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관계가 당신 소유의 전부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완전한 만족을 누리시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그런 관계를 가지고는 싶지만 그 외에 뭔가 다른 것도 하고 싶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제게 뭔가 사역이나 다른 할 일을 주시면 좋겠는데요”

우리는 실로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느라고 바쁘지 않으면 무가치하고 쓸데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네가 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관계’이며,

가장 고귀한 ‘성취’이며,

가장 고귀한 ‘지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순종하고

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성취감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도 완전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와 사랑으로 사로 잡혀 있다면

당신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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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가짜 감정들이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높이 고조되었으나

겉만 번지르르한 감정들이 있지만 

참되고 거룩하며 견실한 감정들도 있습니다.

신앙 감정이 너무나 강력해서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격렬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일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들은 그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일 수 있는가 의심합니다.

그 격렬함이 오히려 악령이 역사한다는 표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오류를 범합니다.

첫째, 만일 이 일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어떤 새롭고 비상한 점이 있으면

그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이 일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거부해 버립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주시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하나님이 스스로를 제한하시지 않으신 곳에서 

그분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둘째, 어떤 사람들이 성경 대신 역사나 과거의 관점을 가지고

이 일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오류를 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일의 어떤 외적이고 부수적인 상황들을

때때로 광신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난 것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서 어떤 일치점을 발견하면

그들은 이 일 전부, 

혹은 최소한 그것의 본질을 거부하면서

그것이 ‘광신주의’라고 단정합니다.

 

대부분의 인류의 커다란 약점은 

새롭고 흔치 않은 어떤 일을 구분하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인정하거나 정죄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전체 속에 있는 잘못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들은

그 전체를 단번에 거부해 버립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상한 마비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루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의 느끼지 못했으며

영적인 것들에 대해 거의 배우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이런 역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한 번도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부흥에서 나타나는 최악의 질병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균형 잡힌 부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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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coming out)이란 은밀한 성적 취향이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나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2000년 가을, 한국에서 커밍아웃한 유일한 방송인/연예인이며 동성애(동성 지향적인/Same Sex Attraction)자인 홍석천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었고, 이미 외국에는 수많은 연예인들(Elton John, George Michael, Ian McKellen, Freddie Mercury, 등등)이 자신을 동성애자인 것을 스스로 밝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교회에서 많이 불리워지는 찬양 중에 하나인 “Glory to God Forever”를 부른 영국출신 찬양 사역자인 VIcky Beeching 역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혔는데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과 그에 따른 고민과 인생 이야기, 그리고 처음 여성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12살 때라고 말하면서 남학생과 사귀고 싶었고 그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적 성향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후에 오순절 교회를 다녔고 현재 성공회에 다니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그것으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감을 극복하기 위해 오직 일에만 매진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동성애적 성향을 갖는 원인에 대해 하나는 ‘선척적인’ 요인에 의해 유전적으로 타고 난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요인으로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견해인데 먼저 동성애를 유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나의 성향을 바꿀 수 없을뿐더러 나는 나의 본성적인 것을 이대로 인정해야만 한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다시 말해 동성애 성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성적 친밀함을 누릴 권리와 동성애적 생활방식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선택에 따른 생활방식이 아니라 유전적 원인으로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면 틀림없이 동성애 사회에 커다란 유익과 동성애의 부도덕한 오명을 벗을 수 있기 때문에 소위 ‘게이 유전자’를 찾으려고 열심히 연구를 하지만 지금까지 유전적 이론을 입증할만한 과학적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춘기에 이른 아동이 환경적 요인에 따라 ‘동성애자’나 ‘이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예를 들어 어릴 적 성장과정에 있어 부모로부터 사랑과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같은 또래의 집단적인 영향을 받아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지만 이것 역시 개연성이 있는 하나의 심리적인 이론일 뿐 ‘정설’(定說)은 없다는 것입니다.

 

Jeffrey Satinover 박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Homosexuality and the Politics of Truth』에서 “동성애가 유전적인가 아닌가, 타고난 것인가 심리적인 것인가 택한 것인가 혹은 사회 때문에 인가를 단순히 단정 지으려는 것은 미성숙한 것이고 대부분의 증명들은 부정확한 것들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이거나 후천적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연구 결과는 명백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거나 신뢰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는 경우는 자신의 절대적이고 숭고한 가치 기준을 망각하거나 또는 그것에 대한 복종 의지가 상실되는 경우라고 했는데 C. S. Lewis는『인간 폐지』에서 탁월한 논리로 이렇게 적어 내립니다.  “그 어떤 재간을 부려도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심리학적 진술에서 ‘나는 이 충동에 따라야만 해’라는 실천적 원리를 도출해 낼 수는 없다. 본능에 순종하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본능 역시 그렇다. 우리의 본능은 전쟁 중에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자신은 성적 친밀함이나 자기표현으로 동성애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권리와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 대한 욕심이지(롬 1:26, 약 1:15),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살전 4:3).

 

분명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에 대해 성적순결을 지켜야 하고(딤후 2:22), 결혼한 사람은 성적정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데(히 13:4), 예를 들어 우리가 특정한 성적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롬 6:12), 자신의 생활방식과 행동에 대해서는(고후 5:10), 본인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갈 6:7).  사실 아담의 타락을 통해 모든 인간은 죄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롬 5:12), 이 타락한 욕망을 풀기 위해 여자들은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롬 1:27), 일어나 부끄럽고 가증스러운 일을 행한다면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32).  따라서 성욕이 유전적이든 후천적이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창 6:2), 창조된 피조물이며(창 1:27), 하나님은 그 선택에 대해 우리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이고(롬 14:12), 만약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 교회나 신자들이 있다면 이 문제를 Christianity Today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뮌헨대학 신학 교수인 Wolfhart Pannenberg 박사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명백하게 거부해야 할 것을 평가하고 있다. 동성애 결합을 결혼과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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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을 ‘사도’라고 부르는데(마 10:2), 이 사도라는 명칭은 문자적으로 ‘사자’(빌 2:25)와 ‘사신’(고후 5:20)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요 13:23)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복음서 기자들은 이들의 사역을 설명할 때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막 6:12), 복음서에 나오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80퍼센트 이상은 오직 이 열 두 명의 사도들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었습니다(눅 9: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사도’라는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셨는데, 예를 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직접 대면한 바울과(행 9장),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포함시키셨습니다(행 14:14, 고전 15:7, 갈 1:19, 살전 2:6).  먼저 사도적 직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사람에 의해 확증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사람들 모두는 선지자이거나 교사이지만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선지자처럼 환상과 계시를(민 12:6), 받았다는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면에 바울은 계시를 받아(엡 3:3), 신약성경 거의반 정도를 기록한 것을 볼 때에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갈 1:11-12).  즉, 바울은 선지자겸 교사이고(딤후 1:11),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라는 것을 말해주는데(행 15:35), 이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의 범위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령께서 따로 세워 보내심을 받을 때까지 아직 사도적 직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음 구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을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즉, 성경은 그들이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고(행 13:2-3),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첫 번째 선교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르는데(행 14:14), 이것은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함으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엡 1:4), 하나님께서 사도의 직임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26: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사람들의 안수와 예언을 통해 사도적 사역에 부름 받은 것을 확증 받았던 것입니다. Kenneth E. Hagin는 이 사도적 부르심에 대해 『He Gave Gifts Unto Me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내가 지금 부르는(I am calling)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불러 시킨(I have called)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는데(행 13:2), 그것은 ‘과거시제’이다”  환언하면 안디옥 교회에서 사람들을 통해 받은 안수는 단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삶에 계획해 놓으신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단순한 확증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오늘날처럼 교회의 공식적인 인증을 거치거나 사람들의 예언을 통하여 소명을 받고 사역의 직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직임을 받은 사도는 우선적으로 말씀의 설교자이며(막 16:15), 가르치는 교사인데(행 2:42),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처음부터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딤전 2:7, 딤후 1:11).  다시 말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갈 2:7-9),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먼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행 9:15).  사실 사도의 주된 사역이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이지(행 4:33), 교회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 사도적 직임과 관련하여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거나(계 2:2), 아니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조정자이며 분쟁 해결자이고 심지어 ‘영적권위’라는 말까지 쉽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은 교회를 조종하거나 지배한다고 나와 있지 않으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동안에 오직 교회에 대해 영적인 감독만 했고(행 16:4), 예루살렘교회나 다른 어떤 교회도 감독하지 않았으며 일단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독권을 이양해 주기만 했습니다(행 20:28).  우리가 서신서를 통해 아는 것처럼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가 질문을 해오면 그것에 대해 바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을 뿐 그들을 조종하거나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James. D. G. Dunn은 이 문제에 대해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에서 “바울은 그들 대적하는 사람들도 인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명령 투의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베푸는 대부분의 가르침은 명령이라기보다는 ‘권유’이며 그는 개심자들이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권위주의자가 하는 방식대로 자기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그는 자기 권위의 효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고전 5:3-5, 고후 2:6-8). 그가 사도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자신이 위임받은 사역에서 야기된 문제에 국한되는데 예를 들어 주님의 말씀에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순종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경우에는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 때조차 권위적인 태도를 삼가고 있다”(고전 7:25, 40).  물론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비중 있게 생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갈 2장), 더 나아가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여겨(롬 1:5, 갈 1:1),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잘못된 교리와 교회의 질서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거짓 사도’들처럼(고후 11:1-15),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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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2과는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생활에 관한 내용으로 경건의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건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하도록 훈련생을 이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시간을 결단하지만 쉽게 실천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늘 급한 일에 쫓기는 삶』은 1권2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급한 일에 얽매여 사는지에 대해 말하며 이의 극복을 위한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훈련생들에게 그들의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떻게 경건의 시간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래는 그 대략의 내용이다.

 

우리는 늘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문제는 중요한 일은 꼭 오늘이나 금주 안에 끝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 반면 긴급한 일들은 그것이 덜 중요하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처리하도록 압박을 가해온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사용은 궁극적으로 각자가 세운 목표에 의해 좌우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치 않았던 기회나 요구에 충동적으로 많은 시간을 소모하여 정작 중요한 일을 미처 끝내지 못하는 경우 역시 허다하다.  그래서 늘 긴급한 일에 쫓겨서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생산적인 시간 사용을 위해서는 우선 중요한 것을 정해야 한다.  시간을 통제하는 첫 번째 단계는 어떤 활동이 가장 중요한지를 정하여 하루 혹은 한 주 혹은 한 달 동안 그 일에 적절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간을 현재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당신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현재 당신의 생활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조정해야 한다면 현실에 직면함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실제 시간 사용 표를 만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는 시간 예산을 세우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높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할 활동을 위해 어느 활동을 줄여야 할지를 신중하게 결정해라.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 많은 변동을 계획하지는 말라.  끝으로 실천이 필요하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웠다 하더라도 확고한 실천의지가 없다면 소용이 없다.  하루를 시작할 때 그 날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우선순위에 따라 해야 할 일을 나열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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