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5.30 가증스러운 신앙
  2. 2015.05.27 아는 것
  3. 2015.05.23 병 고치는 은사
  4. 2015.05.20 오염된 교리
  5. 2015.05.13 훈련을 위한 3가지 요소
  6. 2015.05.06 어디 한번 붙어볼래!
  7. 2015.05.02 가톨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진리가 되어 하나님 품에…”라는 장례문구를 자살한 어느 목회자의 장례식에서 본 적이 있는데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엡 2:8),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고는 있지만(고후 5:2), 우리는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시 51:5),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렘 17:9),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을 믿더라도 어떤 자극만 받으면 분노와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에(전 9:3), 그러한 인간에게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회의론’(Scepticism)을 반박하기 위해 진리개념의 ‘조직적 설명’(組織的說明)을 시도한 최초의 신학자는 Augustine이었는데 그는 ‘진리’라는 단어를 네 가지 의미로 구별하면서 그 중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나타내신 까닭에 유일한 ‘진리’(眞理)”라고 설파했습니다.  비록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에 이런 주장은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하겠지만 이 대담한 주장에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중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시고(골 2:3), 그분의 삶에서는 죄와 오류나 거짓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며(히 4:15), 그분의 가르침은 언제나 올바르셨을 뿐 아니라(마 7:29),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의 실체라는 것입니다(빌 2:6).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배타성은(행 4:12), 바로 그분만이 가지고 계시는 신격의 독특함이기 때문에(요 10:30), ‘진리’라는 단어를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신학자/목회자들 중에 개혁주의자 Calvin을 높이는 사람들은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한다는 명목아래 그 일환으로 Calvin 탄생 기념사업회 같은 것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높이는데 이것도 좋지 못한 현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제네바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Calvin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계 21:8, 22:15), 성경은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했지(고전 11:24), 한 시대에 당나귀처럼 사용(민 22:28)된 죄 많은 인간(롬 3:9)을 칭송하라는 구절이 없기에 사람을 높이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장래를 예고하고 그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행한 아름답고 받을 만한 사랑과 희생적인 행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지(마 26:6-13), Calvin처럼 종교개혁을 빌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창 1:27), 잔인하게 죽인 사람을 기념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가령 자신이 대단한 목회자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과 그러한 부류들을 높이면서 그의 신학배경이나 학력/경력을 높이 평가하는 교회 직분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가증스러운 일이고(요 5:44), 우리는 결코 어느 누구라도 사람을 높이거나(눅 16:15),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3:21).

 

그리고 목사/신학교 교수가 되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 성경의 진정한 저자를 사랑하기보다는 성경 자체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 ‘성경연구’ 혹은 ‘성경지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신학자/목사)들은 성경을 알았고 성경을 읽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음성도 듣지 못했는데(요 5:37-40), 매일 성경을 연구하면서 여러 시간을 성경과 같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결코 어느 때에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매일 성경을 읽더라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물론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져야 하겠지만 성경 자체를 우상시하거나 교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격과 예수님의 역사하심보다 더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자체를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몇 가지 좋지 못한 열매들이 있는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성경이나 신학, 혹은 교리나 교회전통, 또는 목사의 학력과 경력, 심지어 설교의 실력이나 영성과 능력, 교회 프로그램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이야기를 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부수적인 것들에 비해 예수님을 너무나 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도덕적 행동이나 의무를 신자의 삶의 본질로 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결국 바리새인을 특징 지우는 것과 같은 자기 의에 빠지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13-28).  이 말씀의 의미는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율법과 일치하게 살려고 할 때 항상 자기 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만일 바리새인에게 있어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자기 의로 이끌 것이고 그런 자기 의로 인하여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눅 18:9).  그리고 이미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성령의 은사들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는 함정에 빠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고전 12-14장), 또한 감정주의에 미혹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추구하기보다는 더 특별한 수준의 감정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 귀신의 가르침을 좇거나 신비주의 신앙에 빠지기도 합니다(딤전 4:1).

 

그리고 교회의 예배형식으로 예배시작 무렵에 준비 단계에서 장시간 걸친 음악 시간을 갖는 것인데 물론 찬양 중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시 22:3), 여기에서조차 일부의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실제로 그 시간에 예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예배’를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의 삶 자체, 교제, 치유, 전도, 구제, 봉사, 기도, 훈련, 선교 등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모든 일을 하여도 바리새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에(마 6:1-18),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어떤 선한 일들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거나 이런 모든 것들에 의해 미혹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들과 주님을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교리, 추상적인 원칙, 신학, 사역, 교회, 활동, 교단, 생활방식이 아니며, 그분은 한 위(位), 한 진정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 이러한 것들 중의 하나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우리를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그것들이 우리 삶속의 우상이 되거나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 6:1).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고전 13:1-3), 말에나 일에나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고(골 3:17), 그분만을 자랑하며 높이지 않는다면(벧전 4:11), 그 신앙은 가증스럽고 별 볼일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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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진리의 성령 2015. 5. 27. 13:19

어떤 사람들은 성령께 기도를 드리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이것을 금지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을 경배하는 것은 마땅하고, 경배가 하나님께 가치와 존경을 돌려드리는 것일진대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게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삼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인격체라면 볼 수 없는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먼저 두 인격의 관계는 상호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상호 의사소통이 있어야 하고 서로를 경험해야 합니다.  저는 아내와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우린 서로 말하며 마음을 나누고 손도 잡고 아내가 옆에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서로를 사랑하고 기쁘게 할 일을 합니다.  이런 상호작용이 관계성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빌 게이츠와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그가 어떠했는지 게이츠의 일생을 공부할 것이고, 그의 글들과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이룬 업적과 사람 됨됨이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고 공부를 한다고 해서 게이츠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계는 상호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게이츠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하거나 악수를 하거나 내 등을 두드려 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게이츠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없으므로 그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알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경험하는 문제를 놓고 오늘날 교회는 커다란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1세기 말까지 이미 하실 말씀을 다 해놓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삶은 비경험적인 것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것을 배우고 그분이 기뻐할만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지만 우리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주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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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은 남들이 알아주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4년간 가르치는 것과 그것을 사람들의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모든 과정을 잘 배우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뚜렷한 선교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빛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성경공부 반을 세우자 원주민들은 진지하게 열심을 보였고 추장과 많은 부족 어른들을 비롯하여 마을사람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학기 말이 다가올 때쯤 성경공부 참석자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원주민들이 선교사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John은 혹시 자신이 원주민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아니면 무슨 문화적인 금기를 범한 것은 아닌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고 결국 추장을 설득하여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길 “당신이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성경공부를 할 때 말씀이 머리 속에 속속 들어와, 정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묻자, 추장은 “성경공부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성경공부를 다녀온 밤에 우리를 고문하듯 괴롭히는 귀신들에 대해 처리하는 방법을 당신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추장과 대화를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John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젊은 선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훈련은 잘 배웠지만 그 마을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는 영적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고 이것은 오늘날 교리와 전통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현대교회가 겪고 있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앙생활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요한삼서 2절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엡 6:10-13), 이 전쟁은 인간을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끌고 가는 치열한 싸움으로 주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히 12:4).  무엇보다도 지식적인 성경공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귀신에게 너무 시달려서 자살하고 싶다든지, 방금 암 진단을 받은 사람, 혹은 감정에 큰 상처를 입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성경공부만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성경공부를 포함한 봉사와 친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이 젊은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선교를 했지만 그곳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과 악의 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에 대해(고전 12:7-11),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전쟁에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 교회에 암 말기 환자 한분이 대학생 아들과 함께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집사님으로 그 당시 머리카락은 다 빠진 상태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집사님을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성경공부와 말씀으로만 양육을 시켰고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해서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처럼(약 5:14-16),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고 사실 정식 신학교육은 받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경험이나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분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회자에게 간다고 말을 하면서 교회를 떠났을 때 그때에는 담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도 그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성경에 나오지만 치유사역(막 16:18, 고전 12:9)에 대한 무지함 그리고 교회 전통과 대학원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으로 인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조금만 더 일찍 성령의 능력사역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표현한 분으로 묘사하는데(요 1:18), 예수님은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을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히 10:7).  이 말씀의 의미는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 40편을 기독론적으로 사용한 구절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완벽한 참 제사의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히 10:14).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마 4:23),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마 9:35, 10:1, 막 1:34), 예수님의 사역은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병 고침을 받으러 오는 자들을 거절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마 14:14).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주된 사역 중에 하나가 병자를 고치는 것(마 4:23-24)과 귀신들린 사람(막 5:1-20)을 치유하는 것이었고(막 9:14-29), 주님은 제자들(눅 9:1-6)과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치유사역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막 16:17-18).  이렇듯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병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지상사역 때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히 13:8),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눅 5:17, 요 14:12),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마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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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소위 역사 속에 나타난 위대한 부흥은

대중 히스테리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를 심리적인 일이나

히스테리적인 발작 증상으로 돌려버리는

이 무서운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이러한 일에 대해서 말할 때,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히스테리로 돌리지 않으면서도

성령을 소멸하는 똑같은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논증합니다.

 

“성령세례는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거듭날 때 곧 중생할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누구나 성령세례를 받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하거나,

교회에 성령을 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거나,

성령으로 교회를 새롭게 해주시고

능력의 세례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은 비체험적인 일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은 다시 반복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성령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릇되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오순절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셨다.

성령께서는 그 이후 교회 안에 늘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이런 유의 설교가 주를 이룰 때,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멈추거나

교회가 오늘날 이러한 모습을 띠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논박하고 무시하며 부인하는 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사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또 말씀으로 인해 오는 것 외에는 성령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볼 때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2절에 보면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를 향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졌으나

성령께서 “허락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는 비두니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를 막아 더 이상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성령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고 통제하며 인도하고 명령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에서 완전히 떠난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복음주의적인 작가들마저도 부흥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을 소멸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보편적인 사역뿐 아니라 

특별한 사역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우리는 

성령을 교회 전체에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흥이요, 성령의 임재하심이요,

성령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역을 넘어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입니다.

 

다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성령의 교리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리지만,

세련되고 그럴듯한 교리를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령을 통해서 행하시는

가장 주목받을만한 일을 배제시키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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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몇 번 왔다고 바위는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몇 번 참석만 했다고 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 가치관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습기'를 줘야 합니다.  바위는 소나기에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촉촉이 적셔 주는 습기에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가치관이 조금씩, 조금씩 깨어져서 내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제자훈련을 통해 성경말씀의 깊은 단맛을 느껴야 합니다.

 

1. 자신의 삶을 오픈하는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제자훈련을 통하여 매일의 삶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요?  제자훈련을 통해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이 내 삶에 세밀하게 적용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 같은 삶의 비결이 자신의 삶을 나눌 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나눌 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기도에 집중 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변명은 시간과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에겐 열아홉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잔나는 매일 한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수잔나가 머리에 수건을 매겨 아이들은 어머니가 기도 중에 있음을 알고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그녀보다 바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신가요?  그 사실만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훈련생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3. 서로간의 덕을 세우십시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입니다.  지체는 일부분이 아픔도 같이 느낄 수 있죠.  우리 각자는 한 몸을 구성하는 지체처럼 서로에게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훈련을 시작하면서 서로의 모습 속에 보이는 약점들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받아주시고 서로를 아껴주십시오.

 

훈련 기간 동안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하는데 방해하는 그 어떤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훈련 시간은 단 한번뿐이고 더 이상 오지 않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러하기에 효과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내 자신의 삶을 나누며 기도에 집중하시고 서로의 덕을 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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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과 육’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말합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무엇입니까?

사단과 그 휘하에 있는 귀신들을 말합니다.

‘씨름’은 무엇입니까?

싸움입니다.

한라장사와 백두장사가 상금으로 내놓은 황소를 갖기 위해

모래판 위에서 몸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은 악한 영들인 마귀와 귀신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악한 영물들은 사람을 통해서

특별히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온갖 악한 일을 다 꾸미고 다니는 사악하고 간사한 존재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나를 비방하며 다닌다고 합시다.

이때 싸워야 하는데 그 대상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적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이

뒤에서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만일 배후에 있는 이 악한 영들의 정체를 지나쳐 버리고,

급하고 분한 마음에 그 사람에게 달려가서

“야, 임마! 뭐가 어째! 어디 한번 붙어볼래!”

이렇게 말한다면 이미 영적싸움에서 지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를 잘못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 사람에게 한바탕 하려고 할 때가

바로 악한 영들이 나를 배후 조정 하려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 한 번 큰 소리로 이렇게 명령하고 대적하시길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사악한 귀신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신사, 숙녀 체면에 ‘쪽’ 팔리게 무슨 그런 소리를 지르라고 그러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체면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마귀와 귀신들은 영의 법칙으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명령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같이 맞받아쳐 싸우면 바로 사단이 파고듭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사람을 한번 박살내버리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마귀가 하자는 대로 하면 즉시로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어쩌다 부부싸움 하다가,

직장사람들과 다투다가,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화를 터뜨렸다 하더라도

그때 한 번만 확실하게 하십시오.

하루 종일 가지고 있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분을 가지고 있으면 사탄이 틈을 타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제어하는 법은 마귀가 하자는 대로하지 말고 무조건 거꾸로 하십시오.

마귀가 내 마음에 속삭이기를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대로 있어 한 번 붙어봐”라고 충동질하거나

한바탕하라고 할 때에 거꾸로 그 사람에게 웃으십시오.

그것도 방긋 웃으십시오.

물론 얼굴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사람은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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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 교회의 시작과 확장에 대한 상세한 이해는 주로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후 33년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것으로 여겨지고 십자가에 처형되던 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은 오순절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강림사건인데 이로 인해 어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점화시킨 그리스도 복음의 불꽃이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빠른 속도로 로마까지 퍼져 나갔고 그 당시 로마제국에 있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끼친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 그리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누어 불렀지만 11세기까지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는 언어, 철학적 경향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수장(首長)이 없이도 하나의 가톨릭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은 2세기 초 안디옥 감독이었던 Ignatius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 곳에는 가톨릭교회가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2세기 말에는 각 지역 개교회에 대조되는 보편교회이자 이단적 종교집단들에 대조되는 정통이라는 의미로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이라는 용어에 대한 좀 더 제한적인 이해는 로마교회와 로마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교회들을 분리시켰고 교회사 전체를 통해 주요한 분열이 세 번 일어났는데 먼저 주후 553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본성을 중심으로 한 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입장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들 간의 분열과 주후 1054년에 권위의 구조를 중심으로 한 서방(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일어났던 분열, 그리고 1517년 ‘양성론’(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서방교회 안에서 일어난 ‘항의자’(신교)라 일컫게 된 기독교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사이의 분열을 둘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교회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지만 당시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초기 기독교 300년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함께 예배드리고 일하며 기도하고 생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Constantinus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후 445년에 이르러 교황 Leo가 지도권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라고 선언했을 때 이러한 주장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섬기는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들 가운데 가톨릭에서는 자신들의 성경해석에 근거를 두고 “가톨릭교회 외의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정말 “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하고 참된 교회인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신자들이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읽을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그전에는 개인이 성경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성경해석에 있어 가톨릭 교권만이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었던 James C. Gibbons는 『The Faith of our Fathers』에서 “교회는 성경 해석자와 보관자를 성스럽게 지정했으며 하나님은 살아있는 교회의 권위를 떠나서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법칙으로 삼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가톨릭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하나님 말씀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오류를 고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교정 수단을 스스로 박탈해버린 것으로 Hans Küng의 말을 빌리면 자신들이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이 어떤 권위들에 의해서만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에 의해서도 읽혀지고 해석되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Martin Luther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각 사람이며(요 5:39), 그리고 각 개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공부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권면합니다(골 3:16).  물론 성경을 배우는데 있어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행 8:30-31), 문제는 예수님께서 탁월한 성서학자나 목사, 그리고 가르치는 자들이 완전무결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약 3:1), 이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기는 하되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해석하거나 어느 한 부분만을 주관주의적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마 23:15, 눅 11:52), 가톨릭에서도 신자들에게 성경해석 권한을 주지 않고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하는 두 번의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권좌 즉, 사도계승의 최고 권위로 그가 신앙과 도덕에 관계되는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절대적으로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마태복음 16장18절에 기록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에 기반을 두고 잘못된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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