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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13 다른 방언과 천사의 말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드리는 반면에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주장을 하는데(고전 14:15),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란(엡 6:18),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처럼 어떤 초월적이고 몸에서 벗어난 탈혼적 체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신자의 영을 통해(고전 14:14),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26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기도이고 또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살전 2:4), 성령의 마음을 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롬 8:27).  물론 이 기도와 관련하여 Wayne Grudem은 “우리의 탄식이 효과적인 기도가 되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이지 방언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다른 견해를 제시하지만, 아무튼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어디에서도 방언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제안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말임을 언급하고 있고(고전 14:28),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때문에 방언은 말하는 자의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며(고전 14:14), 또한 통역이 없이는(고전 14:28), 지혜롭게 사용하되 교회 공동체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고전 14:4-5, 15-18), 통역이 없는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덕을 세우기 위해(고전 14:26),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가 방언을 실제적인 ‘지상의 언어’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10-12절에서 제시된 ‘세상에 소리’에 대한 비유를 통해 방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 혹은 천사의 말로(고전 13:1), 표현한 것을 보면 방언은 지상의 언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Grant Osbome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께서 합법적으로 주시는 정식 은사”이긴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통역 없이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의 ‘다른 방언’(행 2:4)과 고린도교회의 ‘방언’(고전 14장)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방언이라는 단어가 지상에서 다른 나라의 말, 즉 사람들이 이해하는 ‘구어’(口語)이며 ‘살아있는 언어’로 가리키는 경우는 단 한번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 사건인 경우이고(행 2:4, 6-8), 신약성경에 그 외에 모든 경우를 살펴보면 그 단어는 누구도 모르는 "천사의 말/신령한 언어"(고전 13:1, 14:2)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서 나오는 ‘다른 방언’의 이적을 구원사적으로 보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언어의 혼잡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범죄로 오게 된 “바벨탑의 저주”(언어의 혼잡/창 11:7)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하나 되어 전 세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나라 말(모국어)을 들었기 때문인데(행 2:5-11), 이 사건을 가지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Calvin은 제자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로 청중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으로 “언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알 수 없는 언어라고 해석하는 Abraham Kuyper는 제자들은 한 가지 언어를 말했지만 듣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제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청취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설득력이 없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지(행 2:4, 6, 8), 그곳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는 자들이나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사용되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성령의 능력으로 외국어 배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말(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그 순간에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Simon J. Kistemaker는 『The Testament Commentary』에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과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을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언어는 통변이 되어야 하지만 오순절의 청중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의 의미는 오순절에 제자들을 통해 사용되었던 다른 방언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 즉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방언과는 다른 언어들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방언’이고, 고린도교회 방언은 공적으로 말할 때 통역이 없으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신령한 언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통해 예루살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행 2장),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을 통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행 8장), 그리고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행 10장).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두 곳은 방언의 현상이 동반되었고, 또한 방언이 사마리아와 관련하여 언급되지 않더라도 복음전파에 대한 기초 작업이 사도행전 1장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놓아졌다는 것입니다.  Lloyd Jones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의 방언은 바벨탑에 대한 처방이며 복음에 보편성에 대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 궁금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언급한(고전 14:21),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사 28:11)에 대한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Palmer Robertson『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을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저주를(신 28:49-50), 나타내는 징조라고 말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과 같은 철저한 심판을 옛 언약에 속한 백성에게 내리셨다면 그분은 새 언약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듣고 배척한 모든 사람들에게 훨씬 중대하고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라고 해석하고, Richard Gaffin 역시 이사야의 예언이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점령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하나의 거울로 삼은 것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심판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중예배 시(고전 14:26), 이 원칙을 적용시켰는데 즉, 통역 없이 방언하는 것은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며 유다를 침범했던 이방나라들처럼 불신자들에게는 방언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심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통역 없는 방언이 불신자들을 향한 심판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고전 14:22), 만일 외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오늘날 은사 중지론자들은 방언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부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표적의 은사로 이 방언의 기능은 1세기에만 유효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만일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몸의 유익에 기여하며(고전 12:7), 자기 덕을 세우는 방언(고전 14:4)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39).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신자들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면 그것은 단지 그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고전 14:26), 누군가 방언을 하면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고전 14: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사야 28장11절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불신자들을 교회 내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위험성, 즉 공적모임에서 통역 없이 사용되는 방언에 대한 남용/오용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지 방언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4:18).  그러기 때문에 방언을 초대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 은사를 개인의 기도생활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들 모두가 미혹의 영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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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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