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에 대한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소그룹 성경공부 시간이 제자훈련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그룹 성경공부 시간은 제자훈련이 일어나는 현장 가운데 하나이지 그것이 제자훈련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훈련은 소그룹 성경공부 시간에 배운 내용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나머지 6일에 의해 그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훈련 때 훈련생들에게 제시되는 과제물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과제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그 훈련생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제자훈련 중 제시되는 각 과제물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 것이 옳을까요?

 

1. 과제물을 통해 신앙생활의 기초를 든든히 하십시오.

제자훈련 제1권에서는 말씀 묵상(암송)과 기도 그리고 큐티(경건의 시간)가 제자훈련과 신앙생활의 기초적인 습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제자훈련 기간 중, 다른 과제물과는 달리, 이 과제물들만큼은 결코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제시되는 이유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여러분의 삶에서 습관화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인지는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제물들이 부담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말씀 묵상(암송)이나 기도, 큐티와 같은 과제물이 부담이 아니라 즐거운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은혜와 기쁨을 맛보기 원하십니까?  날마다 내 삶 속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제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 과제물에 철저하십시오.  이 세 과제물이 숙제가 아니라 빼먹을 수 없는 기쁨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2. 과제물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 하십시오.

누군가 독서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일들을 그들의 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기회”라고 말한 것처럼 제자훈련 기간 중에 제시되는 독서 과제물들은 훈련생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와 비밀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제자훈련 중 제시되는 독서 과제물들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면 소화할수록 자신이 성장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나는 책 읽는 것은 부담되지 않는데 독후감 쓰는 것은 못 하겠다”고 말하는 훈련생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펜을 드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독후감은 자신이 그 책을 통하여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느낀 점과 내 상황에서 적용할 부분은 무엇인지를 적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독후감 경시대회에 제출할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진솔하게 쓰면 됩니다.  게다가 쓰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절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지만 글은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자신의 생각을 고쳐 쓰는 과정을 훈련하다보면 말하는 훈련까지 겸해서 할 수 있는 유익을 주는 것이 바로 독서 과제물입니다.

 

3. 과제물을 통하여 작은 예수처럼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십시오.

제자훈련이 다른 소그룹 성경공부와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날 배운 내용을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생활 숙제일 것입니다.  생활 숙제란 내가 배운 대로 살아가는 몸으로 실천하는 숙제입니다.  지식적인 부분 보다는 훈련생의 의지와 결단이 요구되는 과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생활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훈련생들에게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과 행동이 일치된 자세에서 생활 숙제를 실천하려면 엄청난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에게 매일 아침마다 “사랑 한다”는 말로 시작하라는 생활 숙제를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늘 어긋나고 반항만하는 자녀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행동해보라는 생활 숙제는 부모 말을 안 듣는 자식에게 당장 손부터 올라가는 습관을 갖고 있던 부모에게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을 통해 생활 숙제를 실천해보면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하여 그런 생활 숙제를 하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작은 예수의 모습을 갖추기 원하십니까?  성숙하고 변화된 삶의 모습과 신앙 인격을 갖추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생활 숙제를 철저히 실천해보십시오.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십시오.  변화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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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성’이란 계시된 교훈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은 세계 공의회들과 공인으로서의 교황은 신앙과 윤리를 가르칠 때 오류에서 면제된다는 내용으로 이 결정은 가톨릭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마태복음 16장18절과 누가복음 22장31절 그리고 요한복음 21장15절 말씀을 근거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재확인 되었고 또한 교황이 그 직권을 가지고 말할 때 특별한 방법으로 이 권위를 지닌다고 말하며 B. C. Butler의 『The Church and Infallibility』와 George Salmon의 『The Infallibility of the Church』에 의하면 교황의 무류한 범위는 “신적인 믿음의 퇴적물만큼이나 넓어서 거룩한 위탁물로 간직하고 충실히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이 무류성을 교회의 임무에 적용시켜 규칙을 결정할 경우 그와 같은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톨릭에서는 교황 무류설을 변증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한때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교황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다가 바티칸으로부터 가톨릭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독일 튀빙겐대학교의 Hans Küng은『Infallible?: An inquiry』에서 개신교회의 논쟁과 같은 열정으로 교황 ‘무류성’(無謬性)의 허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이 교리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그 대신 교회의 ‘무흠성’(無欠性)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눌 때 17절 이후에 나오는 구절부터 가톨릭교회와 의견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을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맨 처음 교황에 임명되었고 그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교리의 근거로 두면서 신약에서의 베드로와 역사에서의 로마교회의 지위라는 근거 위에 정립한 ‘교황 수위권’ 즉, 가톨릭에서의 교황은 사도들 중 수위인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로마의 대주교이고 교회 규율과 정치에서 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 문제에서도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를 관한할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태복음 16장18-19절 말씀을 로마 지교회의 최초 주교로 베드로가 임명되었고 그가 로마에서 그의 후계 주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인계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해석합니다.  Water M. Abbott가 쓴 『Documents of Vatican II』의 글을 인용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교훈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 개인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도록 허락하셨고 천국의 열쇠도 그가 홀로 갖게 하셨으며 모든 양떼의 목자로 그를 임명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가톨릭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반석’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인데 비록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믿음과 통찰을 계시 받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첫 번째 사람이며(마 16:16-17), 초대교회의 지도자와 대변인으로서 그의 역할을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행 1:15, 2:14), 문제는 이 문맥이나 다른 어떤 서신서에서도 그의 사도직 계승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를 최종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세우고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있었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성경적/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고 전승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로마에서 대감독이 되어 선교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전해지지만(요 21:18),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는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는 부류와 로마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행적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많은 내용을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인 연구는 불안전한 학문이고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연구가 아니라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에서 오순절 이후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베드로가 취했던 사도(벧전 1:1)적 권위는 교회를 세울 모든 신자들의 기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교회 설립에 관해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을 반석으로 교회가 지어졌다고 말하며(벧전 2:4-8),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고(엡 2:20),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3:11).  그리고 마태복음 16장19절에 ‘매고’ ‘푸는’ 권세 역시 ‘토라’ 해석에 기초한 행위를 허락하거나 허락지 않는 랍비적 개념으로 여기서 매고 푸는 권세는 가톨릭의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열 두 제자(교회전체)에게 위임된 것이고(고후 5:18), 그들이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할 때에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막 4:1-9),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막 16:15-16).  요약해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롬 10:9), 즉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신앙 고백한 것과 동일한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고(요 20:28), 또한 ‘참된 교회’란 어느 사람이 세운 종교나 단체가 아니라 오직 반석이시고 모퉁이 돌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으며(엡 2:20),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마 16:15-16),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마 18:20)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교황의 수위권’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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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통적인 사람들이면서도

어떤 면에서 결함이 있는 경우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누구나 다 정통이라고 주장한 개인들과 교회들이

생명이 없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러한 복음적인 교회에 임재하시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교리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지적하는 잘못은 

우리가 인격에 관한 교리,

참된 교리를 인격의 자리에 둘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입니다.

정통적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교리에만 어떤 정의를 하는 데만 머물고,

교리의 목적은 그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다만 그 인격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그 인격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실로 오늘날 교회와 교단에서는 정통적이면서도 

아주 죽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에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교리에 차원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리 자체를

그 인격을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오인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메마르고 쓸모없어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

무엇보다 교리에 있어 균형을 잃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즉 진리의 어떤 면을 너무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모든 관심을 거기에 쏟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로마서 14장에서 사도가 다루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고기 먹는 문제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문제를 삼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밤낮 그 문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그 문제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여기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살아 있고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교리에 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

그러한 교활한 시험을 가져 옵니다.

 

저는 주저 없이 예언의 문제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보인 나머지

메마르고 쓸모없게 된 사람들이 매우 많음을 단언합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저 온 시간을 예언에만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실례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세례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 질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감독 정치만이 교회의 절대적인 진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로교만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메마른 시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무서운 시대에

교회 정치, 봉사의 양태,

이러한 문제들에 온통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언제나 성령을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만날 때 

처음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한 교리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사람들을 이끄는 하나님이 사랑,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듯이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싶게 만드는

그 사랑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까?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어리석고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

부흥의 역사는 사람들이 균형 감각을 잃고

어떤 한 가지에 사로잡혀 획일화되어 버리면

성령은 언제나 소멸되며

그 역사는 언제나 방해를 받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로이드 존스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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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거부하고 납득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예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고 난 후에 뒤늦은 감이 있지만 현재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환영하고 인정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누군가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의 현실이고 무엇보다도 ‘예언’한다고 하면 점쟁이가 점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한 고백은 나 자신도 오래 동안 그런 생각과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예언하는 사람을 만나면 미혹의 영에게 사로 잡혔던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의 삶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인데(마 7:20), 여기서 한 가지 깨닫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들 중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약 1:17), 예언하는 사람의 열매 맺지 못하는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주신 은사까지(고전 12:7), 잘못된 것으로 바라보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과 판단 그리고 성령의 은사(엡 4:7)에 대한 무지함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얼마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지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강하게 새롭게 부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사도행전 2장17-18절에서 ‘내가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임한 결과 중 하나는 예언의 은사이고(고전 12:10),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10:27).  한 마디로 베드로처럼 예언의 말씀을 듣고 예언적인 꿈을 꾸며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0:9-16), 예언은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계시를 적절한 때 교회에 적절한 방법으로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고전 14:24-26).  이 예언에 대해 Jack Deere“예언은 하나님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하며, Peter Wagner“예언은 영적으로 감동된 발언”이며, Wayne A. Grudem“예언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주신 것을 말함”이라고 정의하고, Calvin 역시 고린도전서 12-14장을 해석하면서 “예언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독특하고 탁월한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이란 Gordon Fee가 말한 대로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의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계시 받는 것이 가능한지를 문제 삼으면서 교회 안에 예언의 역할은 끝났다고 주장하는데, 물론 오래 전 개혁주의 입장에서 나 자신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들의 고집하는 주장을 이해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8-10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예언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구절에서 ‘온전한 것’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보듯 서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고전 13:12),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Grudem은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구약적인 표현으로(창 32:30, 출 33:11, 신 5:4),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며,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도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Charles C. Ryrie 역시 온전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더 이상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만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언은 주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고(요 10:2-5), 성경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믿는 자 모두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요 10:27).  한 마디로 양이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입니다(요 10:16).

 

그러면 여기서 오늘날에 하는 예언이 성경에 첨가돼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게 되는데, 사실 현재 주어진 예언적인 계시는 성경의 계시와 전혀 다르고 그 범주도 다르며, 이 예언의 말씀은 “현재의 말씀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한 특별한 방향 계시”로 만나처럼 오늘에만 적용되는 반면 성경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예언은 신뢰적인 측면에서도 성경과 다를 뿐 아니라 이 예언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의 그릇을 통해 주어지고 말하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 오염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은 반드시 분변해야 하고(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해야 합니다(살전 5:20-21).  이렇게 바울이 “분변하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고 좋은 것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인데(딤후 3:16-17), 여기서 ‘영감’이란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을 통해 주어졌지만 초자연적인 보호를 입어 혼탁함이나 오류가 전혀 없습니다(벧후 1:20-21).  즉, 성경의 원본에 적힌 글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정확히 적은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시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1세기에 성경기록은 마감되었지만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 계속 말씀하고 계시고, 만약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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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진짜로 하나님과 사실적이고 개인적이며 실제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이 어딘가 멀리 계시고

우리의 매일매일 생활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사실적이고 개인적이며

실제적인 관계를 갖고 계셨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날이 서늘할 때 함께 걸으시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가장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는 옷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과 사실적이고 개인적이며 실제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분은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사실적이고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대상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두 명의 사실적인 인격과 인격이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관계는 사실적이고 개인적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과 당신과 관계가

사실적, 개인적, 실제적이었던 경험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시간을 두고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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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field는 18세기 영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고

칼뱅주의 부흥을 이끌었던 주인공이며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전도자/설교자로 불리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할 당시 홀리 클럽 활동을 통해 Wesley 형제와 친목을 다졌고

보다 진지하게 거룩한 신앙의 삶을 꿈꾸게 되었다.

1735년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그는 졸업 후 고향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1736년 그가 외쳤던 첫 설교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적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복음에 대한 변하지 않는 열정을 안고 하루에 서너 번씩 설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포함하여

영국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설교를 하였고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뜨거운 영성에 기초한 그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고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얼마나 잘 들추어냈던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고뇌를 느끼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거듭나야 한다”는 그의 피맺힌 외침은 수많은 심령들을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돌이켰고

결국 미국 대각성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Whitefield는 자신의 삶에서도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는데

하루를 식사와 수면 8시간

기도, 방문, 교리공부를 위한 8시간

연구와 묵상을 위한 8시간으로 세 등분해서 사용할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가 매일 밤 점검했던 목록을 보면 얼마나 빈틈없이 자기를 관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 나는 개인기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가?

* 하루 일을 계획하는 가운데 진행했는가?

* 모든 면에서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 있게 했는가?

*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고 친절했는가?

* 거만하거나 허영을 일삼거나 난잡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는가?

*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분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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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아는 한 최고 등급의 죽음이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가

성령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다.

교만에도 등급이 있다고 가정할 때,

최고 등급의 교만이란

성령이 오셔서 은혜 주시기를 구하면서도

은사는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시대는 성령을 제한하고 그분을 비하하고 있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까지 그렇다.

우리는 요엘서 2장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모든 육체 위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예언하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는 일은 없게 해주십시오”라고 덧붙인다.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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