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6.27 참된 교회란?
  2. 2015.06.24 다윗의 범죄에 관련된 사람들
  3. 2015.06.20 동성애는 치유 받을 수 있는가? 1
  4. 2015.06.17 무엇을 기도할까?
  5. 2015.06.13 영들 분별함
  6. 2015.06.10 성품의 변화
  7. 2015.06.03 슬픔

한국은 기독교 10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인구의 4분의1에 해당되는 큰 교세를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울 시내를 돌아보거나 밤에 남산에 올라가보면 불과 몇 미터 사이를 두고 크고 작은 교회들이 같은 상가 안에 혹은 길 하나를 두고 들어서 있는 것을 볼 때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와는 분명 다른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교회들 중에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의문시 되는데 오늘날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실상은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들이 적지 않은 상태이고(계 3:1),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기보다는 지탄을 받는 일이 허다하며 신자조차 자신의 삶 가운데 불신자와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빌 3:18).  성경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3:1-2), 요즘 현대교회는 이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분열과 분쟁이 그치지 않아 교파 간에 교리만 조금 달라도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 경쟁 상대로 여겨 대화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고 과연 이런 교회들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고 뜨고 서로 싸우다 멸망당할 교회들(갈 5:15)에 대해 Hans Küng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죄 많은 동시에 거룩하고 거룩한 동시에 죄 많은 공동체이다”  그러면서 교부시대 이래로 자주 일컬어지고 있는 비유를 들어 교회는 하나의 ‘순결한 창녀’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세상으로부터의 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유사품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 땅에 세워진 유일한 제도로서(행 20:2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사 43:7, 21), 그 구성원을 영생으로 이끄는 교회들 중에는 ‘사단의 회’(계 2:9), 즉 거짓된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인데(요 10:10), 만약 이것을 깨닫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참된 교회에 속하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이방신전들에 관해 논한 적이 있는데(고전 10:19-22, 12:2), 여기서 ‘이방신전’이란 거짓된 종교 모임을 말하고 계시록에 나오는 ‘사단의 회’ 역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참된 유대인이 아닌 자칭 유대인의 모임을 가리키는데(계 3:9), 바로 이런 것이 거짓된 교회의 모습이며 이들은 사단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교회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식하게 해주는 독특한 특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 LutherCalvin은 견해를 같이 하는데 Calvin『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반복적으로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주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말씀과 성례를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진리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성례를 행하지 않는 교회, 인간적인 교훈이나 듣기 좋은 허탄한 이야기(딤후 4:3-4), 즉 망령되고 거짓된 교리가(딤전 6:20), 선포되는 곳에 참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을 통한(엡 2:8), 구원의 복음 소식을 감추거나(롬 1:15-17), 성경 말씀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위격을 부정한다면 그 어떤 모임도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행 20:28),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일 4:6).

 

이렇게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요 8:31-32, 47, 14:23, 요일 4:1-3,),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키도록 명령하신 ‘세례’와(마 3:13, 28:19), ‘성찬’을(마 26:26-30),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시행하는데(행 2:38, 고전 11:23-26, 갈 3:26-27), 여기서 세례는 사람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수단이고, 성찬은 교회의 지속적인 회원임을 표시하는 수단이긴 하지만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볼 때(마 26:25-28),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행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행 1:16-18).  따라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 “성례는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은혜 계약의 거룩한 표요 인치심”이라고 했고, Calvin 역시 “성례를 올바로 거행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해 주며 또한 견고케 해주는 방식”이라고 강조했지만, 만약 이 성례를 집행함에 있어 성경에 가르치는 바에 따라 죄의 용서와(행 2:38), 주님과의 연합(갈 3:26-27), 그리고 새 생명으로의 부활과(롬 6:3-5),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됨을(고전 12:13), 확신하지 못하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마 28:19), 집행되지 않는다면 성례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그분과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는 성례의 근본 뜻과 의미를 상실하고 시행한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말씀과 성례의 시행이 있을 뿐 아니라 ‘권징’의(마 8:15, 살후 3:6-16, 딤전 1:20, 딛 1:13, 계 2:14-20), 신실한 시행도 뒤따르는데 그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모인 교회 안에는 성도의 성결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만약 교회가 성결함을 훼손하는 죄악된 행위를 고린도 교회처럼 치리하지 않고 묵인한다면(고전 5:1-8), 교회는 더 이상 순결성을 유지할 수 없어 급속히 부패할 것입니다. 사실 Calvin은 권징을 중요시 했지만 『French Confession of Faith』에서는 참된 교회를 식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말씀’과 ‘성례’를 강조했고, 후에『Belgic Confession』이나 이것보다 앞서 작성된 『Scots Confession』에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을 교회의 삼대 표지로 정의했으며 이것은 후에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분시키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이한 경우로는 구세군처럼 예배 속에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 안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거짓 확신을 심어주거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성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악용하여 엘리 제사장처럼 범죄한 사람들을 묵인하고 내버려 둔다면(삼상 3:13), 그런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처럼 인간의 비위를 맞추거나(미 3:11), 권징이 올바로 시행되지 않는다면(마 18:15-17), 그러한 교회 역시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논쟁거리 >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와 하나님 나라  (0) 2015.01.10
눈에 보이는 교회의 약점  (0) 2014.10.11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0) 2014.08.02
교회란?  (0) 2014.05.17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  (0) 2014.02.2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다윗의 범죄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보면 먼저 밧세바는 그 정조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상대가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허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레 20:10).  또 피해자인 헷 사람 우리아는 다윗의 삼십 명 용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삼하 23:39), 죽기까지 충성한 참된 신하이다. 다윗의 간접 살인을 실행한 장군 요압은 지도자의 잘못된 명령을 수행한 잘못된 신하이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충성된 부하가 아니다.  선지자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왕도 꾸짖을 수 있었던 참된 사역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준다.  누구보다도 이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솔직하고도 빠른 회개를 하여(삼하 12:13, 시 51편), 사하심을 얻었을 뿐 아니라 밧세바 사이에서 난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조상까지 되는 영광을 얻었다(마 1:6-7).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어 만든 우상  (0) 2016.01.13
성경적 국가관  (0) 2015.10.21
므비보셋과 이스보셋  (0) 2015.04.01
여호와의 신과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  (0) 2015.01.28
다윗에 대한 사울의 핍박  (0) 2014.12.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현대 사회에 있어 사람들에게 말하기조차 꺼릴 수치스러운 것이 있다면 성중독자들이 짓는 ‘은밀한 죄’로 이 죄는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위협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법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이 질병(동성애, 외설물, 자위행위, 관음증, 성희롱, 강간, 간음, 노출증, 전화/인터넷을 통한 매춘, 등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중에 10퍼센트 정도는 성에 중독되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중독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상투적인 모습인 알몸상태에서 트렌치코트만 입고 다니는 노출증 환자와 같이 행동할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지극히 신사적이고 친절한 사람이며 이웃에게 너무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악하고 더럽고 음란하고 역겨울 정도의(막 7:21-23), 더러운 일을 은밀한 가운데 서슴없이 행하는데 만약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겔 18:31).  이 문제를 놓고 Merville Vincent 박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성적 이상자이며 성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이상에서 벗어나는 음탕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이 세상에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적인 문제에 대한 정통 유대주의자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모든 문제를 인간의 타락과 연관 지을 때 사람의 죄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하며 특히 동성애자들도 우리만큼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이들의 행위에 있어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이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John Stott도 동성애에 대해 논의할 때 ‘존재’‘행위’ 즉, 그 사람의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성행위(항문교접)에 대해서는 비난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김새나 인격에 대해서는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즉,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며(창 1:27), 그분 앞에 죄인이고(롬 3:9), 성적인 존재라(창 2:24),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죄에 대한 유혹을 받으며(마 6:13), 공중 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엡 6:10-12).  문제는 우리가 짓는 죄는 동성애자의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칠 때가 많은데 가령 동성애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심각하고 더러운 죄이고(레 20:13), 우리가 짓는 또 다른 성적인 죄는 그다지 심각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요일 1:8-10).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동성애가 죄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동성애만 죄로 여기지 않고 이성애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더러운 성적인 죄(히 13:4),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6장9-10절에 나열된 모든 죄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인 행위가 불법인 것처럼(고전 7:1-3), 우리는 동성애를 죄와 질병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악의 세력, 즉 마귀가 그 배후에 역사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고(요 10:10), 무엇보다도 마귀는 질병으로서의(눅 13:10, 16), 동성애를 유발하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가정과 성적인 학대와 수치의 감정과 같은 여러 역학관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동성애가 선천적이며 유전적이거나 아니면 후천적인 요인으로 인해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귀신의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하나님보시기에 비정상적인 성적인 행위 배후에는 귀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고전 7:5).  따라서 성경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창 2:16-17), 특히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체질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애자인 신자가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마 19:6), 배우자이외에 다른 어떤 성적유혹으로부터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고전 7:3), 부단히 싸워 나아가는 것처럼(히 13:4), 동성애자 역시 도덕적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살전 4:3), 본인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히 12:4).

 

그렇다면 과연 동성애자도 치유를 받아 정상인으로 회복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질병 이전에 반드시 버려야 할 죄의 성향으로 언급하지만(레 18:22), 많은 의사들이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있고 반면에 동성애자들 스스로는 선천적이며 유전적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동성애는 타고나서 자신들의 성향을 바꿀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동성애자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고 회복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 마디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래 전에 Columbia University 교수를 지낸 Robert L. Spitzer 박사는 동성애가 불변하는 특성은 아니기 때문에 성적지향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소위 ‘전환치료’를 통해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다고 처음에는 발표했지만 후에 그는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동성애 단체에게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단체인 Exodus Global Alliance에 의하면 자신의 성적욕망이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바뀐다고 말하면서 동성애 생활방식을 버리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과 성적취향까지 달라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이러한 증언들을 일축해 버리고 그들은 원래 진짜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이며 유전적으로 타고난 동성애자에게는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나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요 4장), 동성애자들에게도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미 다섯 번을 결혼했지만 늘 성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없는 그녀에게 구원의 생수를 주셨을 때 그녀는 결국 성적인 죄에서 놓여남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놓고 동성애적 성향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Francis MacNutt 박사는『Can Homosexuality be Healed?』에서 치유기도가 신실하게 시간을 가지고 이루어졌을 때 매우 높은 확률의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악한 영은 실제 존재하며(엡 6:10-13), 사람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문란한 성행위로 끌어들이는 영으로부터 축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John Stott도『True Freedom Trust』에서 발간된 소책자『증언들』에 나오는 사례들에서 “손을 얹고 기도를 받자 성도착의 영이 나를 떠났다. 그날 오후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3년이 넘게 동성애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나는 증언할 수 있다”라는 간증을 소개하면서 Elizabeth R. Moberly 박사의 글을 인용합니다.  “기도에서나 관계에서나 사랑이 가장 기본적인 치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치유하고 구속하는 사랑을 구하고 중재하기를 기꺼이 원한다면 동성애자들의 치유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들도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의 놀라운 능력,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때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제자훈련 1권5과에서는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기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의식과 바른 기도의 방법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주기도문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기도를 어떻게 고쳐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강해하고 있는 『무엇을 기도할까』는 1권5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비록 기도하는 방법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 동안 방법론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우리들의 기도생활에 대해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도전하고 있다.  기도의 생명은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있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기도의 내용을 보여주는 주기도문을 통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에 대해 밝히고 있는 이 책은 1권 전체에서 반드시 읽어볼만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할 만큼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며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바른 기도에 대해 이해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나누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총 9개로 나누어 강해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 중 몇 가지를 발췌해 보았다.

 

기도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조용히 기도하고 일어나시는 모습 속에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이 간청을 들으시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간청하는 제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기도의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기도의 자극을 받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도 생활이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보다 앞서서 자극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둘째는 우리는 기도의 자극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주기도문은 그 자체가 완전한 기도로 동시에 모든 기도의 기초가 되고 지침이 되는 완전한 모형이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셋째는 주기도문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기도인가를 배운 사람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믿는 사람이 무시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 이름은 그분 자신입니다

주기도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핀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와 순서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순서상 우리 자신이 우선되어 있으나 주님이 가르치는 기도의 최우선은 하나님 자신이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실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전부 이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한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기도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점이 많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도의 잘못된 우선순위와 편협한 강조점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전 인격을 나타내는 귀중한 상징이며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그분의 인격 자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거룩해질 필요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거룩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원한다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달라는 소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그 기도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이 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약속과 결단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이름에 합당한 영광 역시 돌릴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을 항상 마음에 모시고 살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첫 자리는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넷째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전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면 위의 약속과 결단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간청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 들어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핵심,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서만 아니라 사복음서를 위시한 신약 전체에 있어서도 중요한 테마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었으며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영토를 소유한 세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다스림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하나님나라를 세상적인 나라로 착각하는 것이다.  첫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는 현대 교회 신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치관이나 관심사 등이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천국으로 해석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통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갈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임하기를 기도하는 자이면 그 나라가 먼저 우리 마음에서 꽃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뜻에 기쁘게 순종해야 하며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천국은 교회를 통해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이 천국은 교회를 통하여 온 세계에 확장된다.  하나님께서 지상교회를 세우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 세계에 확장하는 데에 있다.  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은 이제 오실 것이며 이 세상 왕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은 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를 소망한다면 당신의 마음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를 계속 확장하기 위해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한다.  당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

주기도문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후반부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들어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우리 자신을 위한 네 가지 기도 중 첫 번째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위한 기도의 첫 자리에 먹고 마시는 ‘일용할 양식’을 갖다 놓았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것임을 주님께서 솔직히 시인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솔직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잘못하면 이 기도를 우리와 아무 관련 없는 기도, 즉 1세기 당시의 빈자들에게 어울리는 기도라고 냉소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첫째는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하루 생활이 전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 기도는 꼭 필요하다.  둘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한다.  셋째는 이 기도에는 우리의 생의 목적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도를 해야 한다.  넷째는 내일의 염려를 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한다.  끝으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기도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능력이 들어 있다.

 

우리는 다 여유 있는 생활을 원한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에는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 수 있는 여유가 많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하나님의 자녀답게 경건하게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생활에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에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가진 일용할 양식이 세상 사람의 소유물에 비해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시고 허락하시는 그 일용할 양식만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평신도 훈련 > 참고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 권위  (0) 2015.11.04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0) 2015.08.19
말씀의 손 예화  (0) 2015.03.04
영성이 깊어지는 큐티  (0) 2014.12.24
늘 급한 일에 쫓기는 삶  (0) 2014.11.0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Lloyd Jones는 성령의 은사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을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는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전해진 어떤 것도 스스로 경시한다. 그들의 마음의 선입관과 모든 편견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역사는 교회의 진실한 부흥이나 성령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역에 대한 최대의 적은 거의 일괄적으로 교회 자체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것은 놀랍고 굉장한 진리이며 모두가 성령을 소멸하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개혁가들을 박해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의 위험은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쉽게 모든 것을 믿어 버리곤 한다. 이들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것이라도 믿음만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서 그들이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나쳐 버린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거짓된 열정이라 불렀던 것이며 항상 광신주의로 이끌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첫 번째 부류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성령을 소멸할까 두려워서 무비판적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소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Lloyd Jones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단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물질적인 것의 주위에는 영적인 영역들이 있으며 하나님과 모든 거룩한 것을 대적하는 사악하고 해로운 영들과 권세들이 있다. 우리는 성령 뿐 아니라 이러한 악령들로부터 항상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의 한 가지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인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과 그 교훈을 줄 뿐 아니라 가능한 우리에게 영들을 시험하고 영들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 “성령을 소멸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살전 5:19-22).  여기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은 죽은 정통, 즉 모든 것을 질서 하에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에 성령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말라는 것이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것은 성령의 외적인 은사라고 불리우는 것들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라는 것인데 환언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바리새인처럼 무조건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지 말고(마 12:22-37), 좋은 것들이 있다면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과 악을 구별하고(요일 4:1), 의와 불의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데(겔 44:23), 특히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는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으로(고전 2:14), Calvin은 이 은사에 대해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통찰력을 말하는 것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은사라고 말하며, Wayne Grudem은 어떤 사람 안에 있는 마귀의 영이나 성령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며, D. A Carson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행하게 하신 기적들을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을 분별했던 것처럼 악령들의 사역을 분별하는 은사라고 말합니다.  또한 RobertsonPlummer는 영적 현상들이 위로부터인지 자연적인 것인지 혹은 악령에 의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으로 거짓 예언자들이 교회 안으로 많이 침투한 상황에서 이 은사는 필수적이고, Gordon Fee는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특히 예언들을(고전 14:29), 바르게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는데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영들 분별함’이란 사람의 속마음이나 감추어진 죄악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들 분별함이 감추어진 죄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을 가진 은사인데 성경에서 이 은사를 받은 대표적인 두 사람을 든다면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소유물을 판 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때 영분별의 은사를 사용하여 죄를 지적했고(행 5:3-9), 사마리아 전도여행에서 마술사 시몬을 보고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라고 말하며(행 8:23), 이 은사를 사용한 것을 알 수가 있고,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 지방에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여종하나를 만났을 때 그녀가 바울의 일행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고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추켜세우자 바울은 이것이 그녀에게 역사하는 귀신이 소행임을 분별하고 악령을 쫓아내었는데(행 16:16-18), 이렇듯 이들이 영분별의 은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적은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서 대처하기가 용이하지만 교묘하게 가장하여 공격하는 적은 잘 분별하지 않으면 도리어 공격을 당하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마귀의 활동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엡 6:10-12), 거짓 교리가 판을 치며(딤전 4:1), 성령의 사역을 모방하는 온갖 종류의 현상들이 난무한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다면 바로 영분별의 은사일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 영들 분별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  (0) 2018.09.16
영분별의 은사를 가진 사람  (0) 2015.09.19
분별할 수 있는 능력  (2) 2015.03.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은혜로운 감정을

다른 감정들과 구별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회심하기 전에도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회심하게 되면 그는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과 본성 자체가 죄에서부터 돌아서서 거룩함으로 향하게 된다.  그 결과는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며 죄와 원수가 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는 처음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면서도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과거에 그에게서 보였던 나쁜 성질들과 악한 습관들이 두드러지거나 뚜렷하게 변화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그가 익숙해 있었던 것과 그의 본능적인 성향에 지배를 받으며 비그리스도인과 같이 이기적이고 육욕적이며 어리석고 사악하고 향기가 없게 보인다면, 이것은 그가 체험한 일들이 굉장히 영광스럽다는 이야기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매우 부정적인 증거다.

 

만일 그 사람에게 잠시 동안 매우 크고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가 지속적이지 않고 그가 과거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 간다면 그것은 본성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성은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본성을 가진 돼지는 씻어 주어도 돼지의 본성은 그대로 남는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는 비둘기가 더럽혀질 수 있지만 그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비둘기의 본성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은혜는 사람 안에 있는 죄스러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킨다.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사람을 입게 된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본성적 기질 때문에 특별히 음란이나 방탕이나 악의에 쉽게 기울어졌다면 은혜는 이런 악한 성향들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래서 여전히 그가 이런 죄들을 저지를 큰 위험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이 죄들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 이 죄들이 자기 인격의 주된 요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은혜를 받을 때 영원한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영혼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

성령은 영혼 밖에서만 거하시면서 영혼을 강압적으로 자극하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도록 영혼 안에 거하신다.

'신앙감정론 >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두려워함  (0) 2016.01.06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  (0) 2015.09.30
참된 겸손  (0) 2015.02.18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0) 2014.12.10
하나님을 아는 지식  (0) 2014.10.2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슬픔

평신도 훈련/묵상 2015. 6. 3. 12:41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겪게 되는 슬픔은

때로 우리 생명에 유익이 있다.

슬픔은 우리의 마음을 더 깊게 만든다.

 

성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전 7:3).

하루 종일 희희낙락하는 사람은 흔히 경박한 사람이 경우가 많다.

슬픔은 하나님의 쟁기이다.

그것은 흙의 깊은 곳을 파서 땅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한다.

 

만일 우리가 지금껏 한 번도 타락해 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슬픔이 필요치 않다.

그때는 하늘에 속한 기쁨이

우리를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격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타락했기에 슬픔이 우리를 회개하게 하며

결국 우리 자신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슬픔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감정이 된다.

요셉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이스라엘 나라와 그의 민족을 구원하게 되기까지

그는 다른 어떤 아들들 보다 슬픔을 많이 겪었다.

다윗과 바울도 역시 적잖은 슬픔을 체험하였다.

더욱이 우리 예수님도 우리의 죄로 인해 슬픔을 맛보았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주 슬픔을 통해 그분의 뜻을 전달하신다.

 

-찰스 카우만-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련된 그리스도인  (0) 2016.05.19
즉각적인 순종  (0) 2016.02.17
구세주  (0) 2015.11.25
부르심  (0) 2015.08.12
양심  (0) 2015.03.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