의하면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가정보다는 공공장소(극장, 터미널 화장실, 옥상, 후미진 골목, 자동차, 등등)에서 성행위가 일반화 되었으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개는 50명 많게는 수백 명의 섹스 파트너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편견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있고 이들이 하루 속히 구원을 받고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동성애자의 인권은 존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행하는 가증스러운 행위 자체를 정당화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John Stott의 말을 인용하면 ‘인격’과 ‘행위’를 구별하는 것으로 인권에 있어 이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저지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혐오스러운 행위에 대해서까지 묵인하거나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동성애에 대해 옹호하거나 지지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신학교수/목사)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이들도 한 형제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사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정론이나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은 정말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을 만드셨다면 그분이 이러한 가증스럽고 변태적인 행위를 조장하시거나 즐기시는 분이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패역하고 타락한 시대에 한 가지만큼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동성애 행위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빌미로 무조건 품어주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죄까지 사랑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비정상적인 행위 뒤에는 반드시 귀신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유일하게 치료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창녀가 어떤 계기가 되어 주님을 만났으면 그 곳에서 빠져 나와야 하고 만약 그곳에 머물면서 그 일을 계속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성끼리 성행위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 이상 그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문둥병자처럼 간절히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상 예수님이 하실 일이 없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무서운 질병에서 놓여남 받고자 하는 애절함이 있어야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 세상보다 큰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든지 부부 간의 정상적인 성행위를 떠나 동성끼리 비정상적인 더러운 행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행하고 죽는다면 이들이 과연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그분과 함께 머무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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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진리의 성령 2015. 8. 5. 14:36

성경은 우리 삶의 지침서로서(딤후 3:16-17),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본보기로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은 실재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만 알았던 게 아니고 그분과 상호교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감지하였고(고전 5:4), 병 고치는 것(행 3:6)과 기적을 행하시는 손길을 알았고(행 5:12),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자신 있게 묻고 답을 얻었으며(창 25:2-23, 단 2:16-19),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방향을 정하는(행 8:26) 등 끊임없이 예수의 영(행 16:7)과 상호 교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 성경이 보여주는 유일한 모델은 바로 경험입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결정 중 하나인 이방인을 교회로 수용하는 문제는 성령이 임한 이방인들이 방언을 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행 10:44-11:1).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영적경험을 배척하는 경향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입니다.  19세기 말, D. L. Moody는 그 당시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역이 많은 열매를 거둔 것은 그가 체험한 극적인 성령의 강한 역사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Moody는 『The Life of D.L. Moody』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놀라운 그날이여! 이 경험은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거의 언급한 적도 없습니다. 너무 거룩한 체험이어서 이름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저는 하나님께 멈추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다시 설교를 하러 나갔습니다. 다른 진리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회심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전 세계를 준다고 하여도 그 복된 경험 이전으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955년 위대한 침례교 설교가인 Charies Spurgeon도 금세기 말에 오순절 은혜와 예언적인 은사가 풀어놓아 질것을『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라』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잘 다듬어진 교리적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성경의 순전한 진리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도록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순종할 뿐 아니라 성령을 경험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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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 와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었고(행 19:1-2),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14:9), 만약 오늘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 속에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고 네가 죄로 인해 슬퍼할 때 위로하며 기도할 때 네 연약함을 도와주고 진리의 말씀에서 나오는 비밀스러운 것을 깨닫게 해주었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증언(요일 5:7)을 분간하는 데에 있어 오늘날 교회가 그토록 많은 어려움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교사로서(롬 8:16), 성령이 임재 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Adolph Saphir 박사는 『Christ Crucified』에서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의 능력이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한 마디로 제삼위의 위격이신 성령의 사역(마 12:28)과 내주하심(요 3:3-5)에 대한 자각이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막 16:17-20).

 

그러나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가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주장한 진리의 법정적 패러다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성령께서 행하시는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훈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은혜스럽지 않는 비신앙적이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왜냐하면 전통교회 목회자들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사역과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은 담임목사로부터 주로 듣는 것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전도하라는 것 이외에 어떠한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할례 받지 못한 책(?), 주로 성령의 은사들과 영성훈련에 관한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 거의 부정적인 반응이나 심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데 실은 이러한 반응들은 그 책에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모두가 경험하였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여러 번 성경말씀을 읽으며(딤전 4:13), 기도하라고(살전 5:17), 권고를 받거나 아니면 하늘나라 상급을 많이 쌓기 위해 전도해야 한다는 소리를 목사나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수도 없이 많이 듣기만 했지(마 28:19-20), 다양한 영성훈련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대교회의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이스라엘 선생인 니고데모가 나오는데(요 3:10), 그에게 있어 한 가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로(요 3:4), 당시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요 3:5-8), 그는 교리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유대의 한 종파인(행 15:5), 바리새파 사람으로(요 3:1), 전통을 중시하고(마 15:1-3), 외부적 시행세칙들에 주의를 기울이며(마 23:23),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엄수하면서(마 23:2),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요 9:22),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전통과 제도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거부하고 ‘교단/교파/교리’라는 틀 안에 철저하게 얽매여 있는 신학자/목사였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행 26:5), 남들이 알아주는 탁월한(?)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반복적으로 계속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요 3:5).  그리고 주님께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반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초자연적인 일들이 그에게 얼토당토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사실 바람은 그 누구도 통제하거나 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바람을 길들이거나 그 바람의 활동영역의 한계를 정할 수 없는 것 같이(행 2;2),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람’은 성령의 예상할 수 없는 행로를 말해주는 것으로 그분의 불가해한 기원을 의미하고 또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는 교회와 개인에게 나타날 때 그 현상을 보거나 느끼거나 감지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행 2:1-4).  이러한 성령의 바람은 신학자/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학적으로 요구되는 곳이나 제도적인 종교 안에는 불어오지 않고 인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찾아오는데, 예를 든다면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마 1:18), ‘진리의 영’(요 16:13), ‘예수의 영’(행 16:7), ‘그리스도의 영’(롬 8:9), 아버지의 성령(마 10:20)의 작품으로 인간의 편견과 상식을 무안하게 만들어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다루기 힘든 ‘바람’을 니고데모처럼 중생하지 못한 신학자와 목사들이(고전 2:14), ‘교리’라는 박스 안에 가두어 길들이려고 하거나 혹은 교회전통과 제도로 철저히 제한하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치유, 예언, 방언, 방언 통역, 영들 분별, 지식의 말씀)를 합리화하며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비신화화하려고 애쓰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완고한 교리/교조주의를 뒤집어엎고 지금도 여전히 어떤 제도나 전통에 얽매이는 것 없이 임의로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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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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