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그날 오후 이후로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으며 왕이었던 사울은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였던 것이다(삼상 16:13-15).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란 성령을 말하는데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선지자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성령께서 임하셨으며(단 4:8, 5:11-14), 그들의 사역이 끝나면 성령은 떠나가셨다(시 51:1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임재 하셨고 그 후에는 결코 성도들로부터 떠나지 않으셔서 성도들이 바른 길로 살아가게끔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요 16:12-15, 롬 8:14).  반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기록된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은 사단을 가리킨다.  문자적으로만 보자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조종하시는 분이 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친히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약 1:14).  여기에서 악신을 여호와께서 부리셨다는 표현은 단지 사단이 활동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이다(욥 1:6-7, 벧전 5:8).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사단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사무엘상 16장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떠난 후에야 악신이 사울의 마음을 번뇌시켰으며 여호와께서 동행하시는 다윗이 수금을 타자 악신은 사울에게서 떠나갔다고 했는데(삼상 16:23), 이는 여호와의 신 앞에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사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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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Berkhof은 삼위일체론에 대해 “삼위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행해진 많은 노력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삼신론’과 ‘양태론’인 하나님 개념들을 도출하게 되었으며 신적 본체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체 안에 있는 위격적 구별의 실제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교회는 다만 적절한 용어를 통해 가능한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Calvin은 후대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민할 것을 알았던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 같이 어리석으며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많은 예증은 인간의 이해를 촉진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마 28:19), 기독교가 ‘다신교’ 아니면 ‘일신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처럼 예수님이 단순히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대속의 문제, 즉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갈 3:13), 또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롬 3:28).  가령 예수님이 피조물로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가르침 역시 공적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돌리게 되어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출 20:3).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이라면, 그분이 아무리 위대해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인간을 섬기는 우상숭배 밖에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레 25:1), 그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14:13).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에 분명히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며 “각 위격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사실 세 위격들이 존재하면서 각 위격이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이 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Herman Bavinck는 “삼위일체의 고백에서 기독교의 심장이 뛴다”라고 말했는데 반면에 이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분 앞에서 영적으로 더 건전하다고 볼 수 있고, 성경은 우리에게 모순된 것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이기에 차라리 완벽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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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존재들은

인본주의나 강신술이 아니라 ‘죽은 신앙’이다.

우리는 입으로는 ‘영원’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지금 영원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임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주님을 향해 불같은 열정을 갖고 사는 사람들,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기도할수록

지옥에서 잠을 못 자며

영원을 고통 속에 보내야 할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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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 목사는 처음에는 예언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예언사역자 Paul Cain를 만났을 때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을『놀라운 예언의 은사』에서 이렇게 회상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 외에 오늘날에도 실제로 그 시대의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나에게 사기처럼 들렸다. 우리에게 예언자 대신 우리를 인도하는 성경책이 엄연히 있지 않은가? 예언자의 필연성이나 필요성이 없는 이 시대에 왜 예언자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나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제들, 특히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일들을 하나하나씩 정확하게 집어내는 Cain의 예언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은 더 이상 예언자를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오늘날에도 예언자가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실 Paul Cain의 예언의 능력은 거의 전설적이었고 그가 집회하는 곳마다 참석한 사람들의 문제를 정확히 맞추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Cain이 알코올 중독과 동성애에 빠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고 본인 스스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해 줄 것과 상담치료 받을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한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역자들 중에 돈, 이성, 술, 마약, 동성애, 등등의 문제로 사역 중간이나 말기에 가서 범죄 할 때, 목사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은 그런 부류의 사람과 다르고 스스로 올바른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역자에 대해 ‘거짓목사’, 혹은 ‘거짓예언자’라고 낙인을 찍어버리고 마녀사냥을 하듯 온갖 정죄와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실 Paul Cain은 처음부터 거짓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역자들이 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에게 많은 열매가 나타나고 명성이 높아지다 보니까 초기사역과 다르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벗어나 기도와 말씀이 소홀해지면서 자만심이 그를 죄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교회 내에서도 손가락질을 받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거짓목사’라고 말할 수 없듯이 Cain 역시 거짓예언자가 아니라 죄 속에 허덕이는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 10장12절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역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은 없고 그가 한 시대에 쓰임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순간 어떤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타락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가지고 모든 성령의 사역에 대해 비방하는 것인데 Jonathan Edwards의 말을 인용한다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약점은 새롭고 흔치 않은 어떤 일을 구분하는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인정하거나 정죄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그곳에서 나오게 되면, 본인 말로는 그곳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체험들, 즉 눈에 거슬리거나 질서적이지 않고 경건해 보이지 않는 현상들에 대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미혹의 영이라고 비판을 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회나 선교를 위한 모임 혹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중보기도운동, 방언, 예언, 기름 부으심, 등을 무조건 신사도 운동과 연관시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비판의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언제나 같은 문제를 들추어내어 논쟁을 좋아하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과 비판적인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일군이며 남들보다 의롭고(눅 18:9-14), 자신만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갈 5:22-23)이지 ‘성령의 은사’(고전 12:4-11)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사실 은사가 필요치 않다는 가르침은 성령을 거스리는 교만한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반쪽짜리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Jonathan Edwards의 말을 빌리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들은 그 전체를 거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가 목사이든 평신도이건 당장 그들을 거짓목사나 위선자로 낙인찍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본인 눈에 들보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인데(마 7:1-5), 예를 들어 사십 년 동안 사사직을 지낸(삼상 4:18), 여호와의 제사장 엘리(삼상 1:3)가 영적 분별력을 상실해서 한나에게 빗나간 말을 하거나(삼 1:12-14), 혹은 아들 문제로 인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에게 책망과 저주를 받고(삼상 2:27-36), 나중에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삼상 4:15-18), 아브라함처럼 평안히 장사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창 15:15),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자식 농사를 잘못한 ‘거짓목사’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형교회를 목회한 모세 역시(출 12:37), 세상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평가하지만(민 12:3), 그에게는 참지 못하는 분노(민 20:10-12)와 망령된 입술이 있었고(시 106:33), 그로 인해 광야에서 떠돌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신 34:1-7), 그렇다고 해서 그를 ‘거짓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만 그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며(출 2:11-14), 생각 없는 경솔한 말과 분노 때문에(약 1:20), 실수를 했을 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확실하게 드러난 이단이 아닌 이상 말의 실수나(약 3:2), 경솔한 행동 때문에(눅 9:54), 거짓목사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교회 안에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행 2:6),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Edwards는 『부흥론』에서 “많은 사람이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하고 비상식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역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판단상의 많은 실수가 있고 사탄이 그 역사에 망상적인 것들을 섞어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도 될 수 없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생각되던 어떤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나 추문을 일으키는 행실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역전체에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는 못된다. 약간의 모조품이 있다고 해서 전부가 가짜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면서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종교개혁 시대의 Calvin처럼 자신과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무서운 정죄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경고합니다(마 7:2).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자녀라고 고백하지만 우리들 중에 거룩해서 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롬 3:9), 모든 목회자들 마음속에도 무지와 부패가 남아있기 때문에 사역을 행할 때 높은데 마음을 품는다면(롬 11:20-21), Cain처럼 얼마든지 타락한 목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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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첫 남자와 첫 여자인 아담과 하와를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뒤,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두렵고 창피해서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사랑에 가득 찬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에 이상이 생겼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당신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기대하면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지 못할 때 이상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주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문제라면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전심을 다해 주님 사랑하는 것을 당신 인생의 최우선으로 놓으십시오.

그것이 경건의 시간을 갖는데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을 해결해 줄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은 그분에 대해서 배우려는 이유뿐만 아니라

그분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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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Küng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말할 때, 지상의 교회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고 말하며, George Eldon Ladd 역시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지 결코 그 나라 자체일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속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고 교회는 사람들의 사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제자들이 전한 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설교와(막 1:15), 천국 복음이지(마 24:14), 교회가 가까이 왔다거나 교회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행 8:12, 19:8, 20:25, 28:23, 31).  사실 로마 가톨릭처럼 자신들의 교회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며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거나 세대주의 신학에서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교회 시대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으로 본다면 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그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교회가 천국 복음을 전파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로 들어올 것이고(막 16:15-16),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사 52:7), 그의 나라의 축복을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포함하면서도 교회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자들의 무리만을 가리키는(벧전 2:9), 반면 하나님 나라는 주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포함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주님의 구원을 입은 자들이 축복을 입으며 거하는 공간(요 18:36), 그리고 그 안에서 행사되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이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구성원은 동시에 그 나라의 구성원이므로 양자는 일치되는 면이 있으나, 하나님 나라는 그 구성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미치는 영역에 속한 일체의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롬 14:17), 그 범위와 내용에 있어서 교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에 속한 일체를 가리키는(시 103:19),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실제 성경 가운데서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먼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로(눅 11:20), 세례 요한이 말할 것처럼 회개함으로 그 일원이 될 수 있으며(마 3:1-2), 주의 능력으로 악한 세력인 귀신들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마 12:28), 비록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급속히 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마 13:31-33), 이것은 눈으로 불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눅 17:20-21), 마치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서(마 13:44), 영적으로 미련한 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루신 그분의 영적 왕권이 미치는 모든 영역이라 할 수 있고(마 12:28),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성도의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며(눅 17:20-21),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마 13:31-33, 44-45).  또 다른 의미로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로(눅 22:30), 성경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보다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에 대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마 25:31-46), 이는 사단의 세력들이 활동하는 이 세상보다(엡 6:12), 사단의 세력이 멸절될 그 날에(계 20:10),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이 완전하게 행사될 것이기 때문에(고전 15:25), 성경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계 21:1-8), 즉 영원무궁한 안식의 세계는 죄악이 남아 있는 이 세상과는 완전 구분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1:43, 눅 22:18, 행 14:22, 고전 6:9, 갈 5:21, 계 21:1-4).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눅 8:10), 부르심에 소망과(엡 1:18), 죄를 정복함(롬 6:14, 14:17), 그리고 마귀의 대적을 물리침과(눅 10:17), 질병에서의 고침 받는 것을 통해(눅 10:9),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느 정도 맛보게 될 것이며, 또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능력인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마 12:28, 롬 8:4-1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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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 텐 붐, 

나는 살인자입니다.

저는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한 명의 간수가 아침이면 들어와서

저녁이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 간수는 우리가 옷을 벗고 샤워장으로 갈 때면 

놀리고 모욕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경멸의 의미로 침을 뱉었고 

나는 그를 미워했습니다.

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살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석방된 이후,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그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강연 요청이 들어왔어요.

저는 정말 가기 싫었습니다.

조용히 등을 떠미는 주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첫 번째 강연 주제는 ‘용서’였습니다.

강연 도중, 

바로 그 간수가 청중들 틈에 섞여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어요.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가 나를 알아볼 리는 만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간수는 내 앞으로 나와서 맑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코리 자매님, 하나님의 용서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드는 감정은 환멸,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주님께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을 사랑할 그 무엇도 제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저와 가족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이 사람을 증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손을 그에게 주어라, 코리”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제 생애에서 행해 본 가장 힘든 일을 

미적미적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순종했습니다.

그 간단한 순종의 행동을 한 직후, 

마치 뜨뜻하고 미끈한 기름 같은 것이

제게 부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귓전을 생생히 울리는 듯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잘했다. 코리. 

내 자녀들은 그렇게 하는 거란다”

제 마음속에 미움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한 살인자가 다른 살인자를 포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말입니다.

 

레베카 피펏『토마토와 빨간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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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약 율법에서는 대속 받지 못하는 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신성을 모독한 죄는 그 당시에 사형으로 다스려졌고(레 24:10-23), 신약에 와서 성령에 대한 모독 즉, 성령의 사역에 의해(마 12:28), 입증된 그분의 존재를 항구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최악의 죄로 규정하고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마 12:31).  사실 진정한 고백과 회개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지만(요일 1:7-9), 용서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가 하나 있다면(막 3:29), 그것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죄는 예수님 사역 배후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눅 5:17),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눈으로 빛을 보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요 3:19),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그분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눅 12:10).  이 죄에 대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중상하였다.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성령이 제시하는 빛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끝 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막 3:29),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에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죄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불신, 예를 들면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들었지만 끝까지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범하는 죄라고 규정하거나 심지어 심각한 배교 구절인 히브리서 6장4-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죄는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고 성경 본문에서 의미하는 문맥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누군가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물론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8:24-25),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는 사람을 두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은 없고 불신앙을 소유하고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할뿐더러 이 죄가 일반적인 ‘불신’(막 6:3)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마 12:31)과 ‘성령을 훼방하는 것’(막 3:29)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본문 문맥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죄에 대해 공관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힘입은(마 12;28), 예수님의 사역에 명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마태복음에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직후에(마 12:22), 마가복음에서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난 후에(막 3:10-12), 그리고 누가복음은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고 고쳐주신 직후에(눅 11:14),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적인 비난을 받았는데(막 3;22), 분명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마 12:28),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마 12:24), 쫓아낸다고 적대적인 주장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를(눅 5:17),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왕하 1:6),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무 분명하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고 악한 마음으로 말로 성령을 훼방하고 자신의 사역을 귀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막 3:29),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1-32).  Louis Berkhof은 이 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항하는 죄라기보다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성령의 공적 사역을 거부하는 죄이다”

 

Jonathan Edwards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마태복음 12장22-32절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사함 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라고 말하면서 『부흥론』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비난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부에 대한 사악한 불경죄이거나 혹은 모르고서 성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모르고 한 것은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자신들이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특하게 영적 실재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빛에 대항한 고의적 죄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사함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죄가 영적자살에 준하는 행위로서 드러난 진리를 최종적이고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시 영적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부흥을 악의적으로 반대하고 비난하며 마귀의 역사라 부르는 자들은 이제 한 가지 일만 더하면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셈인데 그 일이란 자신들의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는 짓을 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촉구합니다.  “부흥이 임한 곳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탐문하라”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으로(행 3:6-9),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유(악의, 질투심, 교만)로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그 역사를 마귀의 능력에 귀속시키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들을 바리새인들은 주님 앞에서 직접 목격함에도 불구하고(눅 5:17-26), 이것을 거부한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신학적으로 틀렸고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비주의자이거나 감정주의자 사람들이 개인의 관계와 체험을 성경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적대시 하거나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만이 성경적이고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체험해 보지 않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참된 성도라면 육신이 연약하여 경박한 말과 경솔한 행동을 통해 성령을 근심시킬 수는 있지만(엡 4:30),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행 16:18), 즉 은혜를 주시는 성령을 모독하지는 않습니다(히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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