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영적인 감동을 주십니다.

두드리시는 방법은 수만 가지입니다.

전도자, 가족, 환경, 신문, 방송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문을 열어 드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 밖에서 계셨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기회를 통해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 어서 들어오세요.

내 인생에 들어오셔서 죄로 찌든 나를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것은 또 선물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선물을 준다고 합시다.

이때 선물을 받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손을 내밀어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이 내 것이라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도 이제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시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또 집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 재산의 반을 달라고 해서 그 재산을 갖고 나갔습니다.

떠나면서 자기 맘대로 한번 소신껏 살아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간 돈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났습니다.

결국에는 남의 집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신세까지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다시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이래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버릇하나가 생겼습니다.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동구 밖을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었습니다.

행여 아들이 돌아올까 애타게 밤낮 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멀리 동구 밖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단숨에 달려 나갔습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이제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나를 알아주거나 반겨줄 사람이 없고 공허한 생각이 들 때,

삶에 대한 어떤 기대나 희망이 사라질 때,

그리고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당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모셔 들일 때입니다.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을 해보세요.

“하나님! 무거운 인생 길 시달리다가 이제 주님께 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오늘 바로 주님께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느니라(계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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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만약 아픈 사람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있을 때 이들 “모두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의 예로 비추어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도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다 고치지 않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그 많은 병자들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을 고치셨고(요 5:1-14),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치유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입니다(요 5:19).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사역을 행해야 하겠지만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께서 어떻게 우리가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알게 해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어떤 사람은 주님의 분명한 음성을 통해 그러한 사람을 알게 해주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환상 가운데 그림처럼 보기도 하고, 또는 천사가 그 고칠 사람 뒤에 와 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을 보면 궁금하고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 경우에는 구체적인 인도를 구할 때마다 거의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같고 아마도 언제가 그분의 인도를 좀 더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일을 그칠 수는 없습니다(삼상 23:2, 4, 30:8).

 

오늘날 거의 모든 목회자들은 누구를 위하여 “기도 한다”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 사역에 있어 하나님께서 어떤 증세를 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그 병자에게 그 증세가 떠나가기를 직접 명령할 때가 많은데(요 14:12), 성경 누가복음 9장1절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신”것처럼 우리는 주님에게 어떤 사람의 병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분을 대신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요 14:13-14), 베드로가 행한 것 같이 그 사람에게 사역을 행하여야 하고(행 3:6-9), 무엇보다도 치유사역에 있어 이것이 일차적인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기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는 없고(막 9:14-29), 치유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히 해야만 하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일치시키며(마 26:39),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기도가 우리 자신의 죄와 무가치성을 고백하고(빌 4:13, 딤전 1:15), 앞으로 닥치게 될 영적인 싸움에서 그들을 대적할 성령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합니다(엡 6:10).

 

왜냐하면 이러한 준비기도가 없이는 아무런 능력과 권세도 받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사역을 행하기에 앞에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통찰력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실제로 그것이 ‘치유’를 구하는 것이든, ‘귀신축출’을 위한 것이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으로(막 16:17-20), 그러한 증세가 사라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권세와 능력이 없으므로 어떠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없지만(요 15: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셨기에 그분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명령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요일 5:14-15).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아는 일인데 아마 그분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우리가 명령하는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능력을 행하는 일이 특히 귀신축출을 위한 사역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우리가 이러한 사역을 행할 때 귀신들에게 떠나 달라고 간청하거나 그렇게 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몬의 장모에게 열병이 떠나갈 것을 명령하셨던 것처럼(눅 4:39), 직접 그 귀신들에게 명령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칠십 인의 제자들처럼 귀신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고(눅 10:17-20), 주님께서도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요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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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3과에서는 경건의 시간에 대해 다룬다.  경건의 시간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그리고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질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된다.  특히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건의 시간을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개인적인 결단을 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는 막막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큐티를 실천하는 데는 어떻게 할지 몰라 헤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영성이 깊어지는 큐티』는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은 어떻게 경건의 시간을 가질 지에 대해 구체적인 예와 함께 방법론을 보여준다.  처음 큐티를 시작하는 사람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구절 큐티부터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발견해 내는 원리 중심 큐티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큐티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각 단원마다 풍부하게 제공되는 실제 큐티의 예를 통해 구체적인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  저자는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하게 하는 핵심적인 도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큐티라고 대답한다.  큐티란 말씀으로 샤워를 하는 것으로 큐티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큐티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마치 샤워를 안 하는 사람처럼 악취가 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큐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큐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공부가 성경의 지식을 추구한다면 큐티는 성경 속 하나님의 음성을 추구한다.  성경공부가 내용을 중시한다면 큐티는 감동을 중시하며 성경공부가 ‘앎’을 강조한다면 큐티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물론 두 경우 모두, 결국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강조점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큐티가 어렵지 않은 이유는 큐티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큐티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공한다.

 

1. 큐티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

이는 가장 기초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3개월이든 6개월이든 꾸준히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서로를 끊임없이 자극해 줄 수 있는 함께 큐티하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4. 묵상을 기록하라.

어설픈 묵상이라도 일단 글로 쓰기 시작하면 묵상능력이 증폭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5. 큐티 안내 책자를 읽기 전에 먼저 스스로 묵상하라.

6. 본문이 어렵다고 주석이나 참고 서적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7. 일찍 자라.

8. 한 번 정도는 큐티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공부를 해 보라.

 

저자는 처음 큐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큐티 방법으로 구절 큐티를 권한다.  구절 큐티란 이미 주제가 정해져 있는 한두 구절을 중심으로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구절 큐티에서는 그 구절을 포함하고 맥락을 모른다 하더라도 명확하게 구절이 말하는 주제를 알 수 있는 구절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보통은 성경암송구절을 이용한다).

 

구절 큐티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선정된 구절(보통 한두 구절)을 몇 차례 읽는다.

2. 읽으면서 마음속에 갖게 되는 느낌이 무엇인지 잘 살핀다.

3. 그 느낌과 감상을 담대하게 적어 나간다.

4. 기록하다 보면 나의 삶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할지 깨닫게 되며 그것을 기록한다.

 

구절 큐티의 이점은 성경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절 큐티의 단점은 본문의 전체 맥락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좀 더 깊은 말씀 묵상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문 큐티를 저자는 제시하고 있다.

 

본문 큐티를 하는 일반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선정된 본문을 두세 번 읽는다.

2. 본문의 내용과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안경을 쓰고서 본문을 다시 읽는다.

3. 묵상의 내용을 기록한다.

4. 말씀에 따른 적용을 기록한다.

5. 기도함으로 마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2항으로 본문 큐티를 위한 묵상의 도구인 “7가지 묵상을 위한 안경”이 있으며 이중 한 가지를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1.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2. 내가 버려야 할 죄는 무엇인가?

3. 내가 주장해야 할 약속은 무엇인가?

4. 내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5. 내가 피해야 할 오류는 무엇인가?

6.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7. 내가 새롭게 발견한 진리는 무엇인가?

 

나아가 이러한 묵상의 깊이를 더해 줄 두 가지 방법으로는 첫째, 묵상할 때 질문을 사용하는 것과 둘째, 묵상한 후 기도로 하나님께 묵상의 내용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가 권하는 큐티 방법은 원리 중심의 큐티이다.  구절 큐티는 즉각적인 적용이 가능하며 본문 큐티는 삶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행동을 고치는 적용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본문 큐티를 오래하다 보면 거의 같은 영역에서 적용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표면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원리와 태도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리 중심의 큐티이다.  원리 중심 큐티는 성경을 정확히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 관찰과 해석이라는 성경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야 한다.

 

원리 중심의 큐티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내용을 관찰하기.

순수하게 본문 내용을 통해 객관적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고 관찰 할 때 어떤 관 점에서 관찰할 것 인 가를 사전에 결정해야 한다.

2. 일반적인 원리를 끌어내기.

이는 묵상에 의한 내용의 재해석으로 관찰된 사실에서 일반적인 성경의 원리를 끄집어내 는 과정이다.

3. 일반적인 진리를 나의 삶 속에 특별한 진리로 가져오기.

지금 자신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묵상하며 이 과정에서 새로 운 깨달음과 기도, 결단, 적용 등이 이루어진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원리 중심 큐티가 어떻게 말씀사역에 이어질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무엇보다 큰 강점은 각각의 설명하다 실제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큐티가 이루어지는 실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실례는 내용이 보다 풍부한 이해뿐 만 아니라 실제 큐티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 책은 경건의 시간을 배우고 가르치는 훈련생들과 인도자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며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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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왕이었지만(삼상 16:13), 사울의 핍박을 받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후로(삼상 17:41-49), 시작된 사울의 핍박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로 길보아 산에서 사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삼상 31:3-6).  사울의 아들 요나단(삼상 20장)과 그의 딸 미갈까지도(삼상 19:11-17), 아버지 사울의 부당한 시기를 못마땅하게 여겨 다윗을 도왔다.  이렇게 자기 가족까지 자신의 행동을 따르지 않음에 대해 사울은 더욱 악해졌으며 급기야는 다윗을 숨겨주고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까지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사울의 신하들은 제사장들을 죽이기를 꺼렸으며 결국 에돔 사람 도엑이 그 임무를 수행했다(삼상 22:17-19).  이렇게 온 백성들과 신하들, 그리고 여호와의 제사장들,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동조하지 않는 일을 사울은 막무가내로 주장하여 끝까지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죽이려고 애썼다.  반면에 다윗은 한 번도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계속 도망 다니면서도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썼다(삼상 24:6).  이때의 고충이 시편 33편과 62편에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다윗이 피난시절에 경험한 핍박은 그에게 인내와 신앙을 깊게 했으며 또한 백성들에게는 나쁜 지도자와 신실한 지도자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심어주었다.  결론적으로 다윗이 받은 핍박은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의미에서 선한 교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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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드리는 반면에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주장을 하는데(고전 14:15),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란(엡 6:18),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처럼 어떤 초월적이고 몸에서 벗어난 탈혼적 체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신자의 영을 통해(고전 14:14),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26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기도이고 또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살전 2:4), 성령의 마음을 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롬 8:27).  물론 이 기도와 관련하여 Wayne Grudem은 “우리의 탄식이 효과적인 기도가 되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이지 방언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다른 견해를 제시하지만, 아무튼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어디에서도 방언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제안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말임을 언급하고 있고(고전 14:28),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때문에 방언은 말하는 자의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며(고전 14:14), 또한 통역이 없이는(고전 14:28), 지혜롭게 사용하되 교회 공동체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고전 14:4-5, 15-18), 통역이 없는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덕을 세우기 위해(고전 14:26),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가 방언을 실제적인 ‘지상의 언어’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10-12절에서 제시된 ‘세상에 소리’에 대한 비유를 통해 방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 혹은 천사의 말로(고전 13:1), 표현한 것을 보면 방언은 지상의 언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Grant Osbome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께서 합법적으로 주시는 정식 은사”이긴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통역 없이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의 ‘다른 방언’(행 2:4)과 고린도교회의 ‘방언’(고전 14장)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방언이라는 단어가 지상에서 다른 나라의 말, 즉 사람들이 이해하는 ‘구어’(口語)이며 ‘살아있는 언어’로 가리키는 경우는 단 한번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 사건인 경우이고(행 2:4, 6-8), 신약성경에 그 외에 모든 경우를 살펴보면 그 단어는 누구도 모르는 "천사의 말/신령한 언어"(고전 13:1, 14:2)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서 나오는 ‘다른 방언’의 이적을 구원사적으로 보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언어의 혼잡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범죄로 오게 된 “바벨탑의 저주”(언어의 혼잡/창 11:7)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하나 되어 전 세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나라 말(모국어)을 들었기 때문인데(행 2:5-11), 이 사건을 가지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Calvin은 제자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로 청중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으로 “언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알 수 없는 언어라고 해석하는 Abraham Kuyper는 제자들은 한 가지 언어를 말했지만 듣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제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청취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설득력이 없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지(행 2:4, 6, 8), 그곳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는 자들이나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사용되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성령의 능력으로 외국어 배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말(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그 순간에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Simon J. Kistemaker는 『The Testament Commentary』에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과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을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언어는 통변이 되어야 하지만 오순절의 청중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의 의미는 오순절에 제자들을 통해 사용되었던 다른 방언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 즉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방언과는 다른 언어들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방언’이고, 고린도교회 방언은 공적으로 말할 때 통역이 없으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신령한 언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통해 예루살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행 2장),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을 통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행 8장), 그리고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행 10장).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두 곳은 방언의 현상이 동반되었고, 또한 방언이 사마리아와 관련하여 언급되지 않더라도 복음전파에 대한 기초 작업이 사도행전 1장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놓아졌다는 것입니다.  Lloyd Jones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의 방언은 바벨탑에 대한 처방이며 복음에 보편성에 대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 궁금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언급한(고전 14:21),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사 28:11)에 대한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Palmer Robertson『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을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저주를(신 28:49-50), 나타내는 징조라고 말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과 같은 철저한 심판을 옛 언약에 속한 백성에게 내리셨다면 그분은 새 언약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듣고 배척한 모든 사람들에게 훨씬 중대하고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라고 해석하고, Richard Gaffin 역시 이사야의 예언이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점령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하나의 거울로 삼은 것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심판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중예배 시(고전 14:26), 이 원칙을 적용시켰는데 즉, 통역 없이 방언하는 것은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며 유다를 침범했던 이방나라들처럼 불신자들에게는 방언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심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통역 없는 방언이 불신자들을 향한 심판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고전 14:22), 만일 외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오늘날 은사 중지론자들은 방언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부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표적의 은사로 이 방언의 기능은 1세기에만 유효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만일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몸의 유익에 기여하며(고전 12:7), 자기 덕을 세우는 방언(고전 14:4)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39).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신자들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면 그것은 단지 그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고전 14:26), 누군가 방언을 하면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고전 14: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사야 28장11절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불신자들을 교회 내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위험성, 즉 공적모임에서 통역 없이 사용되는 방언에 대한 남용/오용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지 방언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4:18).  그러기 때문에 방언을 초대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 은사를 개인의 기도생활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들 모두가 미혹의 영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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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 준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은 복음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견고하고 온전하며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확신한다.  그들은 두 가지 견해 사이에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복음에 속한 위대한 가르침들은 더 이상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복음에 있는 위대한 가르침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에 속한 위대한 가르침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감정으로 크게 고조되어서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의 진리성에 대해 과거에 확신한 것보다 더 크게 확신하며 살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  그들은 복음이 계시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들을 생생하게 확신하는 능력과 영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참되게 확신한 사람이라면 현재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영적이거나 중생하여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특유한 영적인 믿음이 있고 복음의 진리성을 확신하는 특별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원리로 그들 안에 내주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달하신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는 확신은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갖는 그 확신에 따라 착한 일을 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자체의 질이 다르다.

 

성경에 계시된 이 모든 것들과 다른 많은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은

신적인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맛볼 때만 영혼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그것들은 영혼에 가려져 있어서 영혼은 그것들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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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여성이 2014년 12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다른 서너 가지 계시 받은 것을 인터넷을 통해 퍼트릴 때 불신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 중 어느 한 부류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말을 믿고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고, 또 다른 부류는 “무당이 점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면서 정신이 나간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여자라며 서로 간에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나귀도 사용하시고(민 22:28),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실 수 있으시며(마 3:9), 전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무명의 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실 수는 있겠지만(왕상 13:11-32), 이번 일을 통해 느끼는 것은 모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리의 말씀에 바탕 된(고전 3:11),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너무 쉽게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사 26:3).  이미 지나간 사건(?)들을 통해 이제는 말씀을 붙들고 정결한 삶(약 1:27)과 회개가 동반된 생활을 해야 하는데(계 3:19), 누군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말하면 그것을 분별하지 않고(고전 14:29),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요일 4:1).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한국에는 세상 신에게 무릎 끓지 않은 소수의 기도/믿음의 용사들이 있기 때문에(롬 11:4), 이 여자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무오하고 확실한 그분의 계시라고 믿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딤후 3:16-17, 벧후 1:20-21),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견해나 해석, 그리고 적용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계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고전 14:30), 그것은 반드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진리이여야만 합니다(고전 4:6).  다시 말해 항상 진리를 말하지만(시 119:16), 하나님의 ‘꿈’이나 ‘환상’(민 12:6, 행 2:17), 그리고 느낌의 형태로 주시는 ‘계시’나 어떤 확실한 음성은 우리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오류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행 10-9-23).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 들은 것이 그분께로 왔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법을 알 필요가 있고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개인적인 계시는 항상 성경과 일치하는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아야 하고(요일 4:1),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범하도록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약 1:13).

 

가령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 중에 성령께서 이 시간 어떤 계시를 주신다고 말하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길’이라고(출 9:1, 삼상 10:18), 말하며 목소리를 바꾸거나 설교적인 어투로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치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인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는 자신을 주님이 쓰시는 당나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벧후 2:1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위한 능력이나 은혜로 베풀어주신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해(약 1:17),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밝혀진 진리나 성령의 촉구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행 5:32),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사역과 은사를 알도록 하실 것이지만(고전 14:23-25), 만일 어느 때이든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애쓰거나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한다면 Joy Dawson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아직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에(고전 13:9), 하나님으로부터 정확한 환상(행 10:9-16)이나 계시를 받더라도(행 21:10-14), 베드로(행 10:17)나 아가보처럼 자잘한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켜 그릇되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행 21:33, 22:29, 23:12-14).

 

또 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그분으로부터 온 예언적 계시인지를 시험해 보는 중요한 방법은 그 받은 예언이 실현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렘 28:1-17),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예언이나 기사나 표적도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마 24:24), 그것은 그 배후에 있는 귀신의 힘이나 발언자의 교묘한 조작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신 13:1-5).  사실 많은 예언들은 우연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식별하는 근접한 방법으로는 성취를 강조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입니다(마 7:16-17).  쉽게 말하면 진리나 성취는 좋은 열매의 일부분 일수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예언하는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음성의 결과를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음성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교회 공동체 안에서 좋은 결과인 사랑과 기쁨과 평안, 그리고 인내 등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갈 5:22-23).  요약하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과는 상관없이 정말로 거듭난 주의 백성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겠지만(눅 6:43), 만일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면서 가는 곳마다 싸움과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다면(약 3:14-16), 그 받은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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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많은 교회들이 건물 확장에 열을 올린다.

그들은 사무실을 넓힌다.

그리고 부속 건물을 지어서 교육관,

체육관 또는 가정 사역 센터로 사용한다.

하지만 기도실을 넓히는 교회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목회자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 강해는 즐겁지만 기도는 언제나 힘들다”라고 말했고,

마틴 루터 역시 “올바로 기도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라고 했으며,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회고록에서

“거의 언제 어디서나 나는 절규하듯이 기도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기도의 대가들의 음성에

언제 귀를 기울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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